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살아계셨군요…….’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리볼버를 품속에 넣은 강 형사였다. 그는 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는듯하더니 이내 표정을 어둡게 굳혔다. 그리고 창고 안쪽으로 들어오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손을 까닥까닥한다. 난 그의 손짓에 따라 천천히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 안에는 생수와 식량들이 쌓여 있었고, 촛불 몇 개가 그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는 담요와 신문지들이 모여 있었는데, 아마 그 일이 터지고 나서 이곳으로 대피한 모양이었다. 강 형사는 내가 들어오자마자 한쪽에서 가스버너를 꺼내 들었다.
내가 가장 절실했던 따뜻한 불이었다. 그는 내 앞에 버너를 틀어주고 어디서 구한 것인지 모를 냄비를 가져와 가스버너를 이용해 물을 펄펄 끓이기 시작했다. 난 황급히 그 앞에 다가가 손바닥을 내밀고 얼어붙은 발과 손을 녹이기 시작했다.
물이 완전히 뜨거워지자 난 그 물을 조금씩 마시며 얼어붙은 속을 녹이기 시작했다. 입에서는 저절로 곡소리가 나왔고, 아픈 몸과 머리는 서서히 녹아들었다. 그리고 난 껴입고 있던 더러운 옷을 벗고 천천히 한곳에 내려놓았다.
‘……미안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강 형사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난 신발을 벗다가 들려온 사과에 강 형사를 빤히 바라봤다.
미안하다?
모든 게 의미 없었다. 나는 화낼 힘도 없었고, 사과를 받을 이유도 없었다. 그저 일이 틀어졌기에 각자가 각오한 리스크를 끌어안았을 뿐이다. 어떤 이는 죽음으로, 또 어떤 이는 끔찍한 고통으로 그 빚을 갚았고, 우리는 운 좋게 살아남은 것에 불과하다.
물론 엄 순경이 눈앞에 있었다면, 죽통을 열심히 후려 놨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피해자라고 볼 수 있는 강 형사는 그 대상이 아니었다. 그가 엄 순경과 같은 무리에 속해 있단 이유로 탓할 생각은 나에게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거듭 숙였다. 그 모습에 난 쓴 입맛을 다시며 불 앞에 손을 비볐다. 다 죽었을까? 가장 급한 일행들을 챙기고 나니 지구대에서 구출했던 나머지 사람들이 생각났다.
‘마지막으로 본 게 뭡니까?’
나는 강 형사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땅을 파고들 기세로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울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 죽었습니다. 도망가다 죽고, 가만히 떨다가 죽고……. 마치 다진 고기처럼 짓이겨서…….’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미친놈처럼 머리를 쥐어뜯었다. 사람들이 찢겨 죽는 끔찍한 장면이 트라우마가 되었는지 그의 손과 고개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나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이해하면서도 슬픈 감정에 빠질 생각은 없었다.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죽음의 능선을 끝없이 넘자 감정이 마모되고, 슬픔이 누적된다. 죽음은 너무나 익숙했고, 난 이제 감정의 통증조차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를 위로할 대사를 생각해 봤지만, 이내 포기했고 초코바를 두 개째 뜯었다.
그는 한참을 질질 울다가 편의점에서 챙겨 온 거로 보이는 소주병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내가 들고 있던 빈 생수병을 그에게 굴려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작게 경고했다.
‘그거 마시면, 여기서 죽은 거로 생각하고 두고 가겠습니다.’
입에선 고운 말이 나올 수 없었다.
그가 힘든 건 이해했다. 아무리 강인한 형사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사람이다. 평범한 사람은 이런 극적인 상황에서 오는 두려움이나 죄책감에 대한 면역이 없었다. 나도 그래 왔기에 울고 있는 강 형사를 한편으론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켜야 할 마지노선은 분명히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이 힘들거나 무언가를 잊고 싶을 때 술을 찾는다. 그리고 강 형사도 그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강 형사가 망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 종말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오늘은 슬프고 좌절할 수 있다. 하지만 내일은 그래서는 안 됐다. 슬픔은 죽은 사람을 살려 주지 않고, 좌절은 절망의 늪에서 우리를 꺼내 주지 않는다. 어둠과 두려움이 삶으로 변한 세상에서 절망은 미련한 어리광에 불과한 것이다.
