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74화 (74/313)

[74]

새벽같이 일어나 노인과 함께 배급소로 향했다. 그날 은테 안경이 줬던 식권과 탐색조 활동을 끝내고 받은 식권을 합치니 100장을 훌쩍 넘겼다. 하지만 이상하게 돈이 많아진 기분은 아니었다. 아, 그냥 이만큼 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 정도?

주머니에 손을 찔러놓고 느릿느릿 배급소로 향했다. 그리고 배급소에 도착해보니 줄을 서있는 사람들은커녕 배급소 문조차 열리지 않았다. 너무 일찍 온 걸까? 난 노인과 함께 문이 닫힌 배급소 옆에 쭈그려 앉아 천천히 입김을 내뱉었다.

어젯밤은 일행들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물론 여자들과 아이들은 한껏 들떠 있었지만 탐색조 활동을 다녀온 남자들이 우울해하는 모습을 보인 탓에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다운되었다. 특히 할머니의 시체와 남자의 뼈를 병원으로 인도했을 때가 더욱 그랬다.

나조차도 기분이 좋지 않았기에 저녁을 거르고 내 방으로 들어가 보고서를 작성했다. 내가 밥을 먹지 않으니 일행들도 따로 배급을 받으러 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난 그것이 너무 미안했기에 새벽같이 일어나 배급소로 오게 된 것이다.

담배연기처럼 흩어지는 입김 사이로 여명이 솟아오른다. 인간은 갈수록 줄어들었지만 하늘은 그만큼 깨끗해진다. 난 그런 깨끗한 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회색 도시의 바퀴벌레들, 오늘도 뽈뽈뽈 기어 다닐 준비를 마친다.

배급소 문이 열렸다. 그리고 피곤해 보이는 아줌마들이 무언가를 분주하게 옮기기 시작했다. 우린 그런 아줌마들을 바라보며 동시에 주변을 살폈다. 그날 우리에게 시비를 걸었던 무리들은 오지 않을 걸까?

한참을 주위를 훑었지만 배급을 시작할 때까지 그놈들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난 쓸모없는 분쟁을 안 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고 노인은 반대로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허리를 쿡 찔러주니 금세 표정을 바꾼다.

‘아이고, 일찍들 오셨네.’

배급소에서 통을 들고 나온 한 아주머니가 밝게 인사를 건넸다. 얼굴은 피곤으로 찌들어 있었지만 밝게 인사하는 모습에서 작은 정감을 느낀다. 나는 인원수와 맞게 챙겨온 식권을 아주머니에게 건네고 배급을 받았다.

배급은 생각보다 형편없었다. 한 사람당 감자 두 알과 건더기가 거의 없는 된장국. 물론 지금 같은 상황에선 이것조차 못 먹는 사람이 수두룩했지만 마트에서 먹던 식품과 비교하면 아쉬운 게 사실이었다. 그리고 한참 성장기인 아이들을 생각하니 거부감마저 들었다.

혹시 점심 저녁도 이렇게 초라할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배급을 나눠주는 아줌마에게 물어보니 아줌마는 절대 그렇지 않다는 듯 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식량을 아끼기 위해 하루에 한번은 이런 식으로 배급하고 식권 한 장에 두 명이 먹을 수 있게 조절한다고 말해왔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일단 점심과 저녁 메뉴를 보고 생각을 하기로 했다. 내 아이, 내 일행들만큼은 좋은 음식을 먹이고 싶었다. 배급대신 식재료를 얻어 조리를 해먹거나 마트에서 따로 음식들을 챙겨와야 할지도 모른다.

난 감자 두알을 주머니에 넣고 노인을 먼저 숙소로 보냈다. 아직 일하기에는 이른 시각이지만 어제 쓴 보고서를 위해 남들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야했다. 노인은 음식들이 무겁다며 툴툴 거렸지만 이내 숙소를 향해 걸어갔다.

난 손에 느껴지는 따뜻한 감자의 감촉을 어루만지며 멀어지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 * * * *

배급소 옆에 마련되어 있던 텐트는 이른 시각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텐트 앞에는 나무 장작이 들어있는 드럼통이 불타고 있었는데 난 빠르게 그곳으로 다가가 얼어붙은 몸을 녹였다. 그리고 그 순간 텐트 문이 열리며 김혜정이 걸어 나왔다.

‘……일찍 오셨네요?’

