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96화 (96/313)

[96]

사용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서 제대로 작동할지가 의문이었다. 하지만 전원을 켜니 걱정과는 다르게 단번에 불이 들어왔다. 난 이미 설정되어 있는 채널을 통해 조용히 입을 열어 통신을 시도했다. 그러자 상대 쪽으로 빠르게 무전이 날아왔다.

[……동윤 씨? 동윤 씨 맞습니까?]

익숙한 목소리였다. 아쉽게도 단체장은 아니었지만, 단체장이 수족처럼 부리던 은테 안경의 목소리였다. 그는 낙오되었던 내 소식을 들었는지, 믿을 수 없다는 기색과 함께 유난히 기뻐하는 말투로 나를 반겼다. 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정문인데, 문을 열어 주지 않습니다. 생존자도 다수 있어요.’

한동안 답변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난 이 침묵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에, 잡음이 들려오는 무전기를 들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노인과 용팔이 형제는 이 상황이 금방 끝날 것을 눈치챈 건지 정문 앞에 모여 있는 무리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그리고 무전기에선 싸늘하게 변한 은테 안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그 통신을 끝으로 무전기를 꺼 버렸고, 다시 가방에 넣었다. 노인과 용팔이 형제는 가방에 있던 식량들을 조금씩 분배해서 생존자 무리들에게 나눠주고 있었고, 강 형사는 그 일을 돕고 있었다.

처음에는 쭈뼛쭈뼛하던 무리들도 노인의 익살스러움과 용팔이의 상냥함이 보이자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기 시작했다. 난 그 광경을 배경 삼아 살펴보다가 이내 경비탑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10분 정도가 지났나? 경비탑 위에서 들리던 소리는 웅성거리는 것으로 바뀌더니 이내 경비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아까 폐문을 지시한 남자는 지나치게 창백해진 얼굴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경비탑을 올라온 사람이 있었다.

‘문 여세요.’

단체장이 직접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난 살짝 놀라면서도 그의 결단력에 작은 찬사를 보냈다. 그는 깔끔한 정장을 입은 채로 은테 안경과 동행하고 있었다. 은테 안경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고, 이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죄의 인사를 했다.

‘하, 하지만……. 조장님이…….’

재수 없게 나를 쳐다보던 남자의 모습은 어디 가고 안쓰럽게 떨고 있는 머저리 한 명만이 남았다. 하지만 그는 단체장의 명령에도 문을 열지 않고 망설이고 있었다. 단체장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고, 탄식이 묻어나오는 숨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그리고 단체장은 결국 얼굴을 붉히며 크게 고함을 내질렀다.

‘부끄러운 줄 아세요!’

그 고함 뒤로 웅성거림은 더 커지기 시작했고, 이내 경비탑 근처로 많은 사람들이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들과 같이 무장한 인원이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단체장이 있던 건물을 지키고 있던 다른 경비들이었다.

그들은 한순간에 몰려와 기존 경비들을 무시하고, 문을 열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체장은 매섭게 기존 경비들을 노려보고 이내 경비탑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문은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고, 문 앞에 있던 생존자 무리들은 갑작스레 변한 분위기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난 들고 있던 가방을 다시 메고, 바닥에 내려놓았던 총을 들었다. 난 꼭 이곳을 출발할 때와 똑같은 얼굴로 정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와 동시에 내 옆으로는 노인과 용팔이 형제가 따라붙었다. 우리가 생존자 무리를 가로지르자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양쪽으로 갈라졌고, 한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 형사는 눈치껏 나를 따라와 내 옆에 위치한다.

생존자 무리에서 보내는 간절한 시선이 느껴진다. 차마 자기 발로는 이곳을 넘어갈 용기가 없는지, 그들은 그저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난 정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아까 내 바지를 잡던 아이를 쳐다봤다.

아이는 손가락을 입에 넣고, 엄마의 손을 잡고 있었다. 난 그 아이를 향해 몸을 돌렸고, 이내 한참 동안 아이의 텅 비어 있는 눈을 마주 봤다. 희망이 없는 눈, 그리고 또 버려질 거라는 절망이 어린 얼굴.

하지만 난 굳어 있는 얼굴을 풀고 자연스럽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가오라는 듯 정문을 향해 조용히 손짓했다. 그러자 생존자들의 얼굴이 밝아지기 시작했고, 이내 내 근처로 조용히 모여들기 시작했다.

