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김혜정이 온 줄 알고 문을 열었더니 그녀가 아니었다. 난 입안에 남아 있는 밥알을 모두 삼키며, 문 앞에 서 있는 은테 안경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은테 안경은 잠시 집 내부를 살펴보더니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식사 중이셨군요. 죄송합니다.’
난 소매로 입을 슥 닦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모든 일행들이 식사를 중단하고, 은테 안경이 서 있는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일단 그들에게 식사를 마저 하라고 말한 뒤, 다시 앞을 바라보며 은테 안경과 눈을 마주쳤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 배정받으신 사무실을 보여드리려고 했는데, 너무 일찍 온 모양입니다.’
사무실? 아 탐색조가 가지고 있던 그 허름한 텐트를 말하는 걸까? 난 잠시 볼을 긁으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밥이야 적당하게 먹었고, 일행들이 가지는 행복한 시간을 중간에 끊기는 싫었다. 난 안경에게 잠시 이곳에 있으라고 말한 후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출근하래?’
노인이 큰 김치 하나를 입안에 쑤셔 넣으며 나에게 물었다.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계속 식사를 하라 말했고, 이내 내 방 안으로 들어가 내 장비와 옷들을 챙겼다. 식사를 하던 일행들은 내 눈치를 보는지, 아까보다 조용해져선 먹는 것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난 마지막으로 총과 대검까지 챙기고 방으로 나와 노인을 향해 말했다.
‘식사하고 쉬고 계십쇼. 잠깐 나갔다 올게요.’
‘쌍놈들! 휴가라면서…….’
노인은 내가 식사를 하는 중간에 나가게 되자 불만이 많은 모양이었다. 미간과 표정을 잔뜩 찡그린 노인은 이내 사발에 담긴 국을 시원하게 들이켜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나와 같이 갈 생각인가 보다.
그리고 한쪽에서 조용히 밥을 오물거리던 채연이도 노인을 따라 일어나더니 손을 번쩍 들었다. 나도! 나도! 하고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게, 자신도 데려가 달라는 앙탈 같았다. 난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채연이를 번쩍 들어 올렸고, 신나게 비행기를 태워 주었다.
한참을 그렇게 까르륵 웃는 아이와 어울려 주고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난 강수련에게 채연이를 건네주었다. 아직 밥을 반도 못 먹은 채연이는 마저 식사를 해야 했다. 채연이도 자신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는지 잠깐 뚱해 있었지만, 이내 환하게 웃으며 얌전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
금방 다녀올게? 난 마지막으로 채연이에게 볼 뽀뽀를 받고 강수련에게 신뢰가 담겨 있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그녀는 믿고 가라는 듯 굳게 고개를 끄덕여 준다. 노인과 나는 빠르게 장비를 챙겨 함께 현관문을 나섰다.
* * *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은테 안경은 노인과 내가 밖으로 나오자 뒤통수를 긁적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마 자신 때문에 식사를 다 하지 못한 거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난 별거 아니라는 말과 함께 빨리 사무실로 안내해 달라는 말을 전했다.
은테 안경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향해 손짓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사무실이 꽤 괜찮은 모양이지? 우리는 정문으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부지런히 그를 따라갔다. 절그럭, 절그럭. 나와 노인이 걸을 때마다 장비와 총이 맞물리며 육중한 소리를 내었다.
방탄복과 헬멧만 있었다면 꼭 특수부대 같은 모습일 것이다. 난 검은색 원단으로 만들어진 옷을 손으로 훑으며 입김을 훅 내뱉었고, 노인 또한 새로운 장비들이 마음에 드는지 얼굴에 웃음을 머금었다. 길을 걷는 내내 주변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거리를 걷는 경비들의 허리에는 이제 총이 없었다. 우리가 거리를 지나칠 때마다 일부 경비들이 이곳을 사납게 쳐다보았지만, 나와 노인이 고개를 돌리자 금세 꼬리를 말고 황급히 자리를 피한다. 옆에선 노인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까, 우리는 정문이 보이는 상가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고 이내 안경이 이끄는 건물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곳은 꼭 곡물창고처럼 크고 높았는데, 지은 지 얼마 안 된 신축 건물처럼 재질도 튼튼하고, 페인트칠도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탐색조에 속해 있을 때 드나들었던 군용 텐트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노인은 우리가 사용할 사무실이 마음에 드는지 작게 웃음을 머금었고, 나도 묘한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게 우리가 고생한 결과인 걸까? 난 반들거리는 문을 쓰다듬으며 작은 상념에 빠졌다.