난 부스스한 뒷머리를 긁적이며 챙겨온 보고서를 가방에서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김혜정에게 건네며 같이 꺼낸 감자 한 알을 야금야금 씹어 먹었다. 아직도 따뜻한 감자는 공복과 만나 혀 위에서 맛있게 부셔진다.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김혜정이 보고서를 받은 그 자리에서 읽어보는 모양이었다. 사실 보고서를 쓰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냥 지금 쓰는 일기처럼 무슨 일이 있었고 결과가 어땠는지, 그리고 내 주관적인 생각은 어떠한지 그냥 생각나는 대로 세세하게 적었다.

내가 감자를 먹는 내내 그녀는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감탄사를 내뱉으며 내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장난을 치는 건가 싶어서 힐끔 그곳을 바라봤지만 그녀는 비장한 얼굴로 진지하게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감자를 다 먹을 때쯤 그녀는 보고서를 반으로 접었다.

‘정말 군인이세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자 그녀는 피곤한 하품을 내뱉으며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불을 쬐기 시작했다. 난 갑자기 다가오는 그녀가 부담스러워 옆으로 슬금슬금 물러났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면담 내용이랑 일치하네요. 수고 많으셨어요.’

면담? 우리에게 했던 것처럼 그 가족과도 따로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어젯밤부터 신경 쓰이던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자 저절로 관심이 동했던 나는 무심한척 무표정을 유지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상태는 좀 어떻습니까?’

내 물음에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쉰다. 그리고 씁쓸한 얼굴로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조용히 읊조린다.

‘심각하죠. 특히 정신적인 부분이…….’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손을 천천히 비볐다. 당시 상황을 직접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존된 현장을 목격한 나로서는 그때 당시의 상황이 어땠는지 대략 예상은 할 수 있었다. 아직도 살점이 묻어있는 뼈가 잊히지 않는다.

이겨내라는 말을 해줄 수는 없었다. 상처는 흉터를 남기고 절망은 잔재를 남긴다. 그 잔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다만……. 그저 그걸 안고라도 살아가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주머니에 남아있던 감자를 입안에 욱여넣었다. 그리고 크게 숨을 훅 내뱉으며 머릿속에 남은 상념은 떨쳐낸다. 곧 있으면 노인이 약속한 장소로 나올 것이다. 내 장비와 무기들을 챙기고 오늘 하루도 탐색을 시작할 예정이다.

난 김혜정을 향해 작게 눈인사를 건네고 천천히 불 앞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멀어지는 나를 조용히 지켜보던 김혜정이 나를 조용히 불러 세웠다.

‘저기요.’

‘네?’

난 걸다말고 그녀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니 그녀가 어제부터 보여줬던 태도변화가 단순히 변심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항상 찡그리고 있던 미간을 풀며 나에게 말했다.

‘까칠하게 굴어서 미안했어요.’

나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도 자신이 까칠하게 굴었던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이유가 단순한 텃세인지 아니면 불신인지는 몰랐지만 코딱지만큼도 신경 쓰지 않던 나는 순수하게 그녀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녀가 유능해 보이는 것도 있고……. 일단 탐색조 팀장이란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나쁠 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난 너무나 간단하게 사과를 받고 다시 뒤돌려는데 그녀가 나를 붙잡았다.

‘뒤돌아보지 말고 들어요. 어제 초소에서 당신 일행들에게 시비 걸던 남자 기억하세요?’

기억난다. 어울리지도 않는 선글라스를 쓰고 개똥 폼을 잡던 그 남자. 상태가 좋지 않은 생존자 앞에서 노골적인 시비를 걸던 그 남자를 생각하면 아직도 짜증과 분노가 샘솟는다. 그녀는 그를 언급하며 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저 남자 전투조 팀장이에요. 당신이 탐색조로 보이니까 시비부터 건거죠. 그러니까 저 사람 조심하세요. 알았죠?’

그녀는 연신 내 뒤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뒤돌아보지 말라는 이유가 내 뒤에 있는 감시탑에 그놈이 있는 모양이었다. 난 눈치껏 딴청을 태우며 그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이유가 있습니까?’

당연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단순히 전투조 팀장이란 이유로 나에게 시비를 걸 이유는 없다. 모종의 사건이 있었거나 혹은 그녀가 보여줬던 반응처럼 탐색조와 전투조의 사이가 좋지 않다거나. 그녀는 표정을 굳히며 대답했다.

