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잘못 들었을 게 분명하다. 그냥 피곤해서거나……. 그래, 의사가 말하는 PTSD 증상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난 스스로를 속이고 애써 현실을 부정하며 그놈이 내뱉은 소리를 머릿속에서 지워갔다. 우리는 시체를 끌어다가 골목 한구석에 박아놓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노인이 아까부터 나를 빤히 쳐다본다. 분명 아까 내가 보여줬던 행동이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난 어쩔 수 없이 억지웃음을 지어보이며 노인을 안심시켰고 이내 바쁜 일과를 핑계 삼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이제 지구대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SOS
반투명한 창문에 보이는 구조신호는 너무나 또렷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유리문으로 되어있는 정문은 바리게이트를 쌓았는지 무언가 가득 쌓여있었다. 우리는 지구대로 접근하지 않고 한참을 근처에서 머물며 주위를 둘러봤다.
소극적인 행동이었다. 아니, 조심스러운 행동이었다. 안쪽에 사람이 있는 것을 확인한 이상 직접 찾아가는 행위는 위험했다. 저들이 우리의 존재를 눈치 챌 위치에 가만히 쭈그리고 앉아 지구대 내부에서 일어날 반응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바람과 눈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사람 있는 거 맞죠……?’
용팔이가 머리위에 쌓인 눈을 털며 불안한 듯 속삭였다. 하지만 노인도 나도 그 물음에 대답하지 못한 채 크로스 보우를 잡고 가만히 쭈그려 있었다. 눈발이 거세지고 다시 시야가 흐려진다면 길거리가 아닌 다른 건물로 돌아가야 한다.
노인은 흘러가는 시간이 불안하기만 한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옅게 앓는 소리를 낸다. 하지만 그 순간 굳게 닫혀있던 유리문이 살며시 열렸고 이내 문 사이로 무언가 흐릿한 것이 튀어나왔다. 그것이 경찰 리볼버인걸 눈치 챈 나는 재빠르게 바닥에 엎드렸다.
노인도 내가 엎드리자 순식간에 반응해 용팔이 형제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고 이내 지구대 앞에 있는 경찰차로 몸을 숨겼다. 재빠른 엄폐 덕에 우리는 안심하고 문 사이를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열린 문 사이로 사람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 누구십니까? 혹시 구조대입니까?’
그는 경찰복을 입고 있었다. 계급으로 보아 순경, 하지만 꼴이 말이 아니었다. 경찰복은 더럽혀져 있었고 얼굴은 창백해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이성은 잃지 않았는지 다짜고짜 사격은 가하지 않았다.
노인이 엄폐물 뒤에 숨으며 친절하게 대답했다.
‘총 내려, 그거 쏘는 순간 다 뒤지는 거야.’
그러자 순경의 총 끝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침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노인은 총을 마주한 순간부터 딱히 기분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난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한숨을 훅 내뱉었고 이내 그 순경에게 말을 건넸다.
‘안에서 우리 지켜보고 있었죠?’
‘네? 아……. 네…….’
순경은 말끝을 흐리며 소심하게 대답했다. 종말 이후 계속 이곳에만 틀어박혀 있던 걸까? 재깍재깍 대답해주는 안일한 태도를 보이는 그가 한심하기도 하면서 일이 쉽게 풀릴 것 같단 생각에 안심이 되기도 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 봤습니까?’
유니폼은 사람의 직업을 가장 쉽게 보여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우린 에덴에서 지급받은 복장을 통일해서 입고 있었고 조잡하지 않은 경비복은 우리를 일반적인 민간인이 아님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물론……. 이딴 겉껍데기로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되지만.
‘구조대 맞으시죠?!’
하지만 저쪽에선 쉽게 믿어주는 모양이었다.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데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일단 그에게 우리 신분을 밝히기 위해 외쳤다.
‘쉘터 에덴 소속입니다. 구조대가……. 맞긴 합니다.’
난 중간에 우리가 구조대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어서 말을 흐렸다. 하지만 정확하게 정해진 임무가 없었고 지금은 저들의 협조도 필요했기에 일단 구조대가 맞다고 알렸다. 그러자 순경의 얼굴은 순식간에 환해지더니 이내 기쁨에 젖어 대답한다.
