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회의는 살벌한 노인의 반응으로 순식간에 끝이 났다. 하지만 기선제압에 성공했기에 결론이 흐지부지하게 변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이번 사건을 끝으로 전투조는 총기 사용 권한을 빼앗겼으며, 앞으로 총기관리는 단체장 산하에 있는 관리부가 직접 맡게 되었다.
물론 우리 팀은, 아니 이제는 부랑자 탐색조가 된 우리는 그 총기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파격적인 인사였고, 확실한 대우였다. 몇몇 간부들이 불쾌한 티를 내기는 했지만, 이번에 얻어 온 정보를 통해 실적을 인정받았기에 대놓고 반대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에덴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전투조는 팔다리가 잘렸고, 그들을 견제할 또 다른 세력이 한순간에 등장했다. 권력이니 명예니, 이런 것에 관심이 없는 우리로서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었지만 일단 단체장이 원하는 방향으로 휘둘려 줄 생각이었다.
이틀간 주어진 휴가. 휴가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할 일이 많았고, 준비할 것도 많았다. 사실상 준비 기간인 그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했다.
장비와 지도는 충분했지만, 현재 인원으로 조를 꾸리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결국, 필요한 것은 인원보충. 하지만 에덴에서 아는 사람이라곤 얼굴을 마주한 몇몇이 전부였기에 어떤 사람이 있고, 또 누구를 데려와야 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문득 생각난 얼굴이 하나 있었다.
‘김혜정한테 가 볼래요?’
숙소로 돌아가는 밤길을 걷다가 노인을 붙잡고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노인은 피곤한지 하품을 쩍 내뱉더니 이내 입맛을 다시고는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싫지만 해야 한다는 얼굴? 틱틱거리는 노인 성격을 알기에 그냥 웃고 말았다.
그녀는 지금 어디 있을까? 탐색조 건물이 없어졌기에 그녀가 있을 장소를 알지 못했다. 난 하는 수없이 저 앞에 걸어가는 은테 안경을 잡고, 자초지종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그러자 은테 안경은 피곤할 법도 한데 자기가 직접 안내하겠다고 나섰다.
탐색조와 관련된 모든 것이 사라졌기에 그녀는 현재 자신의 거처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예우 차원에서 사무를 보고 있다지만 근래 무슨 일이 있었는지 힘이 하나도 없다며 은테 안경이 넌지시 전해왔다.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에 일단 입을 다물었다.
은테 안경은 그녀의 거처가 있는 빌라까지 우리를 안내해 주고, 자신은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다며 자리를 천천히 피했다. 난 고개를 끄덕이고 102호에 머물고 있다는 그녀를 보기 위해 천천히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102호 앞에 도착했다. 초인종은 당연히 없기에 문을 아주 살짝 두드렸고, 현관 구멍에서 내 얼굴이 잘 보이도록 몸을 바로 했다. 그러자 잠시 뒤 현관문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이내 문이 살며시 열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잠이 들었었는지 머리가 부스스했고, 눈에는 눈곱이 끼어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우리 때문에 눈만큼은 크게 뜨여 있었고, 얼굴 한구석에는 묘한 기대감이 감돌아 있었다. 난 애써 웃음을 참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이야기 좀 할 수 있어요?’
그녀가 입술을 씰룩이며 대답했다.
‘바쁜데…….’
바쁘긴? 방금까지 자다 나온 거 다 알고 있는데?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그녀를 보니 계속해서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난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부탁을 하려고 온 만큼 한 번쯤은 숙이고 들어가기로 했다.
‘부탁할게요.’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한순간 풀어지더니 입꼬리가 씨익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재빠르게 문을 열고 빨리 들어오라는 듯 손짓한다. 그 태세변화가 어이없는지 노인이 옆에서 픽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따뜻한 온기가 새어 나오는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 천천히 문을 닫았다. 그래도 여자가 사는 집이라고 생각보다 좋은 냄새가 났고, 집안은 상당히 깨끗했다. 그래도 털털한 면이 있는 그녀는 부끄러운 기색 하나 없이 우리를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녀는 부산을 떨며 밝은 전등 하나를 가져왔고, 몸이 차갑게 굳어 있는 우리를 위해 따뜻한 녹차까지 챙겨왔다. 그녀는 이곳까지 찾아온 우리가 어지간히 반가웠던 모양이었다. 난 따뜻한 녹차로 양손을 녹이며 차가운 숨을 훅 내뱉었다.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노인은 여유롭게 차를 마실뿐이었고, 나 또한 차갑게 식어 있는 내 몸을 녹이기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침묵 속에 조급함이 들었는지 살짝살짝 엉덩이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 꼴이 꼭 안달 난 강아지 같았다.
