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103화 (103/313)

[103]

시간이 흐르자 여학생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지만 나를 노려보기만 할뿐 아까처럼 무작정 달려드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여학생에게 노인이 합격소식을 알려줬고 이내 입꼬리를 움찔거리며 기쁨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 어리숙한 모습을 보니 이제야 그 나이 또래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난 아이가 자존심이 상할까 봐 터져 나오는 웃음 애써 참고 천천히 기지개를 폈다. 인원이 보충되긴 했지만 가르칠 일도, 우리가 할 일도 태산이었다. 잠시 동안 이어진 휴식이 끝나고 우리는 다시 업무를 시작했다.

당장 내일이 임무를 시작해야 하는 날이다. 물론 첫날이니만큼 적응기간이 필요하겠지만 그렇다고 긴장감을 늦춰서는 안 된다.

나에게 주짓수 기술을 걸던 여학생의 이름은 박다혜,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인데 키가 171cm로 용팔이와 비슷했다. 본인이 강력하게 현장직을 원하고, 신체적 능력도 뛰어난 편이니 되도록 수용하려고 의견을 맞췄다. 그리고 회의 끝에 적응기간을 두고 현장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박다혜와 같은 학년인 남학생의 이름은 최성수였다. 소꿉친구치고는 둘은 성향이 너무 달랐는데 이상하게 사이는 좋아 보였다. 혹시 사귀는 건 아닐까? 하고 유심히 살펴봤는데 그냥 박다혜가 최성수의 누나 노릇을 하고 있었다.

최성수 학생은 유약하고 겁이 많았다. 물론 그것을 탓하는 건 아니었지만, 현장직에 투입하기엔 좀 무리가 있었다. 본인도 그것을 알기에 사무실에서 일하기를 원하고 있었고 일단 나는 김복자 할머니를 도와줄 인원으로 그를 배정했다. 이내 최성수는 할머니를 따라 김혜정에게 무전기와 지도에 대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오후 3시가 넘자 모든 게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당장 내일 입어야 할 임무복들이 속속히 도착했고 낡았지만 그래도 쓸 만한 개인 캐비닛도 설치가 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은테 안경이 사람들을 시켜 도착한 총기들이 도착했다.

소총 20자루와 권총 5자루. 소총은 대한민국 군필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그 총이었고 권총은 내가 아는 것부터 모르는 종류까지 다양하게 섞여 있었다. 그리고 맘 놓고 쓰라는 건지 탄창이 넉넉하게 제공되었다.

총알을 안전한 독방으로 옮기던 노인은 쏠 수도 없는 걸 왜 이리 많이 주냐고 투덜거렸지만 난 쌓여 가는 총알들을 보며 이상하게 마음이 든든해지는 걸 느꼈다. 우리는 정리를 마치고 한쪽 자리에 판을 깔고 앉아 노인과 함께 총기를 열심히 점검했다. 하지만 그 순간 털보가 시끄럽게 작업을 하던 소리가 멈추더니 무척이나 기쁜 듯한 음성이 우리를 멈춰 세웠다.

‘동윤 씨! 어르신!’

쿵쿵쿵

장비 같은 털보가 순진무구한 미소를 지으며 이곳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어제부터 만든 게 완성된 걸까? 근데 손에는 긴 원통형의 철 빼고는 별다른 물건이 없었다. 하지만 노인은 경악한 얼굴로 벌떡 일어났고 말을 격하게 더듬으며 털보를 향해 걸어갔다.

‘서, 설마……. 그거냐?’

그거? 그게 뭔데? 난 노인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고 내 앞에 있던 털보는 말없이 웃으며 자기가 만든 물건을 우리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조금 큰 쇠파이프로 제작했는지 원통형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길이는 검지의 2배? 정도였다. 철로 만든 것 치고는 생각보다 가벼워 보였다.

