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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살아있다-89화 (89/313)

[89]

우리는 부동산 책상 밑에 조용히 숨어 에너지 바를 뜯어먹었다. 그리고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통해 강 형사가 챙겨온 지도를 확인했고, 우리의 위치를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나는 에덴으로 걸어갈 길을 빨간 펜으로 그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2시간만 걸으면 되겠네요.’

그러자 강 형사가 깜짝 놀라며 에너지 바를 황급하게 삼킨다. 그리고 이쪽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는 한참을 지도를 훑더니 이내 내가 표시한 길을 손가락으로 짚어본다.

‘그렇게 가깝습니까?’

‘눈 때문에 멀리 못 왔으니까요.’

에덴을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눈이 내렸다. 그 때문에 고립되고 말았고, 정말 우연히 구조 신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만약 그날 눈이 오지 않았더라면? 이 지긋지긋한 눈, 어찌 보면 모든 게 눈 때문이었다. 나는 신발에 묻어 있는 눈을 털어내며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강 형사는 이렇게 가까운 곳에 에덴이 있을 줄은 몰랐는지 살짝 멍한 눈으로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멀게만 느껴졌던 천국, 하지만 그는 기뻐하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쓸쓸한 침과 함께 에너지 바를 전부 씹어 삼키며 강 형사를 조용히 불렀다.

‘갑시다.’

내 말을 들은 강 형사는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길을 헤매느라 시간을 상당히 지체했다. 에덴과의 거리가 생각보다 가까웠기에 잘하면 오늘 내로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야 했다.

난 흔들어 둔 핫팩을 주머니에 찔러놓고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어수선한 부동산 벗어나 불어오는 칼바람 사이로 몸을 욱여넣었다. 몸과 머리는 무거웠지만, 곧 도착할 수 있다는 희망에 발걸음만큼은 가벼웠다.

* * *

1시간 정도를 걸었다. 흐릿하던 날씨는 완전히 개었고, 따뜻한 햇볕이 우리에게 내리쬐기 시작했다. 난 하늘을 조용히 올려다보며, 포근하게 내 얼굴을 감싸는 햇빛을 만끽했다. 탁 트인 길이고, 햇빛을 가리는 그늘이 없었기에 우리는 이때만큼은 걸음을 서두르지 않았다.

밝은 해를 보고 있자니 찌꺼기 같은 상념이 머리에 끼었다.

노인과 용팔이 형제는 에덴으로 향했을까? 아니면 아직도 나를 찾고 있는 게 아닐까? 노인과 용팔이의 상처가 자잘한 게 많았다. 아마 내가 옆에 있었더라면 에덴으로 빨리 가라고 소리를 질렀겠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지금 여기 있었다.

아마 서로가 다른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햇빛 아래 있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 햇빛이 일행들이 향하는 길을 환히 밝혀 줬으면 좋겠다는 이상한 생각을 해 본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집중하며 걷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난 몸을 움찔거리며 창을 꾹 잡았고 빠르게 강 형사가 있는 뒤를 돌아봤다.

내 뒤를 잘 따라오던 강 형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내가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강 형사를 부르려고 했지만, 그는 황급하게 제스처를 보내며 나에게 소리를 내지 말라고 신호를 보내왔다. 난 그가 심상치 않은 걸 눈치채고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잘 들어보라는 듯 귀를 기울인다. 나도 그를 따라 하며 가만히 자세를 숙였고, 이내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바람이 부는 소리, 그리고 그 바람 소리에 끼어 언제나 들려왔던 그놈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그리고……. 무언가 절뚝이는 소리.

난 빠르게 달려가 강 형사의 옷을 잡고 내 쪽으로 끌었다. 그리고 사방이 탁 트인 곳을 벗어나 몸을 숨길 곳을 찾기 시작했다. 이 소리를 누가 내었는지는 몰라도 꽤 근접거리에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강 형사를 끌고 와 차 옆에 황급히 숨었다.

강 형사는 일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는 걸 눈치챘는지 품속에서 빠르게 리볼버를 꺼내 들었다. 그가 가진 무기는 그것이 유일했기에 나는 강 형사를 말리지 않았다. 총을 쏘면 어떻게 되는지 그도 잘 알고 있을 테니 적당히 처신할 거라 믿었다.