은테 안경은 얼굴에 ‘어때? 최고지?’라고 써놓고 우리의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듯 건물의 두꺼운 문을 양손으로 잡고 힘껏 힘을 가한다. 그러자 상당히 넓은 사무실, 아니 강당이라고 봐도 될법한 내부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 구석에는 무언가를 열심히 만지고 있는 선객이 있었다. 자세히 볼 것도 없었다. 큰 덩치에, 털이 수북한 얼굴. 요즘 얼마나 바쁘신지 우리와 잘 만나지도 못하는 털보 아저씨가 그곳에 있었다. 노인이 큰 소리로 그를 향해 외쳤다.
‘어이! 털보!’
오랜만에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털보는 한참 무언가를 만들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황급히 고글을 벗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쪽으로 향해 쿵쿵쿵 뛰어온다. 아들을 그리워하던 그의 안색은 많이 좋아져 있었다.
‘영감님! 동윤 씨! 잘 지내셨수?’
그가 만들어 준 크로스 보우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잘 지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노인은 유난히 반가워하며 털보와 악수했고, 이내 팔까지 쫙 벌려 포옹까지 해 보였다. 나도 얼굴에 한가득 얼굴을 머금고 털보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나저나 요즘 바빴나 봐?’
노인이 털보의 배를 툭 치며 물었다. 에덴으로 들어온 후 어딘가로 끌려간 털보는 무척이나 바빠 보였다. 이런 시대에도 기술자는 귀한 걸까? 통 만나기 힘든 털보는 숙소도 따로 배정받고, 심지어 연락조차 힘들었다.
털보는 한숨을 폭 내쉬더니 더 복스럽게 자란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말도 말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머리에 쓰고 있는 고글을 완전히 벗어젖혔다. 그의 얼굴에는 먼지와 쇳가루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아주 징하게 굴려 먹습니다. 시부랄…….’
털보는 욕설을 내뱉었고, 이내 회상하기도 싫은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마 에덴에 밑천까지 다 뽑아 먹힌 모양이었다. 저 한쪽에 서 있는 은테 안경이 딴청을 부리는 게, 털보를 못살게 군 주범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노인도 그런 은테를 바라보며 혀를 쯔쯔 찬다. 몹쓸 놈…….
노인의 시선이 매서웠는지 은테 안경은 헛기침을 콜록콜록 내뱉기 시작했다. 그리고 황급히 종이컵에 커피 3잔을 타와 우리를 향해 내밀었다. 안경은 털보를 향한 미안함이 들었는지 그동안 만나지 못한 우리를 향해 살며시 말을 내뱉었다.
‘이제부터 같이 일하시게 될 겁니다.’
그러자 털보가 기다렸다는 듯 외쳤다.
‘끝내주는 녀석으로 만들어 뒀으니 기대하쇼.’
그 자신 있는 대답을 들은 노인은 흐흐하며 웃었고, 나도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털보의 팔을 툭 쳐 주었다. 용팔이 형제가 간혹 털보의 근황을 물어보곤 했는데, 조금 있다 이곳으로 온다면 무척이나 반가워 할 것이다. 난 다시 뭉친 마트 멤버를 한동안 조용히 바라봤다.
큰 창문 사이로 아침 햇살이 환하게 비춰 내렸다. 하루를 다시 시작하려니 첫눈이 내린 바닥처럼 모든 게 생소했다. 하지만 절대 나쁜 기분은 아니었기에 난 새 건물과 새 사람이 주는 그 여운을 마음껏 느꼈다.
* * *
‘저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나머지 일행분들은 이곳으로 오라고 전해 둘게요.’
은테 안경은 여전히 바빠 보였다. 아직도 업무가 남아 있는지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난 불현듯 생각난 사람이 있었고, 문을 열려는 은테 안경을 재빠르게 붙잡았다. 김혜정! 오늘 아침에 우리 집으로 오라고 한 그녀에게 말을 못 해 뒀다.
‘김혜정 씨한테도 이곳으로 오라고 전해 주세요. 아마 저희 숙소 근처에 있을 겁니다.’
우리가 그녀와 자주 부딪히는 광경을 봐서 그런 걸까? 은테 안경은 뜻밖이라는 듯 살짝 놀란 얼굴로 대답했다.
‘혹시 팀원으로 쓰실 생각이십니까?’
