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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살아있다-83화 (83/313)

[83]

후우

숨을 내뱉자 안개 같은 입김이 훅 하고 빠져나왔다. 여명이 밝아오는 중이라 아직 날씨가 쌀쌀했고 눈 때문인지 저 멀리 보이는 여명조차 노이즈가 낀 듯 흐릿하기만 하다. 난 굳은 몸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새 돌아가며 서야하는 불침번에서 우리 일행들은 제외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거듭 휴식을 권유하는 사람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품실로 들어왔다. 우리를 볼 때마다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사람들 때문에 한동안 부담스러웠다.

불침번에서 제외되었지만 나는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깊은 잠에 들지 못했다. 물론 용팔이 형제는 코까지 골아가며 잤고 노인도 피곤했는지 한쪽에서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난 조심히 일어나 우리가 들고 온 장비들을 점검했다.

그리고 8시가 넘었다. 고개를 내밀던 여명은 어느새 아침을 알렸고 아침이라 하기엔 너무나 흐린 날씨는 나를 좀먹고 있는 불안감과 같았다. 난 일행들의 짐까지 다 챙기고 조심히 노인과 용팔이 형제를 깨웠다.

노인은 마치 잔적 없다는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옷을 추슬렀고 용팔이 형제는 한참을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용팔이의 머리를 딱 때려주고 두식이는 초코바를 까주니 금방 자리에서 일어난다. 우린 마지막으로 남은 식량을 사이좋게 나눠먹었다.

따뜻한 음식이 정말 간절하다 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에덴에 있을 때는 소중한줄 몰랐던 따뜻함이 오늘 아침만큼은 정말 간절했다. 차가운 바닥은 온몸에 흐르는 피마저 얼려버릴 것 같았고 차가운 공기는 숨을 쉴 때마다 영혼을 떨게 만들었다.

난 핫팩을 열심히 흔들어 옷 속에 넣고 딱딱하게 굳은 에너지 바를 이빨로 열심히 갉아먹었다. 이런 날은 뭐라고 하지? 그래,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이다. 하지만 컨디션이 좋았던 날을 꼽아보려 하니 딱히 없었던 것 같다.

그래 원래 이런 거지. 난 애써 스스로를 위안했다. 힘이 날만한 말이 없을까? 한참을 고민해봤지만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냥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영양분을 섭취하는 것에 집중했다.

비적비적 에너지 바를 씹어 먹는 소리만이 방안에 가득했다. 우리는 말없이 아침을 맞이하고 앞으로 펼쳐질 상황을 준비했다. 그리고 거의 비슷한 속도로 식사를 끝내고 장비를 챙긴 뒤 비품실 문을 열었다.

로비에는 우리보다 일찍 일어난 사람들로 가득했다. 일어났으면 일어났다고 말이라도 해주지, 그들은 우리를 깨우지도 않고 새벽같이 일어나 로비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이런 특별대우 정말 불편하다. 하지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들 때문에 차마 뭐라 나무랄 수도 없었다.

창문 밖을 바라보니 아직 눈이 오고 있었다. 물론 어제와 비교하면 양호한 수준이었지만 쌓인 눈과 흐린 날씨 때문에 이동하는데 있어 불편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을 지체한다면 완벽하게 고립되어버릴 위험이 있었다. 무조건 지금 출발해야했다.

난 출발하기에 앞서 그들의 복장과 상태를 살폈다. 그들은 작정하고 준비했는지 체온보존을 위한 털모자와 목도리까지 입고 있었고 아주 비싸 보이는 두꺼운 카파까지 완벽하게 준비했다. 그리고 어제 나눠준 식량 덕에 창백했던 얼굴들도 조금 생기가 감돌았다.

나는 이동하면서 지켜야할 규칙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아니 말이 좋아 규칙이지 이건 꼭 지켜야하는 법칙과 같았다. 물론 대규모 인솔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들은 당장 어제 만난 사람들이었다. 한순간이라도 질서가 무너진다면 길거리에서 전멸을 당할지도 모른다.

