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일기를 쓰다 잠이 들었다. 배에 느껴지는 묵직함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는데 눈을 떠보니 채연이가 보였다. 채연이는 분명 내 배위에 올라와 있었고 내가 눈을 뜨자 깜짝 놀란다. 그 모습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튀어나와 채연이랑 같이 웃고 말았다.
아침인가보다. 벌써부터 밖은 소란스러웠다. 난 졸린 눈을 비비며 내 팔에 안겨오는 채연이를 안아 올렸다. 오랜만에 깨끗한 솜이불과 푹신한 침대에서 잠을 자니 묵혀있던 피로가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난 개운한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천천히 현관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신발을 신고 종종걸음을 뛰는 강수련이 보였다. 내가 살며시 손을 들어 올리자 강수련은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다가온다. 모든 게 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잠결에 들 만큼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잘 잤어요?’
아침햇살 때문일까? 유난히 강수련이 환하게 빛났다. 비록 그놈들 때문에 머리가 짧게 잘렸지만 그것은 조금의 흠조차 되지 않았다. 그녀는 겉모습보단 마음이 착하고 예쁜 여자였으니까. 내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여명 같은 웃음을 머금었다.
‘우리 밥먹으러가요. 공용식당이 따로 있다고 들었어요.’
역시 배급인걸까? 난 부스스한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멀리선 아이들이 까르륵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보니 내 옆에 안겨있던 채연이도 어느새 사라져 있었는데 아마 아이들에게 간 게 아닌가 싶었다.
섭섭하진 않았다. 그냥 채연이가 큰 탈 없이 아이들과 어울려 노니 다행이란 생각부터 들었다. 내가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동윤아 일어났냐?’
노인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는데 목에는 수건을 매달고 있었다. 설마 영감님 조깅 하신 겁니까? 하고 물었더니 노인이 너무나 담담하게 어. 라고 대답했다. 내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노인을 탓하는데 노인은 말없이 길가를 가리켰다.
사람들이 너무나 태연하게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나는 멍하니 몸을 굳혔다. 길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밥을 먹으러 가거나 업무를 보러 가는지 깨끗한 평상복을 입은 상태였다. 다시는 못 볼 것 같던 풍경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순간 내 머리를 딱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정신이 반짝 들어 황급하게 뒤를 돌아봤고 그곳에는 노인이 히죽 웃으며 손을 들고 있었다. 난 맞은 부위를 긁적이며 벌려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노인이 나를 향해 말했다.
‘그나저나 이놈은 노인공경이 없네?’
* * * * * *
일어날 기미가 없는 용팔이와 두식이를 발로 차 깨우고 공용식당으로 향했다. 공용식당은 주거지역 근처에 있었는데 각 사람마다 지정된 식당이 있었다. 어찌되었든 우리 근방에 사는 주민들은 다 이곳으로 모였는지 사람이 아주 바글바글 했다.
사람이 많은 만큼 무질서를 걱정했지만 에덴의 주민들은 배급을 한두 번 받아본 게 아닌지 줄도 잘 서고 질서도 잘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고요함은 음식에 대한 엄숙함마저 느껴졌다.
난 채연이를 안아들고 그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조용히 속삭였다. 채연아 이게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질서라는 거야. 강자가 앞이고 약자가 뒤에서야 하는 종말의 무질서가 아닌 모두가 같이 줄을 서는 인간의 질서.
채연이는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들은 건지 모를 표정으로 내 손가락을 꼭 잡았다. 난 피식 웃으며 채연이를 내려놓았다.
배급 속도가 빠른 만큼 줄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10분정도가 지나자 우리 차례가 되었고 내 눈앞에 가장먼저 보이는 건 음식이 아닌 식판이었다. 식판으로 배급을 받나? 하는 생각과 함께 손을 뻗어 식판을 잡으려는 순간 한 남성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이봐 형씨! 식권 내야지.’
식권?
식권 없는데? 난 은테 남성에게 따로 들은바가 없었다. 더군다나 배급을 처음 받아봤기에 식권이란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살며시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고 이내 사람들손에 들린 종이 한 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저것이 식권인 것 같았다.
‘……식권이란 게 꼭 필요합니까?’
난 