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79화 (79/313)

[79] (9월 25일자입니다.)

‘좋은 시절 다갔네.’

노인이 광이 반짝반짝 나는 새 워커를 신으며 투덜거리기 시작한다. 물론 말과는 다르게 얼굴에는 흐뭇한 웃음을 머금고 워커에 기가 막힌 광을 내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나는 새것과 다름없는 장비들을 챙기며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어젯밤 부랑자 전담팀이 꾸려졌다. 노인은 그 자리에 있었기에 바로 참가의사를 밝혔고 용팔이 형제는 그 후에 직접 이야기를 나눴다. 물론 용팔이 형제 처음에 망설이는 기색을 보여줬지만 이내 거부할 수 없는 제안 앞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각자의 소중한 이들과 일행들을 위해 거리낌 없이 일선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지금은 늦은 일기를 쓰면서 어제 일을 잠시 회상해본다.

단체장은 겉모습과는 다르게 성격이 급한 사람이었다. 단체장이 내린 신속한 명령에 우리는 회의가 끝나자마자 급하게 숙소를 옮겨야 했고 일행들은 갑작스런 이동에 당황해 했지만 내가 별다른 말이 없자 군소리 없이 나를 따라나섰다.

우리가 익숙한 길을 걸어 배정받은 숙소 건물은 무려 단체장이 거주하는 본관 건물이었다. 복도마다 은은한 조명이 들어오고 있었고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경비들이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그 삼엄한 경계는 부담스럽기도 하면서 동시에 든든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에는 1층에 있는 숙소를 두개만 배정을 받았는데 그마저도 방이 많아 차고 넘쳤다. 캐어가 필요한 아이들과 여자들을 한방에 재우고 새벽 일찍 일어나거나 외출이 잦은 남자들이 다른 한방에서 자기로 결정했다.

공용 샤워장이 아닌 숙소에서 몸을 씻을 수 있게 개인욕실도 있었으며 심지어 전기를 덜 먹는 작은 냉장고까지 구비되었었다. 물론 종말전과 비교하면 그저 그런 시설이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거의 스위트룸과 다름없었다.

여자들은 갑작스레 바뀐 숙소 분위기에 잠시 쭈뼛 거렸지만 이내 시설들이 신기한지 이리저리 구경하기 바빴다. 그리고 아이들은 어색함 따윈 벌써 버렸다는 듯 침대위에서 방방 뛰기 시작했고 결국 노인에게 한소리씩 듣고 잠자리에 들었다.

상념은 여기까지가 끝이었다.

난 신발 끈을 동여매며 소소한 행복의 기억을 되새김질 했다. 뼈와 살이 내 몸을 이루는 근원이라면 이런 기억은 내 정신을 온전하게 이어주는 받침목이었다. 행복한 기억에 빠질 때 나를 옥죄여오는 긴장감도 무서움도 그 순간만큼은 전부 사라져버린다.

오늘도 무사히.

난 조용히 읊조리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고개를 들자 노인과 용팔이 형제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고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음을 옮겼다.

* * * * * *

짧은 시간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항상 정문에서 떼를 이루던 탐색조들은 사라졌고 그녀가 인상을 찡그리며 앉아있던 의자도 사라졌다. 그리고 항상 그 자리를 지키던 텐트 막사도 오늘은 그 모습을 감춰버렸다.

‘아침부터 수고 많으십니다.’

오늘은 김혜정 대신 은테안경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녀는 어디로 가게 됐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지만 이내 빠르게 털어 내버렸다. 은테 안경은 잠시 우리의 복장을 살펴보더니 경비 초소 쪽을 향해 크게 손짓했다.

그러자 경비 초소의 문이 열리고 두 명의 남자가 큰 가방을 들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은테 안경은 안경을 한번 추켜올렸고 이내 가져온 가방을 받아들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지퍼를 열어 안을 확인해보니 뜻밖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총이네?’

노인이 입맛을 다시며 가방 앞에 조용히 쭈그려 앉았다. 탐색조에 한 자루씩 지급하던 낡은 카빈이나 경찰용 리볼버가 아닌 우리나라 표준규격인 소총이었다. 관리도 잘했는지 상태도 괜찮아보였고 무엇보다 탄약이 생각보다 많았다.

김혜정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장비.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녀가 떠나게 되자 우리는 제대로 된 총들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노인과 나의 반응은 영 아니올시다였다. 물론 총은 충분히 위협적인 무기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협적인 무기가 아닌 조용한 무기였다.

