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눈을 뜨자 커튼 사이로 여명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잠이 든 걸까? 난 어느새 꺼져 버린 촛불을 바라보며, 덮고 있던 이불로 내 몸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입김을 내뱉으며, 고통의 비명을 지르는 근육을 손으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몸 상태가 최악이다. 이틀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한 여파가 지금 몰려오고 있었다. 난 한쪽에서 끙끙 앓고 있는 강 형사를 흔들어 깨우고, 정신을 차리게 했다. 강 형사도 힘든 건 마찬가지인지 얼굴이 많이 창백해져 있었다.
따뜻한 음식이 너무나 간절했다. 아니, 하다 못 해서 물 한 모금이라도 마시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난 메마른 입술을 핥으며 피곤한 눈을 잠시 감아보았다. 에덴과의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다. 해가 완전히 뜨면 서둘러 출발해야 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밝아진 방 내부를 다시 한 번 둘러보기 시작했다. 먹을 것과 마실 물이 없다는 건 어젯밤 확인했지만, 그 외에 필요한 것이 있었다. 난 부엌으로 들어가 싱크대 아래에 있는 서랍을 열어보았고, 이내 내가 찾던 물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참 여러 번 도움을 받는 식칼이다. 부엌 서랍에서 발견한 식칼은 이미 오래 사용했는지 날이 많이 상해 있었다. 하지만 편의점에서 만든 창을 거리에 버리고 왔기에 이런 날 빠진 식칼조차 나에겐 감지덕지했다. 난 구석에 나뒹구는 신문지를 들고 조심히 식칼을 감쌌다.
나는 식칼을 챙기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강 형사가 정신을 차리고 우리가 덮고 있던 이불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었다. 정리한 이불은 한쪽에 곱게 올려두고, 어디서 챙겨 왔는지 모를 마른걸레로 우리가 잠이 들었던 자리를 꼼꼼하게 쓸어내었다.
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꼭 이곳에 살던 가족이 다시 돌아올 것을 고려한 듯한 배려였다. 그럴 가능성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이상하게 강 형사를 따라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을 가리고 있던 더러운 천들을 다 치우고, 바닥에 말라붙은 촛농들을 다 긁어냈다.
그리고 일기장을 한 장 뜯어 그곳에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고, 이곳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리고 사죄의 내용을 담아 작은 편지를 써 내려갔다. 이상하게 불안하던 마음도 편지를 써 내려가기 시작하자 진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편지를 거실에 있는 가족사진 앞에 올려두고, 나는 떠날 채비를 했다. 가족은 돌아올 것이고, 우리도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 * *
수줍게 고개를 내민 여명은 밝은 해를 완전히 끌어올렸다. 무섭게 내리던 눈은 밤사이 그쳐 있었고. 세상은 설국으로 변해 있었다. 우리는 무릎까지 오는 눈을 푹푹 밟으며 빌라 건물을 완전히 벗어났다.
이 속도로 걷는다면 에덴까지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난 에덴 정문으로 향하는 길을 빨간 펜으로 표시하고. 불어오는 칼바람에 몸을 움츠렸다. 우리는 골목을 벗어나 이곳으로 걸어갔던 대로를 다시 한 번 걷기 시작했다.
그 녀석이 총을 맞았던 육교는 일부러 피해갔다. 혹시 위험할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그 녀석에 대한 두려움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난 사방을 둘러보며 혹시나 그 녀석이 있지는 않을까 주의하며 걸음을 옮겼다.
눈이 많이 왔다. 중간중간 보이는 그놈들도 눈에 파묻혀 있었고. 발을 빼내지 못해 버둥거리는 멍청한 놈들도 있었다. 하지만 괜히 자극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빙 둘러 그놈들을 피해갔다. 발에 걸리는 눈 때문에 체력소모가 심하다. 난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입김을 훅 뱉었다.
그렇게 한 30분 정도를 걸었을 때, 내 뒤를 얌전히 따라오던 강 형사가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익숙한 길이라 지도를 볼 필요도 없었다. 난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며 정면을 바라봤다.
그러자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강 형사가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에덴은 좋은 곳입니까?’
‘그냥 사람 사는 곳입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다. 시기와 질투, 그리고 텃세가 있으면서도 아이들이 웃는 희망과 포근한 이불 같은 일상이 있었다. 물론 실망할 때도 있다. 하지만 채연이의 웃음을 볼 때면 지키고 싶을 때가 더 많았다.
적어도 에덴은 나에게 낙원은 아니었다. 하지만 둥지였으면 하는 우리의 보금자리다. 강 형사는 애매한 나의 대답을 음미하듯 한참을 말이 없더니, 이내 우물쭈물하며 또다시 말을 걸어왔다. 그는 무언가 걱정이 많아 보였다.