규칙을 준수하고 개인적인 행동을 자제한다. 그리고 행동하기 전에 무조건 보고할 것. 난 규칙을 간단하게 설명했고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면 더 이상 지켜줄 수 없다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음을 절대 내지 말라고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 사람들을 일렬로 세웠다. 물론 선두는 나였고 후방은 노인이었다. 그리고 인원들 사이로 용팔이 형제를 배치하고 그나마 전투가 가능한 성인남성들을 그 사이에 끼워 넣었다. 문 앞에 줄을 세워놓으니 그 길이가 꽤 길었다.

출발할 시간이다. 내 신호에 맞춰 사람들이 분주하게 바리케이드가 치웠고 이내 약속한 포지션으로 이동했다. 난 대형이 완벽하게 완성되길 기다렸다. 그리고 모든 준비가 되자 출발 수신호를 조용히 보내며 문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운 문손잡이는 몽롱한 내 정신을 차갑게 핥았다. 그리고 문을 열자 보이는 건 흰색 정글이었다.

* * * * * * *

눈은 무릎 바로 아래까지 쌓여있었다. 눈은 우리가 움직일 때마다 거머리처럼 달라붙었고 이내 서서히 의욕과 체온을 앗아갔다. 최악의 조건, 위험한 변수가 주변에 널려 있었지만 우리는 멈출 수 없었다. 차라리 눈이 굳기 전에 한 걸음이라도 더 이동하는 게 좋았다.

내가 발을 움직여 눈을 해치면 그 뒤로 따라오는 사람들이 같이 눈을 밟아준다. 우리는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같은 발걸음 같은 호흡을 내뱉었다. 모든 감각이 어지럽기 그지없었다. 눈은 양방향을 살피기 바빴고 청각은 이곳저곳에서 쏟아지는 정보에 쉴 틈이 없었다.

사박사박

숨소리와 눈을 밟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가끔 코를 훌쩍이는 소리에 내가 반응할 정도로 완벽한 침묵의 행진이었다. 만족스럽다, 그래 이 정도 속도로만 가준다면 오늘내로 에덴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난 코를 훌쩍이면서 정신없이 코를 닦았다. 그리고 최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위해 애썼다. 하지만 마치 외나무다리를 걷는 듯한 이 긴장감은 도저히 가시지 않았다. 뒤로 느껴지는 시선이 내 뒤통수를 따갑게 울린다.

그렇게 두 시간을 내리 걸었다.

콜록콜록. 걷는 내내 아무런 말이 없던 사람들이 슬슬 지치기 시작하는지 거친 숨소리와 기침을 내뱉었다. 물론 나도 무거워지는 몸과 얼어붙은 정신 때문에 슬슬 지쳐가기 시작했다. 휴식을 취해야 했지만 눈이 오고 인원도 많은지라 쉴만한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그렇게 느려진 텐션으로 한참을 걷던 나는 신경이 울리는 경종을 듣고 황급히 멈춰 섰다. 내가 길 한복판에서 갑자기 멈춰 서자 뒤에서는 작은 웅성거림과 함께 겁에 질린 신음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발소리와 함께 노인이 빠르게 달려왔다.

난 노인이 내 옆으로 오자마자 조용히 한곳을 가리켰다. 그곳은 차가 빼곡한 도로였는데 그 도로위에 있는 차 옆으로는 그놈들이 다섯 마리나 몰려 있었다. 그리고 그놈들은 서있는 것이 아닌 바닥에 엎드려 있었는데, 이상할 만큼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장 먼저 맡아진 건 코끝을 찌르는 피 비린내였다. 그리고 무언가를 게걸스럽게 뜯어먹는 소리도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놈들이 사냥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방금 그놈들에게 잡힌 건지 시뻘건 핏물을 내뱉는 시체는 그놈들에게 뜯겨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바닥에 터져서 늘어진 내장들이 내뿜는 역겨운 냄새가 내 신경을 건드리고 마치 돼지고기처럼 뜨거운 김을 뿜는 시체는 저절로 두 눈을 감게 만들었다. 내 뒤를 따라오던 사람들도 참혹한 포식의 현장에서 조용히 토와 울음을 삼켰다.