‘기, 기다리면 올 줄 알았어……. 어서 들어오세요! 어서!’
그리고는 리볼버를 황급하게 내리더니 문을 막고 있던 바리게이트를 치우고 우리에게 손짓했다. 난 몸에 쌓은 눈을 치우고 주변을 살피며 살며시 일어났다. 그리고 시선을 순경이 들고 있던 총에 집중시키고 조용히 일행들을 돌아봤다.
그러자 일행들을 쭈뼛거리며 조용히 일어났고 자세를 낮춘 채 나에게 다가왔다. 정작 우리를 경계해야할 순경은 환하게 웃으며 문을 열었고 우리는 그 태도에 불안해하고 있었다. 난 순간 웃음을 피식 흘러나왔지만 애써 꾹 참으며 지구대 문 앞으로 걸어갔다.
* * * * * * *
‘총 겨눠서 죄송했습니다…….’
우리가 지구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순경이 바쁘게 움직여 다시 입구를 막았다. 그리고 우리를 보면서 눈을 마주치지 못하더니 이내 빠르게 사과를 해온다. 얼굴도 둥글둥글하게 생기고 두꺼운 안경을 끼고 있는 게 사람이 참 순해보였다.
‘괜찮습니다.’
이 순경이 한 행동이 지금으로썬 당연했다. 하지만 나는 이 대화가 더 길어질걸 염려해 그냥 빠르게 사과를 받았다. 그러자 지구대 안쪽에서 누군가 이곳으로 걸어왔고 우리를 보며 말했다. 나와 일행들의 시선은 순식간에 그곳으로 향했다.
‘엄 순경! 이 사람들은 누구야? 또 피난민이야?’
지구대 안쪽에서 나온 그는 경찰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잔뜩 낡은 가죽점퍼 안으로 보이는 숄더 홀스터와 날카롭게 빛나는 눈빛은 그가 일반적인 민간인이 아님을 추측하게 해주었다. 엄 순경은 그가 나오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강 형사님, 구조대랍니다! 우리 이제 살았어요!’
‘구조대?’
강 형사는 우리를 바라보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맞다, 저게 맞는 반응이다. 우린 군복도 아니고 소방복도 아닌 그저 통일된 복장만을 입고 있을 뿐이다. 이것만을 보고 구조대라고 생각하는 건 섣부른 판단이었다.
‘당신들 정말 구조대 맞아?’
강 형사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가죽점퍼 사이로 보이는 총은 마치 금방이라도 뽑을 수 있다는 듯 홀더가 풀려있었고 경계로 가득한 눈은 일행들의 무기로 향하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역시 호의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왜? 그냥 나갈까?’
그리고 우리 쪽에는 할 말 다해야 속이 풀리는 노인이 있었다.
사실 우리가 아쉬울 건 전혀 없었다. 단체장이 교리를 따라 사람들을 구하라곤 했지만 구조를 원하지 않는 적대적인 생존자까지 구할 의무는 우리에게 없었다. 나는 그것을 알기에 분쟁이 생기기전 그냥 얌전히 나가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하지만 노인은 기어코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노인이 뱉은 말에 강 형사는 움찔했고 그것을 듣고 있던 엄 순경은 얼굴이 퍼렇게 질려 버렸다. 그리고 재빠르게 우리들 사이를 가로막으며 차마 말로는 하지 못할 행동을 정신 사납게 보여줬다. 엄 순경은 말을 더듬으며 외쳤다.
‘이, 이러지 마세요!’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엄 순경은 자신들이 구조 받지 못할까봐 무척이나 불안해하고 있었다. 일단 나는 급한 불을 끄자는 마음에 크로스 보우를 잠시 노인에게 맡기고 천천히 엄 순경과 강 형사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곤조곤한 말투로 설명을 시작했다.
‘쉘터 에덴 소속입니다. 원하신다면 에덴까지 에스코트 해드리겠습니다.’
자세한 설명을 하기에는 그들을 납득시킬 자신이 없었다. 더군다나 안내 책자까지 에덴에 두고 왔기에 내 설명은 더욱더 짧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눈치로 보아 강 형사라 불리는 남자는 쉘터에 대한 개념 자체를 모르는 듯싶었다.