난 내 앞으로 쭈뼛쭈뼛 다가오는 아이의 머리 위로 조용히 손을 올렸다. 그것은 조용한 기폭제였고, 모두가 살 수 있다는 인간성의 잔재였다.

* * *

모든 생존자가 에덴 안으로 들어오자 정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리고 소식을 듣고 온 의사들이 바쁘게 이곳으로 뛰어왔고, 서류를 든 사람들도 하나둘 이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난 주위를 살피며 단체장을 찾아봤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은테 안경이 기다렸다는 듯 나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는 평소 표정이 없다시피 했다. 그렇기에 지금 같은 행위는 진정성을 느끼게 해 주기에 충분했다. 난 진심으로 안도하고 있는 은테 안경의 손을 꾹 잡으며, 위아래로 힘차게 흔들었다. 은테 안경 또한 나를 마주 보며 기쁘게 웃었다.

난 손을 천천히 놓고 물었다.

‘단체장님은 가셨습니까?’

단체장이 이곳으로 오지 않아 섭섭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문을 열기 위해 이곳까지 직접 찾아온 단체장이 얼굴 한번 내보이지 않고 갑자기 사라졌다는 게 그저 궁금할 뿐이었다. 은테 안경을 조용히 안경을 올리며 말했다.

‘화가 많이 나셨습니다.’

그리고 은테 안경은 조심히 에덴 안쪽을 바라봤다. 더는 말하진 않았지만 난 침묵 속에 함축된 뜻을 읽을 수 있었다. 오늘 밤 회의실이 매우 시끄러울 것이라 예상이 되었고, 난 되도록 참가하기 싫다는 생각을 잠시 해 보았다.

은테 안경은 씁쓸하게 웃고, 나에게 일단 쉬라며 살며시 자리를 피했다. 난 그에게 작별인사를 건네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일행들은 어디 간 걸까? 난 복잡한 정문 근처를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어느새 사라진 일행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전 탐색조 텐트가 있던 공터에서 노인과 용팔이 형제, 그리고 강 형사까지 모두가 모여서 앉아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이미 통성명이라도 한 걸까? 강 형사는 노인 옆에서 고개를 꾸벅 숙였고, 용팔이 형제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바빴다.

난 살며시 일행들에게 다가갔다. 아니 다가가려고 했다. 왜냐하면, 저 뒤에서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내 발걸음을 막았기 때문이다. 난 고개를 돌려 나를 부르는 그의 얼굴을 천천히 마주 봤다.

‘동윤 씨! 상처 좀 봅시다.’

김 철, 그는 정말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이미 다른 무리들의 건강을 체크했는지 그의 얼굴은 땀으로 가득했고, 눈으로도 보이는 다급함은 환자를 생각하는 상냥함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매번 그렇듯 놓치지 않고 나를 챙기려 했다.

내 몸 상태는 좋지 않다. 워낙 다급한 상황이었기에 자잘한 상처는 소독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난 군소리 없이 그에게 다가가 고통이 전해져 오는 상처 부위를 보여 주었다. 김 철은 내 상처 부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병원으로 가시죠.’

‘여기서는 못합니까?’

난 채연이를 빨리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 별다른 생각 없이 반문했다. 하지만 김 철은 그답지 않게 표정을 굳히며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입맛을 다시자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노인이 내 어깨를 꾹 잡으며 김 철에게 물었다.

‘심각합니까?’

김 철이 고개를 흔든다.

‘심각한 중상은 아닙니다. 다만 손길이 좀 필요한 상처가 많아요.’

노인이 내 뒤통수를 ‘탁’ 치며 나를 나무랐다. 여전히 내 상처에 큰 관심을 가지는 노인이었고, 반항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내 등을 밀었다. 내 근처로 온 용팔이 형제와 얼떨결에 따라온 강 형사까지, 우리는 모두 병원으로 향해야 했다.

* * *

‘그게 통했습니까?’