난 한참을 쳐다봤고 이것이 뭘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한 가지 물건이 있었는데 그 물건을 생각하자마자 내 이성은 그 생각을 틀어막았다. 설마? 그게 가능한가? 난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꾹 닫힌 입을 가까스로 열었다.

‘……소음기.’

노인은 털보 손바닥 위에 있는 소음기를 재빠르게 낚아챘다. 그리고 외관과 내부를 살펴보기 위해 정신없이 손가락을 움직였고 이내 감탄하며 말한다.

‘얼치기가 아니야. 격벽까지 제대로 들어가 있어.’

겉모습만을 그대로 카피한다고 해서 완벽한 소음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제대로 만든 소음기의 단면도를 보면 마치 장 주름처럼 소리의 확산을 막는 격벽들이 촘촘하게 세워져 있다. 그리고 총알이 나가는 방향과 정밀한 균형, 충격에 떨어져 나가지 않는 신뢰도까지 가져야 했다. 노인은 황급하게 소총을 가져와 소음기를 장착해 본다.

딱 들어맞는다. 아무리 손으로 흔들고 빼 보려 해도 올바른 해체 방법이 아니면 빠지지 않는다. 총의 연장선은 마치 예술적인 곡선처럼 아름답고 곧게 뻗어 있었다. 총은 오랜만에 그 위용을 어김없이 발휘하기 시작했다. 난 침을 삼켰고 노인도 덩달아 침을 삼켰다.

‘끝내준다, 털보야.’

노인이 그렇게 말하며 털보의 손을 낚아챘고 이내 격하게 흔들었다. 나도 물론 털보를 아낌없이 칭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에덴이라 해도 종말 전 세상과 비교해 보면 기계장비가 열약한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열약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은 털보는 결국 수작업으로 소음기를 완성하고 만 것이다.

‘영화랑은 다른 거 알죠?’

털보가 멋쩍게 웃으며 우리에게 주의를 줬다. 소음기라고 해 봤자 100~110dB 정도의 총소리를 85~95dB 정도로 낮추는 역할에 불과했다. 말 그대로 영화에서나 나오는 그런 소음기 소리는 구경이 매우 작거나 아음속 탄이 아니면 불가능한 고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건 울려 퍼짐의 정도였다. 도시에서 총을 쏘게 된다면 귀가 찢어질 듯한 굉음과 함께 총성이 온 도시에 울려 퍼진다. 그 소리는 그놈들을 불러오는 죽음의 노크와 같았고 총을 함부로 쏠 수 없는 이유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소음기를 착용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비록 소음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총성이 울려 퍼지는 것을 막는 Suppressor(억제기) 역할은 충분히 가능했다. 물론 남용해서는 안됐지만 크로스 보우와 겸용해서 사용한다면 부랑자들을 상대하는 우리들의 활동 폭이 굉장히 넓어질 수 있었다.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만들고 있기에 생산속도는 느렸다. 하지만 꾸준히 만들고 있고 나와 노인이 사용할 소음기는 각각 하나씩 있었기에 다음 임무에도 투입이 가능했다. 우리는 털보가 만든 소음기를 소중하게 챙기고 다시 총기점검을 시작했다.

소음기가 하나 추가되었을 뿐인데 마음이 든든했다. 6시가 되면 일행들과 함께 든든히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일찍 들어갈 생각이다. 내일부터 바빠질 예정인데, 오늘도 야근을 했다가는 채연이가 하루 종일 삐져있을지 모른다.

다들 웃고 떠들고 아무렇지 않는 기색을 보여줬지만 내 눈에는 옅은 긴장감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내일 있을 첫 임무 때문일까? 다들 몸이 굳어있다. 컨디션 관리와 사기 진작을 위해 오늘은 일찍 쉴 예정이다

* * *

밤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김복자 할머니와 학생 두 명은 우리와 같은 숙소에서 잠이 들었고 해가 뜨지 않은 새벽부터 일어나 어제 준비한 아침식사를 황급히 먹었다. 다들 표정이 긴장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시작부터 겁을 먹지는 않았다.

