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오후 일과가 시작되었다. 말만 휴가지 사실상 임무를 준비해야 하는 기간이었기에 우리는 바쁘게 몸을 움직여야 했다. 털보는 감자를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고, 이내 작업을 위해 자리를 피했다. 아까부터 우리에게 기대하라고 말하는 게 꽤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용팔이 형제는 지나치게 들뜬 얼굴로 빗자루와 대걸레를 꺼내왔고, 이내 사무실 바닥을 쓸고 닦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강 형사는 뒤통수를 긁으며 말없이 형제를 도왔고, 어수선한 사무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머지 인원은 한쪽에 놓인 큰 책상을 가져와 사무실 한가운데에 놓았고, 그 위에 커다란 지도를 올려두었다. 탐색조 텐트 안에 있던 지도를 김혜정이 그대로 챙겨 온 것이기에 그 낡은 지도에는 온갖 정보들이 표기되어 있었다.
난 그 지도위에 내가 기록한 정보들까지 추가로 기재했다.
완성하고 보니 장관이었다. 희생된 탐색조가 목숨을 담보로 수집한 정보들과 그간 우리가 다니면서 기록한 정보들이 지도 위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나와 노인은 지도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고, 주변을 기웃거리던 김혜정은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건 그 어떤 걸 요구해도 줄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이었다. 난 그 지도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펜을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그리고 지나치게 널찍한 사무실을 둘러보며 아직도 군기가 잡혀 있는 김혜정에게 물었다.
‘김혜정 씨, 혹시 예전 탐색조 인원 중에 다시 활동하길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털보와 김혜정, 그리고 강 형사까지 합류했지만 방대한 임무와 다양한 일을 처리하기엔 인원이 많이 부족했다. 가장 중요한 전투 인원부터 사무실에 남아 우리를 서포터해 줄 비전투 인원까지. 지금은 사람 하나가 아쉬운 판국이었다.
비록 해산한 탐색조지만 혹시나 비슷한 일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에게 물어봤다. 하지만 김혜정은 순간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바닥을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굉장히 주눅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 한 명도 없을 거예요.’
노인은 앓는 소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난 유난히 어두워 보이는 그녀 때문에 섣불리 이유를 물어볼 수 없었다. 일단 인원 보충이 불가피한 상황인 만큼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주눅이 들어있던 김혜정이 손을 반쯤 들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꼭 경력자여야 하나요?’
‘그럴 필요는 없지.’
내 옆에 있던 노인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나는 상황을 고려하느라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현장을 못 뛰면 사무실에서 일하면 된다. 일단 오게 하고 차근차근 가르치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방법이 있습니까?’
김혜정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재빠르게 일어났다. 그리고 다른 책상을 향해 후다닥 뛰어간 그녀는 몸을 바삐 움직이며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들고 온 종이에는 이런 글자가 큼직하게 쓰여 있었다.
[부랑자 탐색조 모집! 시간당 식권 두 장!]
‘공고를 하자고?’
노인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고, 나도 덩달아 웃고 말았다. 처음 탐색조 본부를 방문할 때 발견한 모집공고, 그 촌스럽고 허접스러운 모집공고는 역시 그녀의 작품이었다. 나름 그림이라고 그려둔 꽃 그림은 웃음을 자아내고 삐뚤삐뚤한 글씨는 실소를 나오게 했다.
‘딱히 방도가 있나요?’
김혜정은 새침하게 대답했다. 우리가 웃고는 있었지만 사실 그녀의 말이 다 맞았다. 왜냐하면, 이런 모집공고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인과 나도 그것을 자각하고 있기에 모집공고가 가지는 허접함 말고는 그녀를 나무랄 수 없었다.
노인은 소매를 걷고 책상 위에 놓인 펜들을 잡았다. 나도 그녀가 만든 모집공고를 향해 한숨을 훅 내뱉고 소매를 걷었다. 저런 걸 걸어 두었다가는 사람들이 유치원 설립 공고인 줄 알고 비웃을 것이다. 보기도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이왕 걸어 둘 거 그럴싸한 게 좋았다.
‘아, 아니……. 왜요? 이 정도면 완성인데?’
그녀는 소매를 걷고 다가오는 우리를 보며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니, 이 정도면 잘 그린 거 아니야? 뒷걸음을 치기 시작한 그녀의 얼굴에는 어처구니없는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곧 그 자신감은 사라지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우리를 피해 그녀는 황급히 뒤로 돌았다.
하지만 노인은 재빠르게 다가가 도망가는 그녀의 공고문을 뺏어 들었다. 그리고 꾸깃꾸깃 구겨 책상 위에 던져놓고 그녀를 두 번 죽이는 치명적인 독설을 날렸다.