‘우회합니다.’

독이 바짝 오른놈들이 다섯이나 된다. 우리 일행들만 있었다면 선제 사격 후 제압 했겠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딸린 짐들이 너무 많았다. 지켜야 한다는 압박감과 더불어 움직임이 방해가 되는 상황에서 적어도 위험을 자처할 생각은 없었다.

뒤로 100미터를 다시 걸어야 했지만 다들 불만은 없었다. 이런 곳에서 호승심을 부려봤자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난 머리에 쌓인 눈을 털고 서둘러 수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빙 둘러 걸음을 옮기려는데 갑자기 노인이 내 어깨를 잡았다.

‘도, 동윤아.’

말을 더듬어? 영감님이? 난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황급하게 노인을 바라보자 노인은 내 어깨를 잡은 그 상태가 그대로 굳어있었다. 다만 시선은 그놈들이 있던 방향으로 고정되어있었는데 노인은 분명 손을 떨고 있었다.

난 굳어버린 목을 돌림과 동시에 크로스 보우를 잡았다. 긴장감으로 굳어버린 목 근육을 강제로 움직이자 숨이 턱턱 막히고 손에는 식은땀이 고였다. 그리고 내 시선은 노인이 바라보는 방향을 향했다.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식사에 집중하고 있던 그놈들이 동시에 움직임을 멈추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움직임은 없었고 위협적인 울음소리도 없었다. 그놈들은 그저 목을 기괴하게 꺾고 우리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모습에 소름이 돋고 말았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찌릿한 신경에 저절로 발가락이 오므려진다.

왜지? 도대체 왜? 인지범위에서 한참 떨어진 장소다. 그리고 저놈들에게 들릴 정도로 소리를 낸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저놈들은 정확히 우리가 모여 있는 장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뒷목이 뻣뻣해지고 차가운 땀 한 방울이 등골을 타고 흐른다.

끼이이익

철판을 긁는 소리가 거리에 조용히 울린다. 그리고 한쪽에 엎드려있던 한 놈이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철퍽, 그놈이 들고 있던 내장 조각이 바닥에 떨어지고 동시에 다른놈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박사박

그놈들은 눈 위를 조용히 걷기 시작한다. 그러다 점점 속도를 내기 시작하더니 이내 입을 크게 벌리고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정확히 우리를 향하고 있었고 그들의 시선을 우리들의 살과 내장에 고정되어 있었다.

‘용팔아!’

난 용팔이를 부르며 빠르게 볼트를 꺼냈고 이내 장전을 마쳤다. 그리고 동시에 노인도 크로스 보우를 견착했고 우리 둘은 일제사격을 시작했다. 침착하자 동윤아, 겨우 다섯 마리다. 지금은 그냥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당황한 것뿐이다.

날아간 볼트는 한 놈 대가리에 그대로 꽂혔고 다른 한발은 종이 한창 차이로 허공을 갈랐다. 가공할 속도로 뛰어오는 그놈들은 다음 볼트를 발사하기도전에 이미 근처까지 도착했다. 그놈들이 내지르는 끔찍한 괴음 사이로 사람들이 내뱉는 작은 비명과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둥글게 뭉쳐!’

난 사람들에게 외치며 앞으로 나서려는 강 형사와 엄 순경을 뒤로 밀쳤다. 손발이 맞지 않는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빠르게 장전을 마친 노인이 다음 볼트를 발사했고 그 볼트는 앞서 달리는 한 놈 목에 명중했다.