난 병실 침대 위에 엎드려 등에 길게 생긴 상처를 꿰매고 있었다. 그리고 나보다 하루 일찍 도착한 노인과 용팔이 형제에게 궁금한 점을 물어봤고, 이내 가장 중요한 채연이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진실의 경위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결과적으로 채연이는 내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아니, 지금 이곳에 있는 일행을 포함해 내가 실종되었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강수련이 유일하다고 한다. 말 그대로 이틀 동안 나머지 일행들을 속인 것이다.

물론 좋은 방법이다. 일행의 주축을 이루고 있던 인원이 모두 부랑자 전담팀으로 빠진 상태에서 만약 우리가 전부 사라졌다면, 그 여파는 고스란히 다른 일행들에게로 향한다. 그리고 그 상황을 막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강수련이었다.

강수련은 부상을 당해 돌아온 일행들과 돌아오지 못한 내 소식을 듣고 한참을 오열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가 절대 죽지 않았을 거란 노인의 믿음에 반응한 그녀는 채연이를 위한 착한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채연이는 내가 지금까지 일 때문에 출장을 간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이는 순진했기에 그 거짓말을 믿었다. 하지만 아이도 눈치가 있는지라 밤늦게까지 오지 않는 나를 찾으려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고, 이내 이성을 찾은 강수련에게 잡혀 밤새 숨죽여 울었다고 한다.

난 엉엉 울고 있을 채연이가 안쓰러우면서도, 그런 판단을 한 그녀에게 아낌없이 찬사를 보냈다.

사실 에덴까지 오면서 제일 걱정 되었던 게 채연이의 정신 상태였다. 부모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이 종말을 거쳐 온 아이다. 한동안 실어증에 시달리던 아이, 그런데 내가 실종되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는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두꺼운 옷과 피부를 가리는 옷을 입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 앞에서 절대 상처 부위를 보여 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채연이를 만나 온종일 놀아 줄 생각이었다.

난 그 순간을 위해 등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꾹 참으며 이불보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목이 말라 노인에게 물 한잔을 청하려는 순간 조용하던 복도에는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병실 문이 쾅 하고 큰소리를 내며 열렸다.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문으로 향했고, 그곳에는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는 강수련이 있었다.

그녀의 눈은 울음으로 인해 퉁퉁 부어 있었고, 눈가는 아직도 붉었다. 그리고 이틀 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창백한 얼굴과 찢어진 입술은 그녀를 더욱 처량하게 보이게 했다. 그녀는 결국 눈물을 터트리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엎드려 치료를 받는 상태라 그녀가 왔음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최대한 들어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손을 그녀에게 흔들고 앞으로 쭉 내밀었다. 내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침대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와 마주한 나는 한참 동안 눈을 마주쳤다. 사실, 뭐라 말해야 할지 적절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고마움, 그리움, 안쓰러움. 모든 감정들이 뒤섞여 미묘한 감정을 드러냈고, 그저 얼굴만을 바라보게 했었다.

그녀도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뻗은 손을 잡은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고, 이내 다시 오열을 시작했다. 혼자서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선한 거짓말을 해야 했고, 혼자서 모든 걸 이겨내야 했을 강수련이 안쓰러웠다.

그녀는 내 손등에 얼굴을 박고 한참을 울다가, 이내 손을 뻗어 내 목을 끌어안았다. 난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고, 내 볼에 느껴지는 온기와 축축한 눈물을 느끼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만큼 모든 걸 느끼게 해 주는 행동은 없었다.

옆에선 노인이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혀를 차며 마치 이곳에 있을 눈치가 아니라는 듯 용팔이 형제에게 나가자고 외쳤다.

‘용팔아! 두식아! 나가자.’

원래 강수련이었다면 얼굴을 붉히고 빠르게 손을 치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내 목에 얼굴을 묻으며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난 이 상황이 괜히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그리고 고개는 움직이지 않고 눈동자만을 굴려 병실 문을 바라봤다.

노인은 혀를 쯔쯔 차며 나가고 있었고, 용팔이 형제와 강 형사는 얼떨결에 노인을 따라 나갔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내 등을 치료하고 있는 김 철은 마치 배경화면처럼 그 자리를 지키며 내 등을 치료하고 있었다.

노인이 헛기침을 하며 안 나가냐는 듯 물었다.

‘거……. 의사 양반?’

김 철은 솜을 꺼내 들며 무심하게 툭 내뱉었다.

‘없다고 생각하십쇼.’

웃음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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