‘동윤 씨 일행도 다 무사하겠죠?’
난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들이 내가 숨겨 준 은신처에서 무사히 빠져나간 것도 확인했고, 용팔이에게 줬던 무전기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일행들을 믿었다. 분명 무사히 에덴까지 도착했을 것이다.
그나저나 갑자기 이런 걸 물어보는 이유가 뭘까?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왜요, 불안하십니까?’
‘……그냥 걱정입니다.’
강 형사는 씁쓸하게 대답하며 길게 입김을 내뱉었다. 그의 얼굴에는 이제 에덴 앞까지 왔다는 안도감과 새로운 곳에서 정착해야 한다는 불안감이 섞여 있었다. 그 지옥 같은 곳을 탈출한 사람이 이런 일로 불안해한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잘하실 겁니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여기까지 따라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비록 답답한 면모를 보이기는 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위기 상황에선 제 역할을 해 줬던 강 형사는 에덴은 물론 망해 버린 이 세상에서도 금방 적응하게 될 것이다.
내 건조한 응원에 강 형사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무언가를 더 말하고 싶은지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지만 이내 입을 꾹 다물고 다시 앞을 바라보며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한동안 아무런 위험 없이 길을 걸었고 이내 에덴의 정문을 발견했다.
도착이다.
* * *
‘원래 저렇게 북적북적합니까?’
‘보통은 아니죠.’
에덴 정문이 가까워질수록 웅성거리는 소음이 크게 들려왔다. 소리를 낸다는 건 곧 죽는 것과 같다는 법칙 앞에 에덴은 항상 침묵을 고수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무엇일까? 에덴의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앞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무리 앞에 있는 한 남자가 경비 탑을 향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었고, 경비들도 그 무리를 향해 총을 겨누는 게 서로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에덴 앞에 있는 무리들이 무기를 든 것도 아닌지라 일단 나는 가깝게 접근했다.
정말 제멋대로 소리를 지른다. 총소리 급은 아니어도 이 정도 고함이면, 주변에 있는 그놈들 정도는 몰려올 수 있었다. 분명 죽고 싶어서 안달 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소리를 지르는 남성은 신경도 쓰지 않겠다는 듯 입으로 생사투를 벌였다.
‘시발! 왜 안 되는 건데!’
하지만 경비탑에서 총을 겨누는 경비들은 대답하지 않고, 그를 노려만 볼뿐이었다. 잘 살펴보니 이 무리들 조합이 참 이상하다. 꼭 여러 가족들이 모여 있듯 성비도 균형적이고, 심지어 노인과 아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다들 얼굴이 창백했으며, 오래 굶주렸는지 빼빼 말라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저 앞에서 소리를 지르는 남자도 큰 목청과는 다르게 다리가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아마 체력이 한계까지 도달한 모양이었다.
생존자 무리인 거 같은데 에덴이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 아무리 부랑자 무리가 섞여 들어온다고 해도 여기서 위험하게 내버려 둘 성향의 단체는 아니다. 난 일단 천천히 그곳으로 접근했고, 이내 무리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누, 누구세요…….’
그들은 시야에 들어온 나를 경계하며, 자동적으로 몸을 떨기 시작했다. 다른 생존자 무리를 경계하는 모습, 익숙하다. 남자들은 각자가 들고 있는 무기를 꺼내 들었고, 여자들은 아이들을 뒤로 숨겼다. 난 일단 양손을 위로 올려 공격을 의사가 없다는 걸 보여 줬다.
‘진정하세요! 이곳 쉘터 소속입니다.’
그러자 남자들은 움찔거리며 서로의 눈치를 살폈고, 여자와 아이들은 여전히 몸을 숨기며 나를 경계했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난 어쩔 수 없이 그들 옆으로 살며시 지나가며 총을 겨누고 있는 경비 앞으로 다가갔다.
‘부랑자 전담팀입니다. 문 열어 주세요!’
내 외침을 들은 경비는 총구를 미세하게 떨었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하더니 이내 주머니에 있던 무전기를 꺼내 들어 뭐라 뭐라 시끄럽게 무전을 시작했다. 하지만 상대측에서 답변을 받은 경비는 나에게 다시 총구를 겨누며 말했다.
‘그 팀은 하루 전에 복귀했다! 개수작 부리지 마!’
개수작? 내 미간이 찡그려지고, 표정이 험악하게 변한다. 그 죽을 위기를 넘기며 여기까지 왔는데……. 정작 문 앞에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한다니, 서러움과 동시에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난 이를 꽉 씹으며 마지막으로 대답했다.