‘이런 걸 휴지라고 하는 거야. 나중에 똥 닦을 때 써.’
그녀가 울상을 지었다.
* * *
노인이 그녀의 실력을 보며 허접하다고 말한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노인의 그림과 글솜씨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글씨는 마치 컴퓨터로 쓴 듯 가지런했고, 귀퉁이에 그려진 그림은 펜으로 그린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훌륭했다.
종이 귀퉁이에는 석양을 향해 걸어가는 한 남자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 그림은 이상하게 낭만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나와 김혜정이 내뱉는 감탄사에 각자 할 일을 하던 일행들이 움직임을 멈췄고, 이내 이쪽으로 몰려와 노인의 그림 솜씨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 뒤 공고문이 완성되었고, 사방에서 작은 박수와 감탄사가 들려왔다. 김혜정은 언제 삐졌냐는 듯 감탄사를 내며 열렬하게 손뼉을 쳤고, 나머지 일행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난 노인이 이런 재주가 있는지 몰랐기에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멋진 공고문이 완성된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나와 노인, 그리고 김혜정을 제외한 인원은 다시 각자 할 일을 찾아 움직였고, 공고문을 양손으로 든 우리는 사무실을 나와 김혜정이 안내하는 방향으로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김혜정이 말하길 대학교처럼 공모문을 붙일 수 있는 게시판이 따로 존재한다고 한다. 그곳에는 하루하루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신문도 한 편씩 올라오고, 단 단체나 모임에서 사람을 모집하는 광고도 많이 올라온다.
우리는 부지런히 걸어 게시판 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멀리서 서로를 연결해 주던 인터넷이 없어진 지금, 마땅한 소통 거리가 없는 사람들은 게시판 앞으로 자연스럽게 모이기 시작했고 곧 만남의 광장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사람을 만나 수다를 떠는 사람들, 그리고 게시판을 어슬렁거리며 신문을 읽거나 무언가를 붙이는 사람들. 유난히 조용한 에덴도 사람이 모이는 이곳만큼은 시끌벅적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러 게시판에 조용히 공고문을 붙였다.
다른 공모문에는 화려한 장식과 그림들이 그려져 있어 우리들이 만든 것은 생각보다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작은 공고문을 읽어 주는 사람이 있길 바라며 우리는 만남이 지속하는 광장에서 빠져나왔다.
* * *
사무실을 쓸고 닦고, 그 위에 많은 무전 장비들을 설치하니 벌써 해가 지고 말았다. 마무리 작업까지는 한참이 남았는데 벌써 저녁이 되어 버린 불상사가 생긴 것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철야 작업을 해야 했고, 늦은 밤이 되서야 모든 작업을 끝낼 수 있었다.
작업이 끝나고 녹초가 되어 버린 일행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사무실 바닥에 누워 곯아떨어졌다. 다들 숙소까지 갈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나도 몰려오는 피로를 참지 못하고 결국 바닥에 누웠으며,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떠보니 벌써 해는 떠 있었고, 사무실 한쪽 난로 앞에는 모든 인원이 뒤엉켜 잠에 빠져 있었다. 아무래도 사무실이 크고 넓다 보니 난로를 설치해도 추운 건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난 내 허리춤을 끌어안고 있는 용팔이를 발로 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자 노인은 벌써 일어나 난로 위에 주전자를 올려 물을 끓이고 있었다. 노인이 들고 있는 종이컵에서는 달콤한 커피 믹스의 냄새가 풍겨왔고, 내가 그곳에 시선을 던지자 노인은 자연스럽게 커피를 내밀었다.
난 따뜻한 커피로 몸을 녹이며 시간을 확인했다. 타이밍 좋게도 숙소에서 아침 식사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들을 깨우며 아침의 시작을 알려 왔다. 용팔이가 잠꼬대를 하며 내 다리를 붙잡기에 입안에 양말을 넣어 주었다.
전쟁 같은 기상 시간이 끝나고 우리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 숙소로 향했다. 등교와 출근을 하는 일행들은 당연히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채연이는 깔끔하게 꽃단장을 한 채 등교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반갑게 손을 흔들자 채연이는 고개를 새침하게 돌리며 한쪽으로 도망가 버렸다. 아마 내가 사무실에서 잠든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삐진 아이를 달래 주기 위해 한참을 뛰어야 했고, 결국 까르륵거리는 채연이를 잡아 낼 수 있었다.
털보는 소속이 우리 쪽으로 바뀐 만큼 숙소를 같이 쓰기로 했고, 일행으로 합류하게 된 강 형사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포지션이 애매한 김혜정은 아까부터 우리에게 거머리처럼 달라붙더니 결국 밥상 한 자리를 차지했다.