난 숨을 훅 내뱉고, 조잡한 창을 양손에 꾹 잡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절뚝, 절뚝, 절뚝. 무언가 물에 젖은 걸 옮기는 소리 같기도 했고, 늪지대를 걷는 소리 같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소리는 분명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난 반대쪽 차에 있는 백미러를 통해 살며시 우리 뒤쪽을 확인했다. 그리고 쨍쨍 내리쬐는 햇볕 사이로 무언가 검은 물체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뭐지? 그놈들은 해가 있는 날이면 저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강 형사도 이곳으로 다가오는 형체를 발견했는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침을 꿀꺽 삼키고 눈을 감았다. 일단 일반적인 그놈이 아니라는 가정하에 저것은 사람이거나 다른 변종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혼자 거리를 걷는다? 겁이 없는 걸까, 아니면 애초부터 우리를 노리고 있는 걸까? 난 복잡한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입술을 씹으며 불안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하지만 그 순간 절뚝이는 소리가 멈췄다.

강 형사는 멍하니 나를 바라봤고, 나도 영문을 알 수 없어서 일단 입을 마른 입술을 살며시 핥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아까 확인했던 백미러를 다시 확인했다. 그 백미러에 비추는 그림자는 걸음을 멈췄고, 이내 무언가를 찾듯이 몸체를 휙 휙 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방황은 오래가지 않았고, 그 형체는 우리가 숨어 있는 차를 향해 다시 절뚝절뚝 걸어오기 시작했다.

난 선공을 가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다리를 쭉 펴고 있던 자리에서 살며시 일어나 자세를 숙였고, 창을 앞으로 내밀며 후미등 쪽으로 걸어갔다.

절뚝, 그리고 하나.

절뚝, 그리고 둘.

내 끄덕거림에 맞춰 카운터 다운이 줄어 들어간다. 한쪽에서 리볼버를 들고 있던 강 형사도 내 신호에 맞춰 언제든지 뛰쳐나갈 준비를 마친다. 난 속으로 딱 3을 세었다. 그리고 절뚝거림이 내 앞에서 들렸을 때 난 차 옆으로 뛰쳐나가 창을 빼 들었다.

그리고 내 창은 공격하려는 대상의 목 앞에서 바로 멈추고 말았다.

‘사, 살려 주세요…….’

내 창 앞에서 눈물을 질질 흘리고 있는 그는 엄 순경이었다. 난 너무나 뜻밖의 상황에 등장한 그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은 상처로 가득했고, 나름 깔끔하던 경찰복은 검은색 피로 떡칠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신발 한 짝은 어디에다가 팔아먹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머지 신발 한 짝은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는데, 아까 들려왔던 절뚝거림의 원인이 저 신발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살려달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내가 움직임을 멈추자 강 형사가 황급히 이쪽으로 튀어나왔고, 이내 엄 순경을 발견했다.

‘너…….’

강 형사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깜짝 놀랐는지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리는 그늘이 별로 없는 탁 트인 길가를 걷고 있었다. 그 말은 곧 주변에서 우리를 발견하기 쉬운 상황이었고, 운 좋게 살아남은 엄 순경이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해 이곳까지 따라 걸어온 것이다. 미행했다고 하기엔……. 그의 정신 상태가 결코 좋아 보이진 않았다.

우리를 뒤따라온 것도 어쩌면 살고 싶다는 본능이었을지 모른다.

엄 순경은 내가 천천히 창을 내리자 덜덜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에게 슬금슬금 다가오며 내 가슴팍에 있는 옷을 꾹 잡고 미친놈처럼 외치기 시작했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저도 데려가 주세요!’

난 넋을 빼고, 멍하니 엄 순경을 바라봤다.