난 별다른 사족을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은테 안경의 얼굴이 살며시 풀어지기 시작했고, 절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라는 말과 함께 고개를 연신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유능합니다. 후회하지 않을 실 거에요.’
알고 있다. 비록 실패한 탐색조장이라는 꼬리표가 달렸지만, 그 실패에는 큰 의미가 없었다. 그녀는 인간적이고, 공과 사를 구분하며 적어도 팀원을 위할 줄 알았다. 투덕거리긴 해도 그녀의 경력을 알고 있는 은테 안경은 조금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헤어졌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니, 다른 일행들이 출근하고 등교했을 시간이 훌쩍 넘어 있었다. 아마 은테 안경이 사무실이 생겼다는 소식을 전하면 김혜정과 용팔이 형제도 곧 이곳으로 오게 될 것이다.
난 그동안 시설이나 구경하자는 마음에 주변을 분주히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단체장은 작정하고 우리를 밀어주기로 했는지, 사무실 내부는 상당히 쾌적했다. 수십 명이 몰려와 잠들어도 부족하지 않을 공간과 털보가 이용할 작업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탐색조 텐트 안에 있던 다양한 무전기가 한쪽에 즐비했다.
제대로 된 환경을 갖추려면 체계적인 준비가 필요하겠지만, 그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하다. 난 일기장을 꺼내 우리가 필요로 할 장비들과 수납 가구들을 하나하나 적기 시작했고, 노인과 함께 건물의 견적을 잡았다.
이왕 시작하게 된 거 제대로 하자는 생각이 내 의욕에 불을 질렀다. 털보는 만들던 장비를 마저 제작했고, 우리는 한동안 건물 주변을 돌며 바쁘게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한 30분 정도가 흘렀을까, 문이 열리며 용팔이 형제와 김혜정이 안으로 들어왔다.
* * *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부끄럽지만 우리는 제법 숙련된 사람이다. 노인은 말할 것도 없었고, 나도 정신없이 굴러다니며 적어도 밥값은 한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용팔이 형제? 입 아프게 떠들어 봤자 다 설명하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털보는 현장으로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가 만들어 준 장비와 무기들은 적어도 수십 명의 위력을 내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나와 노인 앞에서 각진 포즈로 차렷 자세를 취하고 있는 김혜정만큼은 조금 위치가 애매했다.
사실 나는 그녀가 이곳에 남아 우리를 위한 오퍼 역할을 해 줬으면 했다. 그녀가 탐색조에서 했던 역할도 그것이었고, 꽤 잘하고 있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절대 그럴 생각이 없는지 현역 시절에 입고 있던 군복까지 입고와 우리 앞에서 뻣뻣하게 차렷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나는 조금 당황해했고, 노인은 그런 그녀를 보며 혀를 쯔쯔 찼다.
‘그 바보 같은 선글라스는 뭐야?’
그녀는 조교들이 쓸법한 선글라스를 가져와 자랑스럽게 쓰고 있었다. 근엄? 그냥 고양이가 위협을 부리는 것 같았다. 한참 각을 잡고 있던 그녀는 노인이 선글라스를 지적하자 움찔거리며 몸을 떨었고, 이내 조심스럽게 선글라스를 벗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현장에서 뛰고 싶습니까? 위험할 텐데…….’
그러자 그녀는 흡 숨을 들이켜며 차렷 자세를 취했고, 이내 크게 외쳤다.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난 갑자기 들려오는 큰 소리에 황급하게 귀를 막았고, 노인도 미간을 찡그리며 그녀의 이마를 딱 때렸다. 그녀는 이상하리만큼 기합이 팍 들어가 있었다. 남들이 다 꺼리는 현장을 왜 들어오고 싶은 걸까? 속사정이 있어 보였지만, 난 묻고 싶지 않았다.
이곳은 노인이 알아서 해 줄 것이다. 꼭 신병을 잡아먹는 조교의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노인에게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고 말한 후 나는 장비를 챙겼다. 인원이 두 명이나 추가가 되긴 했지만, 아직 한참 모자라다.
적어도 팀이라는 집단이 완성되려면 인원 추가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꼭 현장을 나가는 인원이 아니더라도 이 큰 본부를 유지하려면 잡다한 인재가 꼭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인원보다도 꼭 먼저 데려와야 하는 사람이 있었다.
난 육중한 문을 다시 열고 정문 근처에 있을 병원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같이 눈의 지옥을 건너온 강 형사를 만나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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