난 식사를 마치고 잠시 아이들이 잠들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꿈나라에서 헤엄치는 채연이를 확인하고 흐트러져 있는 이불을 목 아래까지 올려 주었다. 오늘도 무사히 돌아와 채연이를 만날 수 있도록 누군지 모를 신에게 조용히 기도했다.

출발하는 인원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잠들어 있었지만 오직 강수련만이 잠에서 깨어나 우리를 배웅했다. 아이들이 깰까 봐 소곤거리지도 못했지만 우린 무언의 눈빛을 나누며 유대감을 확인했다. 강수련이 살짝 팔을 벌리길래 난 익숙한 몸짓으로 그녀를 안아 줬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포옹이 익숙해졌다.

현관 앞에서 대기하기를 5분. 문 사이로 여명이 새어 나온다. 우린 그 신호를 시작으로 현관문을 열었고 이내 한 줄로 서 이동을 시작했다. 목적지는 에덴의 정문, 모든 장비와 무기는 어제 미리 챙겨놨기에 바로 출발만 하면 하루 일과가 시작되는 것이다.

해가 뜨자마자 에덴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출근하는 사람들은 바쁘게 우리 옆을 지나갔고 총을 뺏긴 경비들도 교대를 위해 이동을 시작했다. 그 가운데를 가로질러 이동하는 우리는 꼭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 같았다.

움직일 때마다 총과 크로스 보우가 걸려 절그럭거리는 소음을 낸다. 그 소음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모았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마다 자리에 멈춰 우리를 쳐다보았다.

용팔이는 그런 사람들의 반응이 신기한지 한참을 주변을 둘러보다 이내 표정을 비장하게 바꾸며 최대한 멋진 각도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 각도는 오래가지 않아 무너졌고 용팔이의 머리는 탁 소리를 내며 앞으로 숙여졌다. 용팔이의 뒤통수를 찰지게 때린 노인은 아침부터 흐뭇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김복자 할머니와 최성수 학생은 중간에 우리와 떨어져 사무실로 향했다. 어제 무전기의 사용법과 숙지할 것을 교육받았으니 이제 남은 것은 경험밖에 없었다. 난 내 품속에 있는 무전기를 어루만지며 정문을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해는 완전히 떠 아침이 되었고 육중한 정문은 모습을 드러냈다. 탐색조도 사라지고 전투조도 밖으로 나갈 권리를 빼앗겼다. 말 그대로 외부로 나갈 수 있는 인원은 우리가 유일한 것이다. 난 허리를 곧게 피고 텅 빈 공터를 향해 걸어갔다.

경비들은 우리를 노려봤지만 절대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다. 노인이 살벌하게 눈을 빛내며 총을 들고 있는데 어떤 미친놈이 시비를 걸까? 난 어제 장착해 둔 소음기를 어루만지며 품속에 있는 무전기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잡음이 들려오기 시작했고 이내 최성수 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 들리세요?]

왜 나보다 긴장하고 그러니? 내가 잘 타일러 주려고 했는데 저 뒤에 있던 박다혜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최성수 멍청아! 떨지 마!’

[하지만……. 으윽…….]

나랑 무전을 하랬더니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난 한숨을 푹 내쉬고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천천히 줄였다. 그러자 최성수의 목소리는 서서히 사라지고 듣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김복자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 총각. 이제 정문이야?]

‘네, 할머니. 이동하고 있는 길을 계속해서 불러 드릴 테니 놓치지 마세요.’

[걱정 마.]

그 무전을 끝으로 난 주머니에 무전기를 찔러 넣었고 문 앞으로 걸어가 경비 탑 위에 있는 경비 하나를 바라봤다. 얼굴이 익숙하다, 저번에 문을 안 열어 주던 그놈인가? 그 경비는 징계를 용케 피한 모양인지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꼭 꼬리를 만 개처럼 보이기에 그냥 손을 휘저으며 빨리 문을 열라 했다.