노인은 욕설을 내뱉었다. 저 정도 데미지로는 절대 죽지 않는다. 그리고 예상한대로 목에 볼트를 맞은 그놈은 잠시 주춤할 뿐 이내 울부짖으며 다시 달려오기 시작했다. 난 장전을 하다만 크로스 보우를 눈 위에 던졌고 이내 총을 빼들었다.

착검한 대검이 날카롭게 빛난다. 한 놈은 달려오다 죽었고 남은 놈은 4마리밖에 없다. 이 정도면 충분히 육박전이 가능한 상황이다. 난 양옆에 서있는 용팔이 형제에게 빠르게 수신호를 보냈고 이내 내가 맡은 놈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신속 정확. 이 수칙을 지켜준다면 아무런 피해 없이 싸움을 끝낼 수 있었다. 난 총을 정확히 그놈 목 아래를 겨누고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그놈은 달려오는 힘과 함께 날카롭게 갈아둔 대검에 그대로 목이 뚫렸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난 꽂아둔 대검을 비틀어 옆으로 빼냈고 그놈은 목이 반쯤 잘려 검은색 피를 뿜어냈다. 하지만 목이 달랑거리는 그 순간까지도 나에게 손을 뻗어 공격을 가하려는 그 녀석에게 난 마지막 공격을 가했다.

총을 꽉 잡는다. 그리고 힘껏 총을 앞으로 내질렀다. 돼지고기를 가르는 감촉과 함께 대검 날이 오른쪽 눈에 그대로 박혔고 그대로 그놈의 더러운 뇌와 신경을 파괴시킨다. 그놈은 천천히 경련했고 난 그때를 놓치지 않고 복부를 걷어찼다.

놈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다. 난 빠르게 달려가 총을 움켜잡고 위에서 아래로 대검을 내려찍었다. 그리고 확실하게 숨통을 끊고 빠르게 주위를 둘러본다. 노인과 두식이는 일찍이 놈을 처리했고 용팔이는 고분분투하고 있었지만 거의 마무리 단계였다.

다행이다, 끝난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내 귀를 찌르는 비명소리가 우리 뒤에서 울려왔다.

‘꺄아아악!’

비명소리! 나는 빠르게 반응해 사람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한 여성이 겁에 질려 귀를 틀어막고 있었고 다른 이들 또한 패닉에 빠져있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선 강 형사가 그놈 한 마리와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분명 우리가 다 잡고 있었는데? 저 한 마리는 어디서 온 거란 말인가? 힘겹게 몸싸움을 하는 강 형사를 바라보며 내가 빠르게 달려가는 순간 그 옆에 있던 노인이 외쳤다.

‘내가 처리한다! 떨어져!’

노인은 어느새 장전을 끝낸 크로스 보우를 들어올렸다. 됐다, 저걸로 처리하면 될 것이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노인이 깊게 내뱉는 숨소리가 조용히 들려온다. 하지만 그 순간 절대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크게 울렸다.

탕!!!!

모두가 경직되었다. 아니 그대로 굳어버렸다는 게 맞을 것이다. 노인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견착을 풀었고 용팔이 형제 또한 시체를 치우다말고 몸을 굳힌다. 그리고 강 형사와 몸싸움을 벌이고 있던 그놈은 머리가 뚫린 채 천천히 바닥에 쓰러진다.

화약 냄새가 코끝을 찌르고 귓가를 강타한 총 소리가 고막을 찌르르 울린다. 그리고 이곳을 시작으로 울려 퍼진 총소리는 마치 그놈들을 이곳으로 이끌 듯 도시 이곳저곳에 멀리멀리 퍼지기 시작했다.

강 형사 옆에선 엄 순경이 리볼버를 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 미친 새끼…….’

꿈이지?

노인이 어이가 없어서 내뱉는 욕설에는 공포와 당혹스러움이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도시 이곳저곳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괴물들이 동시에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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