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80화 (80/313)

[80]

‘뭐 좀 보이냐?’

‘아뇨.’

11시를 넘기자 눈이 미친 듯이 오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흐린 날씨에 눈까지 오니 시야가 상당히 좁아졌다. 우리는 체력과 체온은 보존하기위해 잠시 오피스텔 건물로 들어왔고 복도에 짐을 풀었다. 이런 날씨가 지속되면 큰일이다. 가뜩이나 바쁜 스케줄이 벌써부터 지체되기 시작했다.

일행들이 잠시 쉬는 사이 창문을 열고 챙겨온 망원경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할 길을 체크하려 애썼지만 망원경으로는 흐릿한 골목밖에 보이지 않았다. 눈이 불어오는 도시는 위험천만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안개가 낀 듯 시야를 방해하는 눈 폭풍은 마치 순백의 밤과 같았다.

‘흐 따뜻한 라면 한 그릇 먹고 싶다.’

핫팩으로 얼굴을 비비던 용팔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두식이가 대답대신 침을 꿀꺽 삼켰고 노인도 피식 웃으며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차가운 복도에선 한기가 몰려왔고 눈 때문에 젖은 옷은 체온을 빠르게 앗아갔다.

용팔이 말대로 따뜻한 라면 한 그릇이 생각나는 시간이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핫팩으로 손을 녹였다. 눈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시야가 확보된 상태로 이동을 시작해야했다. 우리는 하는 수없이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결정했고 난 망원경을 노인에게 맡기며 한쪽에 앉아 몸을 웅크렸다.

기약 없는 시간이 지난다. 내 귀에는 오로지 바람이 부는 소리와 일행들이 내뿜는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춥다.

‘동윤아.’

그리고 노인이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본능처럼 손을 훑어 옆에 놓았던 크로스 보우를 잡았다. 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친 노인은 진정하라는 듯 손을 뻗으며 흔들었고 이내 나에게 손짓했다.

난 굳은 몸을 움직여 천천히 노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노인은 나에게 망원경은 넘기며 창문 밖 어느 한 지점을 가리켰다.

‘보이냐?’

난 망원경을 양손으로 잡고 노인이 가리킨 지점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백의 밤은 도시를 가리고 내 시야마저 가려버렸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유난히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붉은 페인트로 칠해진 글자였다.

그 글자는 어두운 밤바다에 쓸쓸하게 놓인 등대와 같았다.

난 침을 삼키며 그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미친 듯이 불어오는 눈보라 사이로 익숙한 문양과 간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경찰서, 아니 동네 지구대. 그리고 지구대 창문으로는 분명히 이런 글자가 쓰여 있었다.

SOS

붉은 글자라 그런 걸까? 그 글자는 피로 쓴 듯 지독한 처절함이 담겨있었다. 난 망원경을 살며시 내리며 메마른 목구녕 사이로 묽은 침을 꿀꺽 삼켰다. 구조신호다. 우리와 불과 두 블록 사이에 있는 지구대에서 불특정 상대를 향한 구조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사람이 있나봅니다.’

내가 조용히 중얼거리자 노인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노인의 말이 맞다. 물론 저곳에 사람이 있었기에 구조신호를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저 안에 사람들이 아직까지 살아 있는지 그리고 혹시 부랑자들에 함정이 아닌지에 대한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갈까? 아니, 그것 또한 아니었다.

‘에덴이 모르는 쉘터가 아닐까요?’

깜짝이야, 넌 언제 일어났냐?

한쪽에서 병든 닭처럼 졸고 있던 용팔이가 슬그머니 다가와 자신도 대화에 끼었다. 난 인기척 없이 다가온 용팔이 때문에 놀랄 수밖에 없었고 홧김에 뒤통수를 짝 쳐주었다. 그러자 용팔이는 울상을 지으며 나를 노려본다.

‘그것도 모르는 일이고.’

노인은 아까와 같은 대답을 하며 용팔이 머리위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그리고 조용히 쓰다듬으며 착찹한 눈으로 지구대 방향을 바라봤다. 난 그런 노인을 바라보며 조금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에덴을 나올 때 우리들이 정했던 목표는 쉘터들의 방문이었다.

좋게 말하자면 탐방 수사? 나쁘게 말하면 대책 없이 돌아다니며 정보를 긁어 모으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눈이라는 변수 때문에 이곳에 고립되어 버렸고 또 얼렁뚱땅 새로운 쉘터일 가능성이 있는 곳을 찾아버렸으니 고민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시간이 지났다.

