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86화 (86/313)

[86]

검은 파도가 방파제를 밀어내며 나에게 몰려온다. 주차장은 어느새 그놈들로 가득했고. 주위를 빼곡하게 채운 차들은 그 역할이 무색해진다. 내가 밟았던 흰 눈은 지워지고. 내가 뛸 자리는 점점 좁아지기 시작한다.

담을 넘을 시간이 없었다. 저 앞에 보이는 주차장 정문으로 뛰어야 했다. 나를 잡기 위해 뻗은 그놈들의 손이 내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물이 차오르는 갯벌처럼 몰려오는 그놈들이 내가 뛰어 왔던 자리를 채운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호흡하려고 코와 목구멍을 벌려보아도 숨결은 장벽에 막혀 응답하지 않는다. 무호흡은 뇌에서 산소를 앗아갔고, 내가 뛰고 있는지 아니면 죽어가고 있는지에 대한 인식도 못 하게 만들었다

주차장 입구를 지나 재빠르게 코너로 빠진다. 순간 몸의 중심이 흐트러졌지만, 난 필사적으로 바닥을 짚으며, 중심을 잡고 발을 박찼다. 그리고 그 뒤로는 고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두두두 울리기 시작한다. 뒤돌아볼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적어도 수백 마리의 그놈들이 골목을 가득 채웠다.

내가 지나가는 자리가 파괴를 만들었다. 내 뒤를 따라오는 그놈들은 거리에 있는 모든 걸 부수고, 밀치며 따라온다. 서로가 서로를 밟아 육편이 뭉개지는 건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나를 잡기 위해 하나의 파도가 되어 몰려오는 것이다.

나는 총을 바닥에 버렸다. 그리고 총과 함께 생각을 버린다. 온몸에 있는 산소 한 점까지 모두 빨아 먹힌 기분이었다. 생각을 하지 못하는 나는 그저 본능에 의존해 몸을 움직일 뿐이었다. 목적지가 있느냐? 아니, 없었다.

한 마리 유기체가 되어 살기 위해 뛰던 나는 순간 찌르르 울리는 신경에 정신없이 사방을 둘러봤다. 그리고 나는 내가 뛰어야 할 길에 또 다른 파도가 몰려오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갈 길이 막혔다. 사방을 살펴봐도 갈 길이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가 내가 죽길 원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팔을 뻗어오는 그놈들이 나에게 저주를 속삭인다. 사람은 존귀한가? 생명은 소중한가? 과연 내 삶은 숭고한가? 아니다. 넌 그저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음식에 불과하다. 네가 그들을 살렸든 죽였든 너의 무게는 달라지지 않는다.

정말로 그런가?

옆에 보이는 빌라 건물로 빠르게 몸을 날렸다. 내 몸은 현관 바닥에 형편없이 처박혔고, 내가 빠져나온 그 자리는 물밀듯 밀려온 검은 파도들이 차지했다. 수백 마리가 내지르는 하모니가 미친 듯이 울려온다. 그리고 나에게 고정된 시선 또한 변함없이 느껴졌다.

난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움직였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내 발목을 붙잡을 듯한 살기를 떨쳐내고, 앞에 보이는 계단을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빌라의 좁은 입구는 그놈들이 한꺼번에 들어오기엔 무리였다. 하지만 그놈들은 서로에게 양보 따윈 없다는 듯 그 좁은 입구에 몸을 욱여넣었다.

나를 잡기 위해 서로를 밀던 그놈들을 결국 좁은 입구에 끼어 버렸고, 뒤에서 가해지는 압력에 온몸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그놈들의 몸에선 뭉개진 내장과 피가 쏟아져 내려 내가 지나온 현관을 더럽혔다.

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2층, 3층 그리고 더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걷는 것도 아니고, 뛰는 것도 아니다. 그놈들은 마치 소시지 안을 채우는 다진 고기들처럼 그 좁은 계단은 꾸역꾸역 기어오르고 있었다. 멈추면 죽는다. 멈추면 저 늪에 빠져 죽게 되는 것이다. 난 그렇게 중얼거리며 계단 위를 바라봤다.

그렇게 도착한 옥상 입구. 난 가재도구들을 몸으로 밀어내며 잠기지 않은 옥상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불어오는 찬 바람이 내 얼굴을 때렸고, 난 그제야 갓 태어난 아기처럼 숨을 삼키고 길게 내뱉었다.

나는 문 너머로 들려오는 기괴한 소리에 황급히 옥상 문을 잠갔다. 문을 닫는 행위는 그놈들에겐 우스운 반항에 불과하겠지만, 적어도 내가 몸을 피할 찰나의 시간은 만들어 줄 것이다. 난 물처럼 흐르는 땀을 닦고, 옥상 끝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옥상 끝에 도착해서 주위를 둘러본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 나는 검은 바다 한가운데서 표류하고 있구나.