이젠 부탁도 필요 없다. 우린 원하는 시간 때마다 마음대로 에덴을 드나들 수 있었다. 곧 정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고 우리는 약속한 포지션으로 뭉쳐 정문을 빠져나왔다.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공기가 바뀐 기분이었다. 묵직한 긴장감이 내 온몸을 감싸고 눅눅한 한기가 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간다.

익숙하다.

* * *

나와 노인은 소음기를 장착한 총과 크로스 보우를 들었다. 무겁긴 했지만 그간 체력이 많이 붙었는지 걷는 것은 무리가 없었다. 그리고 용팔이 형제는 어제부터 열심히 연습한 크로스 보우를 들고 있었고 김혜정과 강 형사는 총알 없이 대검만 장착된 소총을 들고 있었다.

한명은 군필이고 또 다른 한명은 현직 형사였지만 종말한 세상 앞에 그런 스펙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한 일주일 정도 임무를 진행하며 아무 이상이 없다고 판단한 후 크로스 보우나 소총 총알을 지급할 생각이다.

그리고 새로 들어온 우리 막내 박다혜는 불만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녀에게 지급된 무기는 대검 말고는 없었는데, 등에는 크로스 보우와 총 대신 식량과 장비가 들어 있는 가방을 들려 있었다.

그녀에게 무기를 주지 않는 건 모든 인원이 만장일치로 결정한 것이다. 종말한 세상과 치열한 싸움 앞에 애 어른이 어디 있겠냐마는 적어도 우리 일행들에겐 죄책감이 남아 있었다. 이런 애까지 싸우게 해야 해? 그런 생각이 무기지급을 막게 한 것이다.

박다혜가 아무리 주짓수를 배우고 기본적인 체력이 있다고 해도 정신적으로는 아직 미숙했다. 그녀를 무시하는 것이 아닌 패닉과 돌발적인 행동을 염려한 대처였다. 물론, 본인은 무척이나 불만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아닌 건 아닌 거였다. 그래도 노인이 나중에 크로스 보우 사격과 총검술을 알려 주겠다고 하니 표정이 많이 풀렸다.

정문이 서서히 멀어질수록 새로 들어온 인원들의 숨을 거칠게 변하기 시작했다. 출발할 때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정작 실전에 투입되자 긴장과 두려움이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용팔이 형제는 그런 인원들을 하나하나 챙겼고 우리는 목표로 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부랑자들의 흔적을 찾고 탐색해야 했지만 오늘의 목표는 그것이 아니었다. 한 일주일 정도를 적응기간으로 잡은 우리는 에덴 근처를 돌며 그놈들을 피해 가는 법, 그리고 그놈들과 싸우는 법까지 전부 보여 줄 생각이었다.

철이 담금질을 할수록 강해지는 것처럼 정신과 육체를 두려움에 적응시킨다. 비록 힘들고 고된 훈련이겠지만 부랑자 탐색조에 들어온 이상 각오해야 하는 것이었다. 난 모든 것의 시작을 알리는 입김을 훅 내뱉었고 그 입김은 담배연기처럼 하늘로 흩어졌다.

뒤에서 용팔이가 박다혜를 향해 묻는다.

‘떨려?’

박다혜가 앙칼지게 대답했다.

‘시, 시끄러!’

목소리가 떨리고 물기가 어린걸 보니 많이 무서운 모양이었다. 눅눅하고 끈적끈적한 공기, 회색의 정글이 선사하는 두려움은 성인 남자도 감당하기 힘든데 이제 갓 고2인 그녀는 오죽할까? 하지만 용팔이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조곤조곤 그녀를 타일렀다.

‘걱정하지 마.’

박다혜는 말없이 입술을 꾹 깨물 뿐이었다. 이곳에 아군이라곤 우리밖에 없었다.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역경과 고난을 넘어 생기는 유대감은 우리를 형제로 만들어 준다. 그리고 그 출발선 앞에 선 그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걱정하지 마.

난 나와 모두를 향해 천천히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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