집도 있는 사람이 왜 이래? 노인이 그녀를 향해 핀잔을 주었지만, 김혜정은 그냥 머쓱 웃으며 밥을 퍼먹을 뿐이었다. 그래도 붙임성이 좋은 편인지 다른 여성 일행들과도 금방 말을 트고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수다를 떠는 김혜정의 얼굴이 유난히 밝아 보였다.
우리의 식사는 언제나 시끌벅적했다. 채연이는 어느새 내 무릎 위에 올라와 있었고, 내 주변으로 많은 이들이 모여 하하 호호 웃음을 터트린다. 난 이 광경이 너무나 보기 좋으면서도 이것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 한쪽이 묵직해졌다.
그런데도 강수련이 만들어 준 요리는 너무나 맛있었다. 난 김치찌개와 밥을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채연이 입속에 밥알을 부지런히 넣어 주었다. 볼이 빵빵해진 상태로 밥을 오물거리던 채연이는 나를 올려다보더니 이내 히 웃는다.
* * *
식사를 모두 끝낸 일행들은 일사불란하게 그릇들을 치웠다. 평화로운 시간이 지나고 또다시 하루를 시작할 바쁜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나는 야근 때문에 섭섭해했을 채연이를 위해 학교까지 같이 등교하기로 했고, 사무실로 가야 하는 일행들은 어쩔 수 없이 먼저 출발시켰다.
그리고 채연이와 아이들을 데리고 조금 멀리 떨어진 학교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아이들은 마치 병아리처럼 모여 내 뒤를 따라왔고, 삐약삐약 예쁘게도 울었다. 내가 학교까지 데려다 준다고 하니 어색하면서도 은근히 기쁜 모양이었다. 난 도착한 학교 정문에서 아이들이 들어갈 때까지 신나게 손을 흔들어 주었고, 쏟아지는 햇살 앞에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날 학교 앞까지 온 어른은 내가 유일했다.
아이들을 학교까지 모두 바래다 준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겨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사무실로 향했다. 공고문을 붙인 지 하루가 지났으니 오늘은 소식이 있을지도 몰랐다. 수십 명이 몰려오면 어쩌지? 난 이상하게 들뜬 마음을 애써 감췄다.
그렇게 육중한 사무실 문을 열었을 때, 그 설렘은 모두 헛짓거리임을 알 수 있었다.
공고문을 보고 찾아온 사람은 모두 3명뿐이었다. 지팡이를 짚고 난로 앞에 앉아 있는 할머니 한 분과 교복을 입고 찾아온 학생 둘. 난 얼떨떨한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고 있는 노인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할머니를 보며 천천히 물었다.
‘이분도……?’
‘……나보다 누님이시더라.’
그 말을 들은 할머니가 콜록콜록 기침하더니 입술을 오물거리셨다. 노인보다 연세가 많으신 분이……. 부랑자 탐색조 공고문을 보고 지원한 것이다. 난 벌어진 입을 겨우 다물고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나머지 두 명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나머지 두 명은 고1 정도 되어 보이는 학생이었는데, 아침부터 학교는 안 가고 이곳에 앉아 있었다.
오른쪽에 앉아 있는 여학생 하나는 치마를 짧게 줄이고, 머리를 노랗게 물들였다. 그리고 껌을 짝짝 씹는 꼴이 첫인상부터 심상치 않았다. 어쭈? 내가 자신을 바라보는 게 불만인지 그녀는 미간을 강하게 찡그린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 있는 다른 학생은 굉장히 유약해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어째 내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는 게, 지원을 한 것인지 징병을 당한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난 다리를 덜덜 떨고 있는 그 아이를 바라보며 저절로 튀어나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저씨 잘 싸워? 대장이야?’
그 순간 껌을 씹던 여학생이 나에게 말했다. 건방지다고 해야 할까, 무례하다고 해야 할까? 난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지만, 주위에 있는 일행들은 모두 얼굴을 굳히며 여학생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단번에 모이는 시선에는 약한 적의가 섞여 있었다.
그러자 여학생은 당황하며 몸을 움찔거린다.
‘어, 어? 왜! 뭐!’
딱!
그 순간 여학생의 뒤통수를 강타하는 소리가 찰지게 울려 퍼졌다. 그곳에는 용팔이가 손을 번쩍 들고 얄밉게 웃으며 서 있었는데, 사람을 때렸음에도 이상하게 기뻐 보였다. 용팔이가 여학생을 향해 깐족거리며 말했다.
‘죽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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