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눈이 떠졌다. 아마 끔찍한 악몽을 꿨던 것 같았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온몸을 버둥거렸고, 아직 남아 있는 악몽의 잔재로 인한 여운을 느꼈다. 하지만 곧 코를 찌르는 락스 냄새와 온몸에 느껴지는 격통 덕분에 이곳이 현실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에 손목시계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머리는 찢어질 듯 아팠고, 썩은 피와 내장이 굳어 버린 옷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난 한참을 초조하게 있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가 들어왔던 문에 귀를 기울여 본다. 당연히 밖과 거리가 먼 이곳에선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문 틈새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소리만이 들려왔다. 기다려 볼까? 아니, 계속 기다린다고 대책이 생기나?
난 내 몸이 더는 버티지 못할 거란 걸 직감했다. 온몸에 힘이 없었고, 상처 부위에선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난 지독한 갈증을 느끼며 침을 여러 번 삼키려 했다. 하지만 메마른 입은 먼지와 침음성만이 흘러나왔다.
노인은 머리에서 피를 흘렸는데 괜찮을까? 두식이가 잘 하고 있을까? 용팔이……. 용팔이가 상처가 많았는데……. 난 손잡이를 잡고 한참을 서 있었다. 하지만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고, 난 천천히 손잡이 문을 돌렸다.
어두운 먹칠 사이로 계단의 윤곽이 보였다. 난 어두운 계단을 조심히 오르며 혹여나 들려올지 모르는 그놈들의 소리에 집중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만약 문을 열었는데 그놈들이 나를 마주 보고 있다면, 난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이 밀실에 죽치고 앉아 있을 생각은 없었다. 겁이 난다고, 죽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을 가두던 곽동윤은 이미 고시원에서 죽었다. 난 마지막으로 남은 문 앞에서 천천히 숨을 내쉬었고, 이내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소리가 들리지 않게 주의하며 살며시 문을 열었다.
문 사이로 신선한 공기가 훅 들어왔다. 난 그 바람을 맞으며 침을 꿀꺽 삼켰고, 이내 몸을 완전히 낮췄다. 그리고 문틈으로 밖을 살펴봤다. 현관 밖은 살짝 어두웠는데, 그것이 해가 지고 있는 건지 아니면 뜨고 있는 건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난 불안함을 느끼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리고 문틈으로 들어오는 빛을 이용해 황급히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내가 시간을 역행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시계 침이 가리키는 시간은 이미 하루가 지난 다음 날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난 인상을 찡그리고 한참을 고민해 봤지만, 몰려오는 두통 때문에 이내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래도 시간이 많이 흐른 탓인지 주위에 그놈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빌라 현관에는 썩은 피로 찍힌 발자국이 가득했는데, 아마 그놈들이 나를 찾아 이곳을 미친 듯이 돌아다닌 모양이었다. 난 순간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살며시 피부를 비볐다.
현관이나 건물 안에 그놈들이 없다는 걸 확인한 나는 조용히 문을 밀었다. 그리고 포복 자세로 열심히 기어 현관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검은색 파도가 넘실거리던 거리는 마치 아지랑이처럼 사라지고 고요한 회색 도시로 변해 있었다.
난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불어오는 찬 바람을 맞으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에겐 장비와 무기도 없었고, 결정적으로 서로의 생사를 확인할 무전기가 없었다. 다들 무사한 걸까? 혹시 숨어 있다가 그놈들에게 당한 건 아닐까?
아니다. 모두 무사할 것이다. 난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바쁘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밖으로 나와 그놈들의 발자국이 가득한 눈길을 걷기 시작했다.
나는 일행들이 숨어 있는 장소로 찾아갈 생각이다. 거리가 먼 곳도 아니었고, 일단 일행들과 합류하는 게 가장 1순위이기 때문이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인데, 그래도 가만히 있는 것보단 움직이는 게 좋다는 판단을 했다.
우리가 습격을 받고 뿔뿔이 흩어진 시각은 정오가 다가오는 11시 30분. 그리고 도망치는 시간을 짧게 잡아도 내가 일어난 지금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렇다는 건 내가 그 장소를 찾아간다고 해도 일행들이 이미 구조받았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었다.