‘지나가나 볼까요?’

어차피 보고할 상관도 없다. 나는 눈발이 서서히 약해지는 와중에 노인을 향해 살며시 물었다. 하지만 노인은 입을 다물었고 애꿎은 용팔이가 ‘그러죠, 뭐.’ 하고 대답한다. 노인은 아직도 고민이 드는지 눈을 감고 벽에 기대있었다.

눈발이 약해지자 시야가 서서히 개선된다. 나는 다시 망원경을 들고 창문 쪽으로 다가가 밖을 살폈다. 눈보라 속에 숨어있는 그놈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고 보이지 않던 길의 윤곽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구대 건물 또한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붉은 글자로 쓰여 있는 SOS, 그곳을 잠시 뚫어져라 쳐다보자 무언가 희끗하게 창문 사이로 지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너무 순식간이라 난 망원경을 잠시 내리고 눈을 비볐다.

그리고 창문을 다시 확인해보자 또 다시 창문 사이로 무언가가 휙 지나가는 게 보였다. 그 짧은 순간에 확인한 형체는 사람 그림자가 분명했다. 난 망원경을 내리고 노인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안에 사람 있어요.’

그러자 노인은 미간을 잠시 꿈틀거렸고 내가 들고 있는 망원경을 뺏어들었다. 그리고 그쪽 한참동안 바라보더니 이내 숨을 훅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제스처가 신호란 걸 눈치 챈 용팔이는 서둘러 두식이를 깨웠다.

‘일단 지나가만 보자.’

부랑자들에 함정 때문일까? 노인은 유난히 조심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나도 일단 조심해선 나쁠 것 없다는 생각에 조용히 수긍하고 장비를 챙겼다. 구조신호를 보냈다면 저들도 밖을 살피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방문까진 아니더라도 지나가는 기색정도는 보여줄 의사가 있었다. 저들이 도움을 원한다면……. 먼저 문을 열겠지.

우리는 장비를 챙기고 건물을 벗어났다.

* * * * * *

‘으! 형님…….’

내 뒤에서 용팔이가 앓는 소리를 낸다. 눈발이 약해졌다곤 하지만 시야가 흐려진 거리를 걷는다는 건 위험천만하기 그지없었다. 노인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사방을 둘러봤고 난 방향 감을 잃지 않기 위해 말을 아꼈다.

쉬이.

긴장감으로 점철된 신경이 갑작스레 경계신호를 보내온다. 시각은 눈보라 사이로 어두운 인영을 포착하고 바람소리에 익숙해진 청각은 갑작스런 이질감에 찌르르 울린다. 내가 자리에 쭈그리고 앉자 내 뒤를 따라오던 일행들도 모두 자세를 숙였다.

난 한참을 정면을 바라봤고 이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앞에 두 마리.’

그 소리를 시작으로 일행들이 분주하게 움직였고 격하게 불어오는 바람소리 사이로 크로스 보우의 시위를 당기는 소리가 천천히 울려왔다. 정면에 보이는 그놈들과의 거리는 대략 50m 그리고 그 근방 100m에는 지구대가 있었다.

‘우회할 길은?’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노인이 조용히 속삭였다. 날씨가 좋다면 모를까 이런 눈이 오는 날에는 싸우는 게 녹록치 않았다. 그것을 알고 있는 노인은 싸움이 아닌 회피할 방법을 찾았고 난 그 물음에 고개를 흔들어야했다.

‘없습니다.’

골목이 없는 큰길이다. 그리고 지구대가 그 큰길 끝에 붙어있었다. 물론 빙 둘러간다면 우회할 길이 있겠지만 그것은 시간과 동선낭비다. 더군다나 그 길로 간다고 해도 그놈들을 안 만난다는 보장이 없었다. 여기서 처리하고 지나가야 한다.

‘왜이리 대가리를 흔들어…….’

크로스 보우를 들어 올리던 노인이 혀를 차며 눈을 가늘게 뜬다. 그놈들은 평소 해가 떠있는 시간이면 정말 아무 짓도 안하고 가만히 서있기만 한다. 그러다 소리가 들리면 움직이는 수동적인 그놈들이지만 눈이 오는 날은 이상하게 행동이 달랐다.

내 일기에도 몇 번 기록을 한 적이 있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멍하니 바라본다거나 혹은 그것을 잡기위해 지랄 발광하는 놈들. 평소 모두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던 그놈들도 눈이 오는 날이면 꼭 개성이란 것이 생긴 것처럼 행동양상이 다양했다.