일기에 수십 번 기록했듯이 소음을 동반하는 총을 사용하는 건 자살행위와 같았다. 우리가 왜 크로스 보우를 발견하고 그토록 기쁨에 젖었단 말인가? 내가 애증과 같은 시선으로 총을 바라보자 은테 안경은 조금 당황한 얼굴로 우리에게 말했다.

‘혹시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시다시피 한국은…….’

‘아닙니다.’

나는 조용히 은테 안경의 말을 끊고 가방 속에 총 두 자루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한 자루는 대검을 착검해 용팔이에게 내밀었고 나머지 한 자루는 내가 챙겼다. 총을 쓸 일은 없다시피 하겠지만 그렇다고 총 자체가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겨누는 것만으로 총을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까?’

내 질문은 많은 내용을 함축하고 있었다. 말로는 우리 마음대로 하라고 하지만 혹시 나중에라도 말이 바뀔지 모르는 일이었다. 우리들이 완전히 개별적인 활동을 펼쳐도 되는지 그리고 또 다른 제약이 없는 것인지 이 자리에서 정확히 알고 싶었다.

‘단체장님이 모든 판단은 동윤씨가 하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은테 안경은 확신이 있어 보이는 목소리로 대답했고 나는 그런 은테 안경과 눈을 마주치며 한참을 서 있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은테 안경과 총을 가져왔던 경비들은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며 정문에서 천천히 멀어졌다.

나는 내 손에 들린 무전기를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정문을 바라보자 초소에 있는 경비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누군가를 거치지 않고도 저 문을 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몸을 천천히 예열시키고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그리고 내가 무전기를 켜는 순간 저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잠시 만요!’

풍선을 한계까지 불다 펑 터진 기분이었다. 우리는 긴장감이 훅 하고 빠져나가는걸 느끼며 조금 짜증이 섞인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그곳에는 평소와 복장이 다른 김혜정이 황급히 이곳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몸에 딱 달라붙는 활동복. 그리고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장갑과 질긴 워커까지 제대로 신었다. 그리고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소총에 착검까지 제대로 한 그녀는 금방이라도 출발이 가능한 완전무장 상태였다. 그녀는 우리 앞에 도착하자마자 거친 숨을 내뱉으며 숨을 골랐다.

‘왜 그러십니까?’

난 그녀가 이런 무장을 마치고 나를 부른 이유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녀가 이끌던 탐색조는 어젯밤 해산했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다른 인선에 배치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꼭 탐색조 활동을 시작할 사람처럼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숨을 다 고른 그녀는 황급히 말을 꺼내려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꾹 다물었는데 그 모습이 평소 그녀의 모습과 달라 분위기가 상당히 어색해졌다. 난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그녀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우리 출발해야 됩니다.’

내 매몰찬 반응에 그녀는 눈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숨을 훅 내뱉더니 머리를 가리고 있는 두건을 꽉 동여맨다. 두건 아래로 보이는 눈동자는 굳세고 뚜렷한 신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도 팀에 넣어주세요.’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다. 우린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말없이 그녀를 가만히 쳐다만 봤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정신을 차린 내가 가장먼저 고개를 흔들었고 내 옆에 있던 노인도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 돼.’

‘……네?’

그녀는 마치 거절당할 줄은 몰랐다는 듯 멍한 얼굴로 노인을 바라본다. 그리고 어버버 말을 더듬더니 무언가 강하게 항의를 하며 자신을 어필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총이 눈앞에서 어수선하게 움직인다.

‘저, 저! 이래봬도 부사관 제대했어요! 총도 쏠 줄 알고요. 그리고…….’

한참을 떠들던 그녀는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아니 어쩌면 우리와 자기 사이에 놓여있는 작은 유리벽을 발견한 걸지도 모른다. 그녀는 유리를 통해 우리를 바라볼 순 있지만 손을 뻗어 우리와 맞닿을 순 없었다.

그녀와의 거리는 1m. 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거리는 더 멀었다.

물론 그녀의 능력은 뛰어났다. 처음에는 까칠한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후에 태도의 변화를 보여주는 유연함도 가지고 있었다. 또 동료를 위한 신의도 있었고 팀에 대한 책임감도 있었다. 그날 어린 남자를 때리며 보여줬던 분노는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나와 노인 사이에 있는 그것, 그리고 용팔이 형제와 우리 사이에 있는 그것이 그녀에겐 없었다. 그녀는 어쩌면 우리를 단순한 팀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단순한 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등이 비어도 그곳에 일행이 있을 것이란 믿음. 죽음과 죽음을 넘어 모래알처럼 축적되는 유대감. 이것은 우정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다. 그리고 전우애라고 표현하기엔 너무나 건조했지만 그렇다고 바람에 쉽게 휘날리진 않았다.