난 조용히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 일은 들은 게 있습니까?’
연달아 사건이 터지기 시작한 에덴이었지만, 오늘 일은 에덴의 근간을 뒤흔들고 존재 이유를 흐트러지게 만든 큰 사건이었다. 물론 그녀도 듣고 본 것이 있는지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김윤식 그 새끼, 드디어 사고 쳤죠?’
그녀도 쌓인 게 많은 모양이었다. 난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컵 안에 남아 있는 녹차를 모두 들이켰다. 회의실에서 느꼈던 긴장과 거리를 걸어오면서 겪은 추위가 한순간에 날아간 기분이었다. 난 일단 그녀에게 회의실에서 있었던 내용을 모두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못했던 일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내 이야기를 경청했기 시작했고, 한마디 한마디에 반응하며 분통을 터트리거나 깔깔 웃으며 시원해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투조의 징계를 듣고는 손뼉을 치며 노인을 바라봤다.
‘뭐?’
노인은 심술이 부리고 싶은지 그녀를 향해 불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심술 따위는 개 코딱지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존경이 묻어나오는 눈빛으로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단체장의 의도가 궁금합니다.’
회의실에서 발악을 하던 김윤식의 태도가 유난히 거슬렸다. 그는 마치 무서울 게 없다는 사람처럼 다른 간부들과 단체장의 체면을 너무나 쉽게 짓밟고 무시했다. 아마 노인의 행동이 아니었다면 권리 회수권도 흐지부지하게 끝났을지도 몰랐다.
말 그대로 권력이 양분된 느낌이었다. 다른 간부들은 그래도 단체장의 말과 지시를 수긍했지만, 김윤식 그자만큼은 독자적으로 행동했고, 전투조 인원들을 에덴이 아닌 자신의 손으로 주무르고 있었다.
아마 내 불안감의 원천은 그런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김윤식에게서 나오고 있었을 것이다. 내 질문을 들은 그녀는 순식간에 얼굴을 굳히며 대답했다.
‘……어렴풋이 예상은 하고 있었죠?’
‘대충은요.’
단체장은 김윤식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그 자리에서 해고를 하거나, 전투조를 해산시킬 수가 없다는 뜻이다. 일찍이 대처하기엔 리스크가 컸고, 지금 와서 대처하기엔 전투조의 덩치가 너무나 커 버렸다.
말 그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그리고 그 순간.
‘동윤 씨 일행이 나타난 거죠.’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녀가 대뜸 말을 이었다. 나는 밝게 타오르는 전등을 바라보며 자세를 편하게 바꿨고, 이내 배속에서부터 나오는 한숨을 깊게 훅 내뱉었다. 권력 다툼이니 정치 싸움이니 이런 것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는데, 난 어느새 그곳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제가 칼이 된 겁니까?’
지금 같은 상황에선 직접 현장을 뛰어다니며 만든 실적은 절대 무시하지 못한다. 안전한 울타리 속에 이빨 빠진 호랑이가 아무리 울부짖어도 울타리 밖 늑대보다 못한 것이 현실. 단체장은 그 점을 이용해 우물 속 전투조가 가지고 있던 권리를 야금야금 삼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라는 듯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단체장님은 착한 분이세요.’
믿지 못한다. 아니, 섣부르게 판단하지 않는 것이 맞는 거겠지. 백날 착한 사람이다. 대단한 사람이다. 칭찬해 보아도 내 가슴속에는 와 닿지 않는다. 난 그저 내 일행과 채연이를 위해 단체장에게 휘둘리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대답이 없자, 그녀는 살며시 내 쪽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그냥 서로가 착한 사람인 걸 알아본 거죠.’
착한 사람? 내가?
그나저나 너무 접근한 거 아니야? 어느새 내 옆까지 다가온 그녀를 얼떨결에 쳐다봤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떨어지라고 말하려는 그 순간 이쪽으로 발이 하나 날아왔고, 이내 그녀의 어깨를 걷어차 그대로 바닥에 넘어지게 만든다. 그 발의 주인은 노인이었다.
