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그 자리를 벗어나 10분을 넘게 걸어왔다. 나를 쫓아오는 절뚝거림은 더는 들려오지 않았고, 강 형사의 발소리 또 한 들리지 않았다. 나는 강 형사가 따라오지 않는다고 섭섭하거나 화나지 않았다. 그냥 본 목적인 에덴을 향해 하염없이 걸어갈 뿐이었다.
칼바람이 내 발소리를 머금고 주위를 감돈다. 그리고 그 바람 사이로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익숙한 소리가 뒤에서 들려온다는 걸 눈치챈 나는 곁눈질 치며 뒤를 돌아봤고, 이내 나를 열심히 쫓아오는 강 형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혼란스러워하던 강 형사는 결국 엄 순경을 두고 오기로 한 모양이었다. 난 그의 선택을 존중하면서도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를 동정했다. 난 일부러 걸음을 늦추며 내 뒤를 따라오는 강 형사를 기다렸다.
강 형사는 뛰다시피 걸어와 나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리고 거친 숨을 내뱉으며 별다른 말 없이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우리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난 지도가 이끄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고 강 형사는 나를 따라올 뿐이었다.
그리고 큰길을 벗어나 작은 골목으로 진입할 때쯤 강 형사가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나에게 물었다.
‘엄 순경은 나쁜 사람입니까?’
난 엄 순경이 미웠다. 하지만 강 형사의 물음에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엄 순경은 약하고 겁쟁이였다. 그는 예고 없이 다가온 종말에 적응하지 못했으며, 한순간 찾아온 두려움에도 저항하지 않았다. 풀을 뜯어 먹어야 하는 순한 양이 서로를 잡아먹어야 하는 사막 한가운데 떨어지고 만 것이다.
그에게는 남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죄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를 악인으로 만들어야 하는 원죄라면, 과연 이곳에서 악인이 아닌 자가 어디 있으며,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다만 우리에겐 반성의 여지, 그리고 재고의 여지가 없었을 뿐이다.
한 번 미끄러지면 다신 올라오지 못하는 낭떠러지. 우린 낭떠러지 앞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다.
나는 강 형사에게 대답하지 않고, 이제부턴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젠 큰길이 아니라 좁은 골목을 걸어야 했다. 좁은 골목은 우리의 시야를 벗어나는 사각지대가 많았고, 한곳에 머무는 그놈들의 분포수도 점점 많아진다.
강 형사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 뒤를 바짝 쫓아왔다.
* * *
‘……이거 원래부터 있던 겁니까?’
강 형사가 나에게 물었다. 난 우리의 앞길을 막고 있는 바리케이드를 만지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었다. 이 골목은 내가 지구대를 향하기 전에도 지나쳐 왔던 골목이다. 하지만 이틀 만에 생긴 이 바리케이드는 분명 그때 보지 못했던 물건이다.
못이 잔뜩 박힌 나무나 서로가 얽힌 굵은 철사들은 바리케이드를 쉽게 치우지 못하도록 전봇대에 고정되어 있었다. 다른 곳으로 뛰어넘으려 해 봐도 날카로운 못과 철 쪼가리들 때문에 함부로 접근하기도 힘들었다.
이 바리케이드는 그놈들을 막으려고 만든 용도가 아니다. 이건 분명 사람을 막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난 그것들을 치우려다가 이내 포기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것을 설치한 생존자들에게 묻고 싶었다. 왜 하필 이곳에 설치했냐?
절대 다가오지 말라고 소리치는 것 같은 바리케이드들을 뒤로하고 우회할 길을 찾기 시작했다. 이것을 설치한 생존자들은 결코 우리에게 우호적이지 않을 것이다. 의도가 어찌 되었든 접촉하거나 대면해선 안 됐다.
난 지도를 들고 볼펜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 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던 강 형사는 결국 손톱을 씹으며 품에서 리볼버를 꺼내 들었다. 금방 도착할 것 같은 에덴이 서서히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우회할 길을 찾았다. 난 우리가 들어온 골목을 다시 빠져나가 다른 골목으로 들어갔다. 중간중간 보이는 그놈들 때문에 선택지는 서서히 줄어들었고, 그만큼 나도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들의 걸음은 서서히 조급해져 갔다.
하.
그리고 입에선 또다시 한숨이 새어 나온다. 30분이 걸려 우회한 길 끝에는 또 다른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딱 봐도 수상해 보이는 장치들은 나름 트랩이라고 만들어둔 더미들로 보인다. 도대체 이것들을 설치한 이유가 뭐지?
꼭 토끼몰이를 당하는 것처럼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난 사방을 둘러보며 빠르게 이곳에서 벗어나자는 신호를 보냈고, 강 형사도 따로 느끼는 바가 있는지 빠르게 동의를 했다. 우리는 걸어온 길을 다시 돌아가며 골목을 벗어나 큰길가로 향했다.