술을 마시면 체온이 내려가고, 컨디션을 나쁘게 만든다. 모든 신경과 체력을 주변에 쏟아부어도 모자란 상황에서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음주는 자살행위와 같았다.
난 그와 에덴까지 동행할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내 행보를 방해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면 망설임 없이 동행을 취소할 것이다.
그는 내 경고 속에 망설임이 없다는 걸 눈치챘는지 술병을 잡은 손을 옅게 떨기 시작했고, 이내 눈을 꾹 감으며 술병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그의 입에선 다시 한 번 울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난 그 울음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고 천천히 벽에 몸을 기댔다.
차라리 울게 내버려 두자.
* * *
2시간 정도가 흐르고 정오가 되어 잠에서 깨어났다. 몸은 아직 휴식을 취하라고 비명을 지르지만, 난 그 비명을 애써 무시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도착하지 못하더라도 조금씩 움직여 에덴과 최대한 가까워져야 했다.
강 형사는 끝내 술을 마시지 않았는지 울다 지쳐 잠이 들어 있었다. 난 그를 깨울까 하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고 잠시 창고 밖으로 나왔다. 지도와 장비가 없기에 에덴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최대한 준비를 하고 출발해야 했다.
적당한 가방이 없을까? 한참을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계산대를 뒤지기 시작했고, 이내 허름한 장바구니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들고 다녀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좋았다.
난 기본적으로 가장 중요한 생수를 담았다. 그리고 열량이 높고 부피가 작은 음식을 위주로 챙기기 시작했고, 이제는 신물이 나는 초콜릿과 에너지 바. 그리고 핫팩들도 전부 챙겨 넣었다. 얼마 챙기지도 않았는데 장바구니가 가득 차 버리고 말았다.
‘……에덴으로 가실 생각입니까?’
혹시 쓸 만한 무기가 없을까 하고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창고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눈이 퉁퉁 부어오른 강 형사가 나를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난 아무런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강 형사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지구대를 출발할 때 정했던 목적은 생존자들을 에덴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물론 일이 틀어져 대부분 죽고 말았지만, 본래의 목적은 변경되지 않았다. 그리고 일단 내가 에덴으로 가는 것이 급했기에 동행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슬픔은 잘 극복한 모양인지 표정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난 그가 움직이는 걸 잠시 바라보다 이내 내 할 일을 찾아서 하기 시작했다.
대검을 어디다 흘린 걸까?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난 아쉬움이 묻어나는 마른기침을 몇 번 해 보이고, 창고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청소 도구함을 열고 대걸레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나는 너무나 익숙한 발놀림으로 대걸레 아랫부분을 밟아 부러트린다. 그리고 나무 마대 부분만을 챙겨 들고 다시 창고 밖으로 나갔고 이내 주방용 칼과 전기 테이프를 이용해 조잡한 간이 창을 제작했다.
항상 대검이 착검 된 총을 쓰다가 이런 조잡한 무기를 들게 되니 기분이 미묘했다. 하지만 이런 간이 창이라도 있어야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기에 난 아쉬움을 감추며 들고 있는 장바구니를 왼손에 챙겨 들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나는 강 형사를 부르기 위해 뒤를 돌아봤지만, 그는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내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쓱해진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조심히 손짓했고 우리는 그렇게 편의점을 벗어났다.
* * *
지도가 없으니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대충 기억에 의존해 걸음을 옮기고는 있지만, 너무 정신없이 도망쳐 나온지라 방향감각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우리는 최대한 그놈들과 마주치지 않게 주의하며 걸어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2시간 정도가 흘렀을까? 우리는 그놈들을 피해가느라 이 동네조차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난 깊은 한숨을 훅 내쉬었고, 강 형사 또한 길을 모르기에 나를 탓하지 않았다. 우리는 지친 몸을 이끌고 잠시 골목에 쭈그려 앉아 휴식을 취했다.
한참 동안 찬 공기를 맞으며 핫팩을 흔들고 있는데, 내 옆에 있던 강 형사가 조용히 속삭였다.
‘지도를 찾아보는 건 어떻습니까?’
그 생각을 하지 못한 건 아니다. 하지만 지도가 있을 마땅한 장소가 생각나지 않기에 난 빠르게 대답했다.
‘어디서요?’