‘동윤이 임자 있다.’
그녀는 바닥에 형편없이 넘어졌다. 그리고 아까 노인을 존경스럽게 쳐다보던 눈빛은 어디 갔는지, 고양이처럼 표독스럽게 변한 눈으로 노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금한 건 다 물어봤다. 나도 노인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고, 멍하니 우리를 보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 옆에 있던 노인은 마치 양로원을 다녀간 사람처럼 뒷짐을 지며 그대로 밖으로 나가 버렸고, 나도 그 뒤를 따라가려 했다.
그러자 그녀가 안절부절못하는 게 여기까지 느껴져 왔다. ‘겨우 이거 물어보려고 온 거야? 아니지?’ 하는 그녀의 속마음이 들리는듯했다. 하지만 노인은 어느새 현관문을 넘었고 다시 돌아올 기색은 아니었다. 짓궂긴……. 난 한숨을 푹 내쉬며 그녀를 돌아봤다.
‘내일 아침 일찍 우리 집 앞으로 오세요.’
‘네?’
‘차 잘 마시고 가요.’
넋 놓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에게 통보하듯 말하고는 그대로 노인의 뒤를 따라 현관 밖으로 나와 버렸다. 현관문을 닫자 노인이 근처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난 그 옆으로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별도 달도 없는데 뭘 그렇게 보세요?’
노인은 마치 담배를 피우듯 입김을 훅 내뱉고 대답했다.
‘밤하늘.’
그래요? 난 짧게 대답하고 살며시 마른세수를 해 보았다. 너무나 바쁜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꼭 한 달 같은 시간이었는데 겨우 이틀에 불과했다니, 바쁘게 달려온 순간이 기억 속에 휙 휙 하고 지나쳐 버린다.
그렇게 우리가 숙소로 향하려는 그 순간, 그녀의 집 현관 너머로 갑자기 큰 소음이 들려왔다. 그 소음은 사람의 목소리였고, 분명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야호!
우리 둘은 숨죽여 웃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난 그날 밤 누가 업어가도 모를 만큼 깊은 잠에 빠졌다. 그리고 명목상 휴가라는 이름을 이용해 늦잠을 자려고 했지만, 채연이의 과격한 기상 알람 때문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난 내 배 위에 올라가 히히 웃고 있는 채연이를 끌어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른 시각이었지만 아이, 어른 할 거 없이 모두 잠에서 깨어나 이부자리를 개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내가 제일 늦게 일어난 걸까? 난 이상하게 부끄러움이 느껴져 뒤통수를 살며시 긁었고, 내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는 채연이를 바닥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 순간 저곳에서 식사를 준비하던 강수련이 잠에서 깨어난 나를 발견하곤 깜짝 놀라며 채연이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는 이곳으로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이내 내 다리에 찰싹 붙어 있는 채연이를 바라보며 투정 같은 잔소리를 시작했다.
‘채연아! 동윤 씨 깨우지 말랬잖아!’
채연이가 우는 소리를 내며 내 다리에 얼굴을 묻는다. 난 그것이 우는 척하는 것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고, 강수련도 이젠 익숙한지 얼굴에 웃음을 머금는다. 난 따뜻한 채연이의 머리를 만지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강수련을 마주 봤다.
그러자 강수련이 해맑게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식사하세요.’
코끝을 스치는 맛있는 냄새, 그리고 아이들이 떠드는 시끌벅적한 소리는 그간의 비정상을 모두 일상으로 돌려놓는 안정제가 되어 주었다. 난 채연이를 끌어안고, 앞치마를 입고 있는 강수련을 향해 다가갔다.
내가 도착하자 일행들은 하나둘 식탁으로 모여 식사를 시작했다.
우리 일행들의 식사는 언제나 그렇듯 시끌벅적했다. 아마 힘든 하루를 시작하는 원동력이 이곳에서 나오는 건 아닐까? 여자들이 아이들은 하나하나 챙기자 소외당하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었고, 그 모습이 꼭 대가족 같아 내 입에선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어제 죽은 듯이 잠이 들었던 용팔이와 두식이는 미친 듯이 밥을 퍼먹고 있었고, 노인 또한 안색이 많이 좋아져 있었다. 난 넋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빠르게 없어지는 반찬에 기겁하며 식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밥공기를 반쯤 비워갈 때쯤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리며 내 이름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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