바람은 춥고, 그쳤던 눈은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이동하는데 무리가 올 정도로 내리는 건 아니었지만, 체온을 천천히 앗아가기엔 충분한 정도였다. 난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내고, 근심이 묻어 나오는 숨을 훅 내뱉었다.
그리고 발견한 것은 바리케이드, 또 바리케이드! 난 지겹도록 발견되는 바리케이드를 신경질적으로 걷어차다 발에 상처가 생길 뻔했다. 체력에는 서서히 한계가 오기 시작했고, 시간도 많이 지체되었다.
걸어온 만큼 다시 걸어가야 하는 거리인데 뜻밖에 복병으로 진전이 되지 않는다. 어쩌면 또 밤을 지낼 장소를 찾아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걱정인 것은 바리케이드를 설치한 자들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미지의 상대, 어디에 있는지 짐작조차 하기 힘든 그들은 내 신경을 톡톡 건드리고 있었다.
난 지도에 표시된 길들을 하나하나 확인했고, 결국 전부 X표시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X표시 사이로 가장 위험하다고 판단했던 길이 하나가 남아 있었는데, 그곳은 사각지대도 많았고 골목으로 들어가는 커브가 많은지라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지금 시각은 4시를 갓 넘긴 상태, 5시를 넘기면 슬슬 해가 지고 말 것이다. 나는 시간이 애매하다고 판단했고, 마지막으로 남은 그 길을 확인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몰려오는 불안감은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게 어떻겠냐는 물음을 던진다.
그래, 그곳만 확인하고 가자. 어차피 에덴에는 오늘 내로 도착하지 못한다.
그 길에 바리케이드가 없다면 빠르게 길을 넘어간 후 밤을 보낼 은신처를 찾는다. 그리고 만약 그 길도 지금처럼 막혀 있다면, 그쪽 부근을 돌아다니며 최대한 안전한 은신처를 찾으면 되는 것이다. 나는 강 형사에게 대략적인 설명을 하고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딱딱하게 굳은 눈 위로 새로운 눈이 또 내리기 시작한다. 거듭된 실패 때문인지 다리도 무거웠고, 정신도 산만했다. 난 연신 침을 삼키며 눈 때문에 흐려지는 사방을 연신 살펴보았다. 강 형사도 손바닥에 고인 땀을 열심히 닦으며 나를 따라왔다.
그렇게 지도에 표시된 길 근처까지 도착했을 때 우리 시야에는 통과해야 할 골목 하나가 보였다. 내 옆에서 사방을 경계하던 강 형사가 기쁨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무것도 없어요.’
난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를 괴롭히던 바리케이드는 보이지 않았고, 그저 불어오는 바람과 눈만이 길 위를 을씨년스럽게 스치고 지나간다. 우리는 조금 조급한 걸음으로 그 길을 향해 걸어갔다.
이상하게 모든 신경이 짜릿짜릿하다. 주위에 무언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내 청각과 시각이 지금부턴 무조건 조심해야 한다고 거듭 경종을 울려대기 시작한다. 언제, 어디서 그놈들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사각지대가 계속되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어만 간다.
‘…….’
‘네?’
내가 가만히 걷고만 있는데 갑자기 강 형사가 반문하며 멈춰 선다. 난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 뒤를 돌아봤고, 강 형사는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부르신 거 아닙니까?’
안 불렀는데?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고 대답하려는 찰나 내 고막을 간질이는 소리가 조용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들은 나는 순간 온몸이 쭈뼛 서는 걸 느끼며 빠르게 자세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웅성웅성.
절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다.
난 재빠르게 주위를 둘러봤고, 이내 웅성거림이 우리 옆쪽에 있는 골목에서 돌려온다는 걸 눈치챘다. 한두 명이 아니다. 적어도 여러 사람이 내는 소리였고, 우리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미 뒤로 돌아 도망가긴 늦었고, 앞으로 뛰기엔 모습이 발각되고 만다.
한참을 둘러보던 나는 결국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했고, 근처에 있는 빌라 건물로 재빠르게 뛰어갔다. 눈치를 보던 강 형사도 내가 움직이자마자 황급히 따라왔고, 우리는 간발의 차로 빌라 현관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웅성거림이 더 가까워졌다. 난 혹시나 창문으로 우리들의 모습이 보일까 봐 바닥에 납작 엎드려 계단을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4층으로 되어 있는 빌라 건물이다. 우리는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까지 올라가 몸을 구석에 숨겼다.