‘부랑자 전담팀, 곽 동윤! 무전 쳐 보던가!’
꺄아아아아악!!!!
하지만 경비의 답변을 듣기도전에 무리에서 내지르는 비명이 내 고막을 강타했다. 나도 놀랐고, 나를 겨누고 있던 경비도 깜짝 놀라 총구를 내렸다. 강 형사는 다급하게 내 쪽으로 다가왔고, 이내 도망가자는 듯 옷을 잡아당기며 크게 외쳤다.
‘와요! 그 새끼들이 온다고!’
난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고, 이내 저 멀리서 이곳으로 몰려오는 그놈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10마리? 15마리? 고함을 듣고 온 건가? 다행히 많은 숫자는 아니었고, 제대로 된 무기만 있다면 금방 처리 가능한 숫자였다.
하지만 무기로 쓸 장비와 체력이 없는 지금은 불가능했다. 여기에 있다간 다 떼죽음을 당하는 것이다. 난 다급하게 경비를 올려다보며 정문을 양손으로 쿵쿵 내려쳤다.
‘다 죽일 생각이야?! 문 열어!!’
그놈들이 몰려오자 경비도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당장은 결정하지 못하겠는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며 눈동자를 떨었다. 이 급한 순간에도 고민을 하는 경비를 보며 난 답답해 죽을 것만 같았다. 다 죽는다. 이러다 다 죽는다고!
그놈들이 지척이다. 내가 계속해서 욕설을 내뱉으며 문을 열라고 말하자, 결국 경비는 명령보단 인간성을 선택했다.
그는 눈을 꾹 감고 뒤를 돌아보며 문을 열라는 제스처를 취했고, 그 제스처를 보는 순간 난 온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입에선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 순간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 남자가 경비의 손을 잡으며 명령을 멈추게 했고, 이내 나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조장님이 절대 열지 말라고 하셨다. 여기서 철수해.’
난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내뱉었다.
‘야, 이 개새끼야!!!!!!!!!!!!!’
경비탑에 있는 모든 인원이 하나같이 우리를 외면하는 순간, 난 머리에서 무언가 뚝 끊기는 걸 느꼈고, 저놈들에게 총이라도 갈겨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내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강 형사가 재빠르게 다가와 내 몸을 이끌었다.
‘일단 도망가요! 빨리!’
도망? 그래, 도망치면 살 수 있다. 근데 문 앞에 모여 있는 저들은 살 수 있을까? 저 빈약한 무기와 쓰러져 가는 인원으로? 이 문만 열리면 살 수 있는데?
그동안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죽어간 그들은 내가 구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끊임없이 위안했었다. 하지만 지구대를 떠날 때 나에게 고개를 숙이던 그 사람들의 모습이 꿈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제 더는 괜찮은 척하기 싫었다. 나 스스로가 살아서 다행이라고, 내 마음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 괴롭다. 싫다. 이젠 사람이 죽는 걸 보기 싫었다. 내가 이런 멍청한 사람이란 걸 차라리 인정하고 싶었다.
저들은 문만 열리면 살 수 있다.
난 본능적으로 품속에서 식칼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다급하게 신문지를 빼내고, 강 형사를 밀쳐내며 다급하게 외쳤다.
‘문 안 열리면 다들 데리고 도망갈 준비해요!’
강 형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그는 위험한 순간에도 내 지시를 망설임 없이 들어 줬다.
그놈들이 손을 벌리고, 이쪽을 향해 미친 듯이 뛰어온다.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다. 나는 본능적으로 발을 박차며 무리들 앞을 가로막았고, 이내 식칼을 꾹 잡아서 앞으로 들었다. 한 마리? 두 마리? 얼마나 상대할 수 있을까?
그놈들이 내보이는 이빨이 날카롭게 빛나고, 회색 눈동자는 내 몸을 움츠리게 만든다. 난 고함을 내지르며, 그 공포를 떨쳐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나에게 달려오는 그놈을 향해 식칼을 정조준하고 충돌을 대비했다.
‘동윤아!’
하지만 난 그 녀석과 충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를 부르는 목소리와 동시에 그놈 대가리로 볼트 하나가 날아왔기 때문이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 시작한다.
날아온 볼트는 그놈의 머리를 깨부쉈고, 이내 뒤따라오는 그놈들이 하나둘 바닥에 꼬꾸라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발견한 나는 온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끼며,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모든 긴장과 공포가 내 몸에서 빠져나간다.
힘없이 고개를 돌리자 경비 탑에는 붕대를 칭칭 감은 노인이 크로스 보우를 들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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