‘알력다툼이죠 뭐……. 한번 밀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이 꼴이 난거구요.’

그녀는 말없이 허름한 텐트를 가리켰다. 나는 그 텐트를 바라보며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는 탐색조 인원들도 살펴보았다. 허름한 복장과 빈약한 무기. 근처에서 보초를 서는 전투조와 비교하면 한참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이건 악순환이다. 빈약한 장비와 훈련받지 못한 인원은 결국 작전의 실패를 초래한다. 그리고 실패는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왜 그렇게 생환율이 낮았는지, 그리고 그녀가 왜 그런 태도를 보였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단체장은 알고 있습니까?’

짧은 기간 동안 지켜봤던 단체장은 교리를 맹신하는 종교인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탐색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고 나를 영입하기위해 힘썼던 것이다. 하지만 포장지를 뜯어보니 상황은 좋지 않았다.

조잡한 장비와 낮은 생환율 탐색조가 당장 해체당해도 이상하지 않는 상황. 왜 단체장은 눈에 보이는 차별을 방치하고 있는 걸까? 그러자 그녀는 내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눈에 띄게 어두워진 얼굴로 대답했다.

‘모르고 계세요. 단체장님이 좋은 분은 맞는데……. 동시에 바쁘신 분이죠.’

난 지금의 상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에덴도 결국 사람이 모였던 곳이고 사람이 모인 곳은 대부분 비슷했다. 직장 상사가 모르는 파벌싸움, 탐색조와 전투조는 단체장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속된 신경전속에서 전투조와 탐색조는 단체장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었고 나는 단체장이 왜 우리를 그토록 원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회의할 때마다 말이 많아요. 탐색조가 없어져야 한다느니……. 전투조가 그 일을 대신 해야 한다느니……. 어, 어? 어디가세요? 저기요?’

난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빠르게 자리를 옮겼다. 모든 상황을 이해하자 흩어졌던 퍼즐들이 제자리를 찾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불안감과 함께 나를 신경 쓰이게 만들던 미지의 문제점들이 깨끗하게 사라져버렸다.

정해진 목표가 내 가슴속에 확고한 못을 박는다.

채연이의 얼굴이 너무나 밝아졌다. 그리고 이제 나를 아빠라고 부르며 의사표현까지 정확히 하기 시작했다. 또래 아이들과의 단체생활과 어제부터 시작한 정신과 치료가 벌써부터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 기쁘고, 너무 설렜다.

채연이의 치료는 지속되어야한다. 그러기 위해선 에덴의 학교와 병원이 꼭 필요했고 그 혜택을 받기위해선 난 약속한 대가를 단체장에서 보여줘야 했다. 모든 의문이 해결되자 단체장이 나에게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수면위로 드러났다.

난 고개를 들어 보초에서 나를 노려보는 전투조 팀장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인상을 굳히며 무전기를 들었고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저 새끼 어제 그 새끼 맞지?’

거친 욕설이 들려왔다.

노인의 목소리였다.

노인은 약속한 시간보다 빨리 도착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용팔이와 두식이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는데 죽을상이던 얼굴과 분위기는 밤사이 많이 좋아져 있었다. 다들 자신만의 방식대로 충격을 떨쳐내고 오늘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 옆으로 다가온 노인은 내 장비들을 내밀었다. 난 익숙하게 그것을 받아들고 그 자리에서 무장을 시작했다. 살벌하게 날이 갈린 대검이 내 얼굴을 비추고 내 긴장감마저 머금는다. 싸늘함으로 달궈진 대검을 허벅지에 채운다.

‘채연이는요?’

‘밥 먹이고 학교 보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제 채연이가 그려줬던 그림을 일기장 사이에서 빼내 펼쳐보았다. 위풍당당하고 잘생긴 영웅. 이 그림 속에 남자는 약자를 구하는 강한 슈퍼맨이었다. 하지만 대검에 거울처럼 비춰지는 남자는 수염투성이에 약해빠진 남자일 뿐이었다.

그림과 거울은 이면처럼 서로를 마주한다.

난 씁쓸한 침을 삼키며 그 이면을 다시 품속에 넣었다.

크로스 보우를 들자 송곳처럼 튀어나온 날카로운 신경이 나태함과 편안함을 찢어발긴다. 팔과 다리 근육은 팽창하기 시작했고 속에선 뜨거운 공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난 예열된 엔진처럼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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