거리에선 여러 사람이 떠드는 웅성거림이 더 크게 들려온다. 웬만한 자신감이 아니라면 저렇게 떠들면서 길을 걷지 못한다. 난 침을 꿀꺽 삼키고, 살며시 밖을 내다봤다. 그리고 우리가 지나간 길 위에 많은 인원이 이동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저들이 어떤 무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정말 간발의 차였고, 빠른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면 벌써 발각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난 얼굴만 빼꼼 내밀고 창문을 통해 상황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저들의 숫자는 대략 20명. 복장은 통일되지 않은 평상복이었다.
다만 15명 정도 되는 인원으로 모두 남자였고,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총기류는 보이지 않았지만 살벌한 못이 박혀 있는 나무방망이나 검은색 피가 흥건한 쇠파이프는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5명 정도로 보이는 사람들이 밧줄에 묶여 끌려가고 있었다.
난 메마른 입술을 핥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끌려가는 그들은 옷을 입지 않은 상태였다. 말 그대로 완전한 태초의 상태, 즉 알몸이란 소리다. 옷을 벗은 그들의 몸에는 멍 자국이 가득했고, 어떤 이는 얼굴에 피를 질질 흘리고 있었다.
사람을 잡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구타와 제압의 흔적이 있다는 것. 머릿속에는 알몸으로 끌려가던 가족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고, 그다음으로 생각난 단어는 부랑자였다. 난 그놈들이 우리가 걷던 거리에 들어서자 황급히 창문에서 머리를 떼 버렸다.
이 동네를 빠져나가는 모든 길목에 설치된 바리케이드. 그것을 발견한 나는 왠지 토끼몰이를 당하는 것 같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를 조금씩 자극하던 불안감의 원인은 저들이었고, 그 불안감은 현실이 되어 곧 눈앞에 들이닥쳤다.
바리케이드를 설치한 자들은 저들이다.
몰이를 당하는 대상은 이 동네에 남아 있는 생존자들. 그리고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한 우리도 포함되었다. 저 정도 인원이면 충분히 가능한 방법이었고, 혹 주위에 동료들이 더 있을지도 몰랐다. 모든 생각을 끝마친 나는 저들의 목적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이건 불특정 다수를 노린 생존자 사냥이었다.
일이 더럽게 꼬이고 말았다. 우리는 마땅한 무기도 없었고, 심지어 인원도 두 명뿐이었다. 만약 부랑자들에게 발각이라도 된다면 그 자리에서 죽거나 저들처럼 끌려가는 처지가 되어 버릴 것이다. 난 숨을 죽이고 그들이 빨리 이곳을 벗어나길 빌었다.
하지만 나와 같이 몸을 숨겼다고 생각한 강 형사가 갑자기 탄식을 길게 내뱉었다. 나는 깜짝 놀라며 옆을 바라봤고, 창문 밖을 살피고 있는 강 형사를 재빠르게 잡아 창문에서 떨어지게 했다.
‘……미쳤습니까? 그러다 들킵니다.’
내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자기를 잡아당기자 강 형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짝 놀란다. 하지만 살벌한 내 반응에도 그는 창문을 향해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난 넋을 빼고 있는 그의 옷깃을 잡고 흔들었지만, 그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이봐요.’
저놈들에게 들릴까 봐 큰 소리를 내지 못한다. 난 결국 강 형사의 뺨을 때리며 귀에 강하게 속삭였다. 그러자 넋을 빼고 있던 강 형사는 정신을 차렸고, 이내 무언가 말하려고 하는지 심하게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은 창문 밖을 가리키고 있었다.
‘……무엇을 본 겁니까?’
나는 그의 뜻을 대충 유추하며 빠르게 되물었다. 그러자 강 형사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의 옷깃을 놔 주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게 도와주자, 강 형사는 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강 형사는 곧 나에게 황급히 손짓했다.
그는 분명 창밖을 가리키고 있었다. 난 의심스러운 얼굴로 한참을 그를 살펴보다 이내 손짓을 따라 창밖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길가를 지나가던 부랑자들은 더는 움직이지 않고 대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각자 적당한 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게 아마 작업이 막바지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심에는 달달 떨고 있는 인질들이 처량하게 놓여 있었다.
강 형사가 나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맨 왼쪽에……. 문신한 대머리 보이십니까?’
나는 강 형사가 지시한 방향으로 빠르게 시선을 옮겼다. 내 시선이 멈춘 그곳에는 차 옆에 기대 담배를 물고 있는 대머리 한 명이 있었다. 길고 두꺼운 옷 때문에 완전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손과 뒤통수에 조잡한 문신들 일부가 그려져 있었다.
‘제가 처넣은 놈입니다.’
강 형사가 직접 잡아넣은 범죄자. 그런 놈이 교도소에 있지 않고 길거리를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그 소리를 들은 난 메마른 입술을 핥으며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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