건물 사이에서 손을 들고 넘실거리는 그놈들은 오로지 나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쿵. 쿵. 쿵.

옥상 문이 격하게 흔들린다. 경첩은 떨어져 나갈 듯 뒤틀렸으며, 손잡이는 이미 툭 하고 빠져나왔다. 손과 발이 내 의지와는 다르게 떨리기 시작했다. 난 그런 몸을 억지로 움직여 옥상 중앙으로 달려갔고, 천천히 반대쪽으로 뛸 준비를 했다.

후우.

숨을 내뱉었다. 뒷목이 뻣뻣해지고, 근육이 팽창하기 시작한다. 경첩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고 마지막으로 문이 떨어져 나갈 때쯤 난 바닥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목표는 빌라 옆에 있는 건물 옥상. 옆 동이라 하기에는 거리가 멀었지만, 나에게 선택권은 남아 있지 않았다.

건물 사이로는 나를 잡기 위해 급류처럼 휘몰아치는 그놈들이 손을 뻗고 있었다. 아마 뛰어넘기에 실패한다면 저 사이에 빠져 온몸이 분해되고, 고기 조각으로 변할 것이다.

쾅!

문이 박살 난다. 달리기 시작한 내 뒤로는 그놈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난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놈들이 얼마나 가까이 접근했는지 알 수 있었다. 달린다. 달린다. 나는 저곳으로 뛰어넘어야 한다.

시야가 급변한다. 나는 옥상 난간을 박차고 앞쪽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무겁던 몸은 한순간 중력을 무시한 듯 가벼워졌고, 내가 뛴 자리는 그놈들이 몰려와 몸을 처박기 시작한다.

시간이 느려진다. 주위에 있던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내 심장 소리와 옅은 이명 밖에 들리지 않았다. 내가 공중에 떠 있는 걸까? 그래, 발아래로 느껴지는 게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목표로 했던 옥상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모자라다. 온 힘을 다해 뛰어 봤지만, 날개가 없는 이상 저곳까지 닿는 건 불가능했다. 난 공중에 떠 있는 그 짧은 순간 작은 체념을 했다. 아직도 저 너머로 채연이가 있는 것 같은데……. 금방이라도 내 품에 안긴 듯 가슴이 따뜻했는데.

이젠 아무것도 없었다.

발이 너무나 무겁다. 난 떨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팔을 아무리 휘둘러 봐도 닿을 듯 말 듯 한 난간은 더 멀어지기만 했다. 난 눈을 감고 떴다. 그리고 채연이가 항상 매달려 있던 내 오른쪽 다리를 바라보다.

내 발아래서 팔을 내밀고 있는 그놈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깨끗하게 씻고 예쁜 옷을 입고 있는 채연이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찡그린 얼굴, 삐진 얼굴, 웃는 얼굴, 기뻐하는 얼굴, 나에게 그림을 자랑하던 얼굴. 모든 채연이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난 사진을 보관하듯 그 장면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시야에 담았다.

그런데 짙은 체념과 후회 속에서 무언가 작은 게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죽기 싫다.

죽기 싫어!

저주하고 침을 뱉었던 모든 신에게 기도했다. 만약 나를 좌절시키고 나락으로 밀어 넣었던 당신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내 인생을 격한 조류로 만들어 그곳에 몸을 던지게 했던 누군가가 존재한다면……. 제발, 제발 마지막으로 살려달라고.

내가 채연이를 다시 안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기도했다.

숨이 막힌다. 내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지했다. 귀가 윙윙 울렸고, 억울함과 두려움에 눈은 튀어나올 듯 아파져 왔다. 하지만 시간만큼은 빠르게 흐르지 않았다.

마치 우주 공간에 떠 있는 것처럼, 천천히 떨어지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심지어 하늘에서 내리는 눈마저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내 볼 위에 떨어진 눈은 하늘에서 내리는 마지막 눈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이 그쳤고, 흐릿한 구름 사이로 해가 수줍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햇빛이 내 얼굴을 살며시 비춘다. 그리고 나에게 속삭인다.

너희는 무엇을 하고 있었니?

난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그곳으로 손을 뻗었다. 빛을 잡고 말 것이다. 나에게 마지막으로 내려온 밧줄을 기필코 잡고 말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벌인 그 발악에 눈 부신 빛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선뜻 대답해 주었다.

텅!

손에 무언가가 잡혔다. 그리고 그 무언가를 잡은 손과 팔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한순간 중력을 거부한 몸에 모든 리스크가 걸리기 시작했고, 내 입에선 비명과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어깨와 손가락이 뜯어질 듯 아파져 온다.