그리고 순간 발끝에서부터 심장까지 전해져 온 무언가가 욱하고 솟구쳐 오르는 걸 느꼈다. 이번엔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 소중한 일행들을 살리지 못하고, 결국 나마저 죽어 버리는 줄 알았다. 아직도 등골이 싸늘했고, 채연이가 울고 있는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런데도 난 짊어지려고 마음먹었었다. 그리고 무섭고 두려운 상황에서도 난 쓰러지지 않으려 필사의 노력을 가했다. 내가 만일 죽어도……. 내가 그 자리에서 죽었어도 일행들이 살았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내 행동은 숭고하지도 않고, 찬란하지도 않았다. 나는 단 한 번도 그 행동을 희생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노인도, 용팔이 형제도……. 일행들을 살리기 위해 온몸을 내던지고 골목을 막아섰으니까.

단단한 결속, 난 그저 대단한 사람들 곁에 서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기 위해 한순간 고민한 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 비겁자는 스스로가 구덩이를 파고 그곳에 무고한 사람들을 빠지게 했다. 그런데도 엄 순경은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운이 좋다는 이유로 살아남아 피가 맺히는 속죄 대신 무조건 살고 싶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를 살리고자 일행들을 죽일 뻔했던 내가 너무나 싫었다. 자기 혐오와 더불어 엄 순경을 향한 혐오감이 물밀듯 몰려오기 시작했다. 다들 살고 싶었을 것이다. 거리에서 죽어간 그들도 나만큼, 그리고 이 새끼만큼 살고 싶었을 것이다.

내 손이 풀리고, 조잡한 창이 형편없이 바닥에 쓰러진다. 땡그랑 울리는 소리가 탁 트인 길가에 힘없이 울려 퍼진다. 강 형사와 엄 순경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하고 난 검은 찌꺼기가 묻어나오는 숨을 훅 내뱉었다.

‘아악!’

엄 순경이 새된 비명을 내지르다 내 손에 입이 막힌다. 나는 질질 울고 있는 엄 순경의 멱살을 그대로 잡고 차 보닛에 처박아 버렸다. 내 손은 분노로 인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고, 표정은 악귀처럼 일그러진다.

‘……미안해서 울고 있는 거 아니지? 그냥 무서워서 울고 있는 거지?’

엄 순경은 정곡을 그대로 찔렸는지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당황하며 바라보고 있던 강 형사는 내 손을 황급히 잡아끌며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도, 동윤 씨, 진정하세요…….’

강 형사가 온 힘을 다해 잡고 있음에도 내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내 손을 잡는 강 형사를 뿌리치고 양손으로 엄 순경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 혀에서 피가 맺히는 심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왜 쐈어?’

궁금했다. 그렇게 경고하고 또 경고했는데……. 왜, 도대체 왜 쐈는지가 궁금했다.

그래, 차라리 강 형사를 살리기 위해 쏜 거라고 대답해 주길 원했다. 엄 순경도 사람이고, 사람이니까 실수를 할 수 있다고 자신을 합리화를 할 대답이 너무나 듣고 싶었다.

내가 인간을 더는 혐오하지 않게, 그리고 지독한 불신에 걸리지 않게 차라리 변명이라도 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 나한테 올까 봐…….’

그는 겁쟁이였다. 그렇기에 자신을 보호할 거짓말조차 할 용기가 없었다.

내 주먹이 울고 있는 엄 순경의 얼굴을 강타했다. 손이 짜르르 울리고, 팔 근육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난 거리에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 비명은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던 노인에 대한 미안함이자, 죽겠다고 스스로 나선 용팔이에 대한 걱정이었다.

나에게 턱을 맞은 엄 순경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차 옆으로 넘어졌다. 그리고 꺽 꺽 소리를 내며 턱을 움켜잡았고, 고통에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강 형사는 어쩔 줄 모르며 발을 동동 구르더니 이내 엄 순경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리고 난 바닥에 떨어진 창을 잡으며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따라오지 말라고 전하십쇼. 그리고 도와줄 생각이라면 당신도 따라오지 말아요.’

마음이 쩍쩍 갈라진다. 그리고 그 틈으로 시뻘건 피가 철철 흐르는 것 같았다. 난 피폐해진 마음을 움켜잡고 멍하니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나에게 내리쬐는 햇볕을 바라보며 나와 같은 땅을 걷고 있을 일행들을 생각했다.

마음이 너무 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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