그리고 앞에 두 놈은 가만히 있는 타입이 아니었다.

마치 목각인형처럼 고개를 꺾으며 철판을 긁는 소리를 내지른다. 그것은 분노인지 혹은 눈에 대한 호기심인지는 모르겠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을 끼치게 할 정도로 이질적인 행동이었다. 목이 비정상적인 각도로 꺾일 때 뒤에 있던 용팔이가 움찔한다.

‘……시발, 가서 처리하자.’

한참을 조준하던 노인은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흐린 시야와 불규칙적인 움직임 때문에 크로스 보우로 처리하는걸 포기한 모양이었다. 노인은 그 자리에 크로스 보우를 내려놓고 용팔이가 들고 있는 총과 대검을 뺏어들었다.

그리고 나를 가리키며 손짓하고 용팔이 형제는 이곳에 대기하란 신호를 보냈다. 두 마리는 우리 두 명이면 충분했다. 괜히 많은 인원이 몰려가면 동선만 방해되고 위험하다. 난 노인을 따라 크로스 보우를 내려놓고 매고 있던 총을 들어올렸다.

대검이 날카롭게 빛난다. 목표를 정한 이상 신속한 행동만이 필요했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착검한 총을 앞세우고 빠르게 양 옆으로 흩어졌다. 나는 노인을 믿고 노인도 나를 믿는다. 우린 그렇게 서로에게 옆을 내주고 그놈 한 놈에게 붙기 시작했다.

눈이 시야를 방해한다. 그리고 바람소리는 청각마저 흐리게 만든다. 모든 신경에 노이즈가 낀 듯 어지러웠지만 오직 단 하나 내 머리에서 경종을 울리는 신경만은 너무나 날카롭게 그 빛을 발휘한다. 난 발을 박차고 내가 맡은 놈의 뒤로 재빠르게 달려간다.

‘…….’

그놈은 어깨와 목을 이리저리 꺾으며 내 발소리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 뒤에서 확실히 소리가 들린다고 판단했는지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재빠르게 몸을 돌렸다. 하지만 난 그놈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개머리판이 그대로 그놈 머리에 작렬한다. 뼈가 으스러지는 감촉과 함께 그놈의 썩은 코가 뭉개지고 날카로운 이빨이 튀어나온다. 난 그놈이 충격을 받은 직후 반격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다시 한 번 개머리판을 내질렀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정확히 미간 사이에 꽂힌 개머리판은 그놈에게 결정적인 데미지를 주었다. 피가 튀기고 얼굴 형체가 곤죽이 된 그놈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흐릿한 눈알은 밖으로 튀어나왔고 경직되었던 몸은 어느새 흐느적거린다.

난 그대로 발을 들어 올려 그놈 복부를 걷어찼고 동시에 총을 앞으로 돌려 대검을 내세웠다. 노인 쪽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로 보아 벌써 일을 끝마친 모양이었다. 나는 서둘러 숨통을 끊기 위해 바닥에 자빠진 그놈 곁으로 다가가 총을 치켜들었다.

‘…….’

그리고 힘차게 내려찍으려는 그 순간 난 그 자세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이아…….아……내……이아……아이…….’

뭐?

뭐라고?

그놈의 주둥이가 열렸고 난 끔찍한 괴음을 예상했다. 하지만 그놈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괴음도 아니고 소름끼치는 울부짖음도 아니었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거지? 아니, 왜? 도대체 왜 말을 하는 거지?

‘정신 차려,’

노인의 목소리가 굳어있는 내 신경을 깨웠다. 그리고 동시에 노인이 내지른 날카로운 대검이 그놈 미간을 꿰뚫었고 그놈은 몸을 바동거리다 천천히 움직임을 멈췄다. 그놈이 절명하자 난 손 안에 고여 있는 식은땀을 바지에 닦으며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환청? 아니, 도대체 뭐였지?

‘왜 그래 인마!’

노인은 정신이 빠져있는 나를 탓하며 내 어깨를 강하게 쳤다. 멀쩡하게 달려가던 놈이 갑자기 멍하니 정신을 빼놓자 당황한 모양이었다. 난 마른 목구녕에 침을 급하게 밀어 넣고 떨리는 목소리로 노인에게 물었다.

‘혹시 못 들으셨습니까?’

‘뭘?’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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