하지만 난 분명 떨어지지 않았다.

힘겹게 눈을 뜨고 위를 바라보자 바닥으로 떨어지던 내 몸은 멈춰 있었고, 오른쪽 손에는 적갈색 파이프가 잡혀있었다. 불과 3층 높이에 불과한 이곳에는 가스관으로 보이는 파이프들이 즐비했다. 난 그것을 잡아내고 만 것이다.

살았다!

난 기쁨에 젖은 환희를 내뱉으며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삶 앞에 감사하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내 뒤에 서 있고, 혹은 앞에 서 주었던 일행들 모습이 아른거린다. 죽을힘을 다해 다음 파이프를 잡을 때마다 입에선 거친 숨이 튀어나왔다.

탁, 탁.

내가 파이프를 잡고 위로 올라갈 때마다 밑에선 그놈들이 미친 듯이 울부짖기 시작한다. 왜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느냐고, 왜 우리와 같아지지 않느냐고 소리치는 악마들을 난 철저하게 외면했다. 그렇게 밝은 하늘을 향해 천천히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옥상 난간을 잡았을 때, 난 그동안 참고 있던 숨을 훅 내뱉었다. 시야가 흐릿하고, 코에선 끊임없이 콧물이 흘러나왔다. 아니, 콧물이 맞는 걸까? 혹 눈이 녹아서 얼굴을 적시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또 애처럼 울고 있었다. 그리고 고맙다고, 너무나 고맙다고 울부짖었다. 그것은 내 기도에 응답해 준 누군가일 수도 있고, 혹은 나를 지탱해 준 채연이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이렇게 답하고 싶었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그래, 너는 살아있었다.

* * *

그놈들은 너무나 단순했다. 분명 내가 옆 건물로 들어왔음에도 이쪽 건물 입구로는 들어올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놈들은 내가 파이프를 타고 올라왔던 벽면에 달라붙어 난간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끊임없이 울부짖었다.

하지만 파이프를 타고 올라오는 놈도 있었고, 창문을 깨기 시작하는 놈들도 있었다. 그렇기에 마냥 구경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난 빠르게 옥상에서 내려와 건물 1층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1층에서 도착한 나는 몸을 납작하게 숙였다.

사방에는 그놈들이 깔려 있다. 밖을 나가거나 아까 같이 옥상 사이를 뛰어넘는 미친 짓을 반복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 건물에 몸을 숨겨야 하는데, 지금 건물로 들어오는 그놈들 때문에 어설픈 장소는 위험했다. 적당한 곳이 없을까? 몸을 엎드린 상태에서 1층을 살피던 나는 계단 밑으로 보이는 작은 문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현관 밖에서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그놈들이 듣지 못하게 살며시 손잡이를 잡고 돌려보았다. 다행히 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그 문 아래로는 내려가는 계단 하나가 존재했다. 하지만 너무 어두웠다. 저 너머로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하지만 다른 곳을 찾을 시간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놈들은 벌써 건물 안으로 들어왔는지 사방에서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난 조용히 안으로 들어와 소리가 들리지 않게 문을 닫았다.

문을 닫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이었다.

난 살았다는 안도감과 저놈들과 멀어졌다는 희망에 가득 차 조심히 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손전등은 하필 용팔이에게 건네줬던 가방에 들어 있었다. 난 어쩔 수 없이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길 기다리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곧이어 계단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하자 날 살며시 걸음을 옮겼다. 아니, 걸음을 옮긴 게 아니라 거의 엉덩이로 내려가듯 앉아 천천히 발을 뻗었다. 이곳은 오랫동안 사람이 출입하지 않았는지 매캐한 먼지가 올라오고 있었고, 지독한 한기가 느껴졌다.

그렇게 한 30초를 내려왔을까. 매캐한 먼지 사이로 걸레를 빤 구린 냄새와 코끝을 찌르는 락스 냄새가 강렬하게 풍겨 왔다. 청소 도구함? 아니면 창고? 아무튼, 상관없었다. 그렇게 넓은 곳도 아니었고 창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난 벽을 짚으며, 천천히 걸어가 주변을 손으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손에 만져지는 종이박스나 플라스틱 자재들을 옆으로 치우고 내가 앉아있을 자리를 만들었다. 몸이 오들오들 떨리고 눈앞이 흐릿하다.

벌써 번 아웃의 여파가 찾아오고 있었다. 난 벽에 몸을 기대고 그놈들이 나를 찾지 못하길 빌었다. 그렇게 피와 내장으로 젖은 옷을 끌어안고 어둠 속에 서서히 동화되었다.

모든 곳이 어두웠다. 하지만 내 속에는 밝은 빛이 웅웅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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