그래, 그 자리에 없어도 괜찮다. 내가 발견한 게 시체만 아니면 됐다.
* * *
용팔이를 숨겨 뒀던 공용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있던 차들은 대부분 반파되거나 깨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 멀쩡한 노란색 버스 하나가 보였는데 저곳이 용팔이가 숨어 있는 장소였다.
난 몸을 숙이고 부서진 차 사이로 숨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곳곳에 보이는 검은색 피들과 내장은 구토가 나올 만큼 끔찍했지만, 일행들이 살아남았으면 하는 간절함 때문인지 그것들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열심히 걸음을 옮긴 나는 곧 버스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참을 주위를 둘러보고 이내 바닥에 엎드리며 조용히 용팔이를 불렀다.
‘……용팔아.’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난 황급하게 버스 옆쪽으로 기어갔고, 이내 버스 밑에서 사람 하나가 빠져나온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흔적을 발견한 나는 이제야 안도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딱 사람 하나가 빠져나올 수 있는 구멍은 조그마한 용팔이의 사이즈와 정확히 일치했다.
물론 버스 밑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피가 묻은 붕대들과 한쪽에 웅크리고 있던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아마 무사히 상처 치료를 끝내고 탈출한 모양이었다. 자식, 가방은 좀 내버려 두고 가지……. 난 조용히 투덜거리며 웃었다.
그나저나 어디로 간 걸까? 난 용팔이가 남긴 발자국을 더 찾아보려 했지만, 워낙 그놈들의 흔적이 많은지라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목적지는 정해져 있기에 난 미련 없이 일어나 자리를 피했다.
공용 주차장 바로 옆에 있는 골목을 향해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용팔이가 가장 먼저 향했을 곳은 노인과 두식이가 숨어있는 맨홀 뚜껑일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난 용팔이의 행적을 그대로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 거리를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짧은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난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주위에 그놈들이 없는지를 꼼꼼하게 확인했고, 이내 노인과 두식이가 숨어 있는 맨홀 뚜껑 근처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맨홀 뚜껑은 반쯤 열려 있었다. 거기로 황급하게 다가간 나는 그 근처에 있는 흔적들을 확인했고, 이내 맨홀 뚜껑 아래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맨홀 뚜껑 근처에 남아 있는 신발 자국은 분명 3개였다.
작은 사람 두 명과 큰 사람 한 명.
난 떨리는 손으로 그 자국들을 쓸었고, 이내 콧물을 킁 삼키며 히죽 웃었다. 왜 웃었는지는 모르겠고, 왜 웃으면서 울었는지도 모르겠다. 쪽팔리게 울지 좀 말자고 다짐했던 게 최근인 것 같은데, 몸 안에 남은 수분은 죄다 눈물로 빼내고 있었다.
일행들이 남긴 발자국은 맨홀에서 멀어질수록 흐릿해졌지만, 적어도 3명이 모두 무사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난 일행들이 남긴 발자국을 양손으로 훑으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살았다.
우리는 또 위기를 넘겨 그 질긴 삶을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난 눈물과 함께 흐르는 콧물을 격하게 훔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뜬금없지만 마트에서 옹기종기 앉아 먹던 김치찌개의 맛이 그리웠다.
* * *
난 골목에 몸을 숨기고 곰곰이 생각해 봤다. 분명 일행들은 그놈들이 사라지자마자 나를 찾기 위해 이 부근을 돌아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지하에 숨어 있는 나를 발견하기는 힘들었을 것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지금 나처럼 초조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연락수단이 없다는 게 이렇게 답답할 줄이야. 분명 나머지 일행들의 생사를 확인했다. 하지만 이곳을 탈출한 일행들이 어떤 움직임을 취할지에 대한 예측이 힘들다. 더군다나 가장 중요한 지도와 장비가 없었기에 함부로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배고프다. 목마르다. 아프다.
이 3가지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사실 이 몸 상태로 눈이 쌓은 길을 지나 에덴으로 복귀하는 건 불가능했다. 일단 상처를 치료해야 했고, 체력을 보충해 줄 음식이 필요했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면 더 좋았다.