그러자 강 형사는 잠시 눈을 감더니 손가락으로 바닥을 톡톡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눈을 번쩍 뜨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 양옆으로 펼쳐져 있는 길들을 가리키며 조용히 속삭였다.
‘공인중개사 건물을 찾아봅시다.’
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서울시 전체 지도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이 동네가 어디에 있고, 구조가 어찌 되는지만 알 수 있는 작은 지도면 충분했다. 그렇다면 동네 지번과 지도를 가지고 있을 곳은 공인중개사 건물이 유일했다.
부동산은 상당히 많다. 거리를 걷다 보면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건물 중 하나가 부동산이었다. 그리고 이곳으로 걸음을 옮기던 기억 속에도 분명 부동산 건물이 다수 존재했다. 난 이 지겨운 동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빠르게 일어났다.
우리는 지나왔던 길을 하나하나 짚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늘 내로 에덴에 도착할 수 있을까? 나머지 일행들은 어떻게 됐을까? 끊임없이 몰려오는 상념이 머리를 맴돌았지만, 난 마라톤을 하는 마음으로 당장 앞에 보이는 목표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이름이 뭡니까?’
그리고 저 근처에 부동산이 보이는데, 순간 강 형사가 나를 불러 세웠다. 난 뜬금없는 통성명 시도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일단 대답은 해 줬다. 하지만 빨리 걷고 있는 걸음은 절대 늦추지 않았다.
‘곽동윤입니다. 당신은요?’
그는 내 뒤를 바짝 따라오며 주위 경계를 잊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그는 꽤 노련한 구석이 있었다. 나이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초중반? 머리가 짧았기에 나이 구분이 힘들었지만, 얼굴에서 묻어나오는 날카로움과 연륜은 노인을 조금 닮아 있었다.
‘그냥 강 형사라고 부르십쇼.’
일기에서 여태 그렇게 불렀다. 물론 그는 모르지만.
우리는 잠시 뒤 부동산 건물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위에 그놈들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주변에는 무언가 지나가거나 머물렀던 흔적들로 어수선했다. 그것도 오래된 흔적이 아닌 최근에 남겨진 흔적이었는데, 그것을 발견한 우리는 자동으로 자세를 낮췄다.
다른 곳으로 갈까? 하지만 인기척이나 다른 소음이 들리지 않는다.
난 차 뒤에서 숨어 부동산 건물을 한참 동안 살펴봤다. 반투명한 유리문은 부서져 있었고, 창문들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그리고 부서진 문틈으로 보이는 부동산 내부는 넘어진 가구들과 흩날린 종이들로 가득했다.
난 조용히 강 형사를 바라보며 턱짓했다. 일단 안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이상 다른 곳을 갈 이유는 없었다. 내 신호를 확인한 강 형사는 리볼버를 빼 들고 빠르게 부동산 앞에 주차된 차로 향했고, 그 뒤에 몸을 숨겼다.
난 그가 몸을 숨기자마자 빠르게 뛰어 그의 옆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에게 엄호해 달라는 소리와 함께 재빠르게 부동산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난 창을 앞으로 내세우고, 혹시나 불시에 가해질 공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예상한 대로 공격도 습격도 없었다. 부동산 건물은 생각보다 작았는데, 왜 이런 어수선한 꼴을 당했는지 이해가 안 될 만큼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난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주변을 경계하는 강 형사에게 손짓했다.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책상 벽 옆에 붙어있는 거대한 지도였다. 지번이 상세하기 적힌 동네 지도를 살펴본 나는 이 부동산 건물이 우리가 출발했던 지구대 건물과 크게 멀지 않는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멍청하게 동네를 뱅뱅 돈 것이다.
그렇다는 건 에덴과도 거리가 크게 멀지 않다는 것인데…….
크고 어지럽게만 느껴졌던 동네는 지도를 발견하는 순간 너무나 작은 안마당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좋다, 이 큰 지도를 가져갈까? 하고 벽을 향해 손을 뻗었는데 강 형사가 어이없다는 말투로 나를 불렀다.
‘그거 가져갈 생각은 아니죠?’
내가 뒤를 돌아보자 강 형사는 어디서 찾았는지 모를 작은 지도를 나에게 내밀고 있었다. 편하게 접는 형식으로 만들어지는 지도를 받은 나는 큰 지도를 뜯으려고 뻗은 손을 그대로 뒤통수로 가져가 긁었다.
좀 민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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