‘쉘터가 뭔데? 그리고 에덴은 또 뭐고? 당신들 군인이야? 총을 어떻게 들고 있어?’
뒤에서 노인이 내뱉는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이들이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답답함에서 오는 기분은 차마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할까? 내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빠져있자 엄 순경과 강 형사도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유지한다.
하지만 그 침묵은 곧 지구대 안쪽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 때문에 깨지고 말았다. 이 두 명만 있는 게 아니었나? 하긴 아까 강 형사가 피난민이란 단어를 꺼내긴 했다. 나는 눈을 뜨고 웅성거림이 들려오는 지구대 안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곳에는 10명쯤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고 이쪽을 바라보고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낡고 냄새나는 옷, 그리고 한참을 씻지 못했는지 떡처럼 뭉친 머리는 그들의 사정을 작게나마 알 수 있었다.
하나같이 몸이 말랐고 얼굴이 창백하다. 아마 노인이 구조신호를 발견해지 못했더라면 이 사람들은 일주일이 지나기 전에 밖으로 뛰쳐나갔거나 모두 이곳에서 굶어 죽었을지도 몰랐다. 우리를 한참동안 지켜보던 그들 무리는 계속해서 웅성거렸다. 그리고 한 중년 여자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고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본 적 있어요.’
그 말은 시발점이었다. 무리들 중에는 에덴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지 우후죽순처럼 손을 들며 외치기 시작했다. 저도 알아요! 혹은 저도 그곳으로 가려고 했어요! 지구대 내부는 금세 소란스러워졌고 강 형사는 깜짝 놀라며 그들을 진정시켰다.
‘진정하십쇼. 소리 내면 큰일 납니다!’
그 경고가 제대로 먹혔는지 사람들은 빠르게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덜덜 떨며 문 밖을 바라보는 모습은 공포에 제대로 찌들어버린 모습이었다. 강 형사는 그들을 진정시키며 뒤로 돌았고 이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잠시 이야기 좀 해도 되겠습니까?’
강 형사의 말은 어느새 존댓말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불쾌한 기색 없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주었다. 물론 말주변이 없는 나로서는 대환영이었다. 내 대답을 들은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엄 순경을 불렀다.
‘이분들 담요 좀 가져다드려.’
* * * * * * *
킁킁
용팔이가 담요 냄새를 맡고 인상을 찌푸린다. 그러자 노인이 머리를 딱 때리며 주의 하라는 듯 인상을 찡그린다. 확실히 담요에선 퀴퀴한 냄새가 풍겨왔다. 하지만 이 상황에선 담요 한 장이 얼마나 귀한지 잘 알고 있기에 난 군소리 없이 담요를 덮었다.
그리고 나는 한쪽에서 담요를 들고 서있는 엄 순경을 조심히 불렀다.
‘저기요.’
‘네?’
그러자 엄 순경은 깜짝 놀라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조용히 손짓했고 엄 순경은 특유의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나에게로 다가온다. 나는 저 무리들이 들리지 않도록 엄 순경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저 강 형사라는 사람과는 같은 지구대 소속이십니까?’
그러자 엄 순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에이……. 형사님이신걸요. 지구대 소속은 아니시고 그 일 터지고 나서 피난민들하고 같이 딸려오신 분이세요.’
‘아, 그렇습니까?’
난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가늘게 뜬다. 그리고 한쪽에서 웅성웅성 떠들고 있는 무리들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다. 많은 경우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난 그것을 허투루 결정짓지 않았다. 더 지켜볼 생각이다.
난 엄 순경을 향해 말했다.
‘그나저나 안 가보셔도 됩니까?’
자신도 이 지구대 소속일 텐데 엄 순경은 저들 대화에 껴들기는커녕 우리 옆에 가만히 서서 일행들을 캐어하기 바쁘다. 이상하게 그 태도가 알랑방귀를 뀌는 것 같지는 않았고 그저 단순한 호의로 보였다. 하지만 난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어봤다.
그러자 엄 순경은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바보같이 웃었다.
그리고 시간은 흐르고 눈발을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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