난 이 부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한동안 쉬면서 체력을 보충하기로 했다. 주위에 편의점이나 상가가 있으면 좋을 텐데, 난 기억을 더듬으며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빠르게 이 골목을 벗어났다.
바람이 유난히 차갑다. 아니, 차갑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손발은 꽁꽁 얼어 감각이 없었고, 피로 딱딱하게 굳은 옷은 무겁기만 하다. 난 흐릿한 정신과 끊어질 듯 아파져 오는 근육을 힘겹게 끌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중간마다 그놈들이 한두 마리씩 존재했다. 하지만 살을 갈구하는 미친 모습들은 사라지고, 하늘만을 바라보는 어수룩한 바보들로 돌아와 있었다. 너무나 여유롭게 그들을 피해 걷던 나는 사거리 중간에서 조그마한 편의점 하나를 발견했다.
사거리라 시야도 확 트이고, 주위에 그놈들도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문이 부서진 흔적이 없었는데, 편의점 내부에 물품들이 그대로 남아 있을 확률이 높았다. 난 차 사이로 몸을 숨기고 빠르게 그쪽으로 뛰어갔다.
반투명한 유리문 사이로 편의점 내부를 살펴보자 조금 어질러진 가게 내부가 보였다. 누군가 벌써 다녀간 건가? 하지만 모든 물품이 통째로 사라진 건 아니었기에 난 조심히 편의점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상한 냄새와 꿉꿉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하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그 냄새를 맡으며 난 조심히 자세를 폈고, 편의점 문을 잠갔다. 그리고 숨을 훅 내뱉고 유리문에서 이곳이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살며시 들어갔다.
물건들이 많이 없어져 있었다. 하지만 모든 걸 가져가진 못했는지 간간이 내가 먹을 수 있는 식품들이 보였다. 난 가장 먼저 진열대 안에 몇 개 없는 생수를 꺼내 급하게 입으로 가져갔다. 아, 시원한 감로수가 내 목을 촉촉하게 적셨다.
난 그 큰 생수통을 순식간에 반쯤 비우고, 남은 물을 머리 위에 뿌릴까 말까를 수십 번 고민했다. 하지만 이 날씨에 그런 짓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아쉬운 대로 피가 묻은 얼굴만 대충 닦아 내었다. 아, 이제야 살 것 같았다.
난 물로 가득 채운 배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길게 트림했고, 먹을 것을 찾기 위해 빠르게 주변을 훑어봤다. 따뜻한 음식을 먹고 싶었지만, 그 정도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난 주위에 떨어져 있는 초코바 하나를 잡았고, 이내 포장지를 까려고 했다.
‘…….’
아니, 포장지를 까려는 순간 들려오는 소리에 황급히 몸을 숙였다. 분명 작게 들려왔지만 민감한 청각을 피해가기에는 너무나 뜻밖의 소리였다. 이 소리는 사람의 기침 소리였고, 편의점 안쪽에 있는 창고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난 빠르게 주변을 훑어 무기를 찾아봤지만 마땅한 무기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치명상을 입힐 날붙이가 필요했기에 플라스틱 포장지에 싸여 있는 가위를 하나 빼 들고 천천히 창고 문 앞으로 접근했다.
‘…….’
그리고 다시 한 번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저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확신했고, 순간 고민하기 시작했다. 먼저 공격해야 할까? 부랑자들은 아닐까? 그냥 내가 피해갈까? 하지만 바쁘게 생각하는 순간에도 내 몸은 천천히 창고 문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딸그랑.
유리한 위치를 잡기 위해 조심히 문을 열었는데, 그 순간 빈 깡통이 흔들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뿔싸, 문 앞에 간이 경보기를 설치하고 있었다. 난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하지만 그 창고 안에 있는 사람은 프로였다. 어둠 속에 있던 검은색 형체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순식간에 움직였고, 이내 창고 문 앞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빛 사이로 반짝거리는 은색 재질, 난 그것이 경찰용 리볼버임을 알 수 있었다.
리볼버?
총이란 걸 인지한 순간 도망칠 궁리를 하던 나는 가위를 엉거주춤 들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밖에서 들어오는 빛을 통해 보인 그 사람의 얼굴은 지구대에서 만났던 강 형사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들고 있던 리볼버를 천천히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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