그 무언가는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결속이었다.

그녀는 내 눈에서 확신을 읽었다. 그렇기에 말을 이어가지 못한 채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리고 만다. 그녀의 워커와 장비는 광이 났고 총은 훌륭하게 관리되어 깨끗하기 그지없었다. 어쩌면 밤새 이 순간을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 매몰차게 그녀를 거절했다. 이것은 애들 장난이 아니다, 또한 좋은 동료가 서로를 만나는 아름다운 동화도 아니었다. 그저 이 일기장에 기록되는 잔혹사, 비정한 현실에 한가운데였다. 난 고개를 돌려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팀 채연 출발합니다.’

무전기에선 복창 소리와 함께 감시탑에 경비들이 황급히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신호를 받은 다른 경비들이 어딘가로 급하게 뛰어갔고 이내 육중한 소리와 함께 정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눈이 온다.

용팔이는 김혜정이 계속 신경 쓰이는지 정문으로 걸어가는 내내 뒤를 돌아봤다. 난 그런 용팔이를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계속 그 자리에 있냐?’

신경이 쓰이지만 정작 뒤돌아보기는 조금 미안했다. 그래서 용팔이에게 조용히 물어봤고 곁눈질을 치던 용팔이는 다시 뒤를 돌아보더니 이내 아무것도 아닌 척 앞을 바라봤다. 그리고 나를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그 자리 그대로 서있어요.’

노인이 피식 웃는다.

‘동윤이한테 차였네.’

내가 팔꿈치로 허리를 찌르자 노인이 조용히 자리를 피한다. 그리고 정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우리는 에덴을 완전히 벗어났다. 걸음을 걷던 내가 가방에서 지도를 꺼내들고 잠시 생각에 빠지는데 근처에 있던 노인이 나에게 지나가는 말을 툭 내뱉었다.

‘인원이 더 있어야해.’

나는 노인의 말을 못 들은 척 지도에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지도를 보고 있는 와중에도 귓속을 맴도는 노인의 말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부랑자 전담팀을 맡은 이상 인원보충은 피할 수 없는 과제 중 하나였다. 날고 긴다고 해도 우리는 겨우 4명에 불과했고 이런 소규모 팀으로는 언젠간 한계가 있다.

사실 새로운 팀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김혜정 그녀가 가장 유력한 후보일 것이다. 일단 스스로가 합류 의사를 밝혔다는 게 가장 큰 요인이었고 그녀의 능력 또한 꽤나 출중했기 때문이다. 분명 우리와 같이 팀을 이룬다면 든든한 팀원으로 성장해줄 것이다.

하지만 망설임, 그 망설임이 나를 붙잡았다. 그 정체는 마치 안개 속에 꼭꼭 숨겨진 불안감마냥 내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다. 노인도 내 망설임을 알기에 아무렇지 않은 척 나에게 의중을 툭 던지는 것이었다.

나는 지도를 접었다. 막상 생각을 하려니 머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이럴 때는 목표를 잡고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전진하는 게 좋다. 내가 지도를 접자 나를 바라보던 노인이 조심히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그래서 생각해둔 곳은 있고?’

‘네.’

부랑자 전담. 말은 좋았지 당장은 막막한 게 사실이었다. 정체를 알아야 찾아가고 눈앞에 있어야 싸울 것 아닌가? 얼굴 가죽에 부랑자라고 쓰고 다니지 않는 이상 그들을 찾는다는 건 해수욕장 모래에서 유리조각을 찾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실마리가 필요하다. 사방으로 흩어진 로직을 이어줄 작은 실마리. 나는 크로스 보우를 앞에 들고 지정해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행들은 나를 따라가는 게 당연한 것처럼 조용히 입을 다물고 내 뒤를 따라온다.

쉘터는 에덴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어젯밤 나는 망해버린 소율 여상을 포함해 에덴과 교류하고 있는 쉘터 위치를 모두 파악했다. 간혹 연락이 닿는 쉘터는 4곳, 그리고 연락이 되지 않는 쉘터로는 2곳이 있었다.

부랑자가 도시 곳곳에 넓게 분포되어 있는 이상 다른 쉘터에도 피해자가 있을 것이다. 모든 고통과 두려움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상흔을 남긴다. 나는 그 상흔 속에서 부랑자들에 대한 흔적을 하나도 남김없이 긁어모을 생각이다.

조금 긴 여행이 되겠지만 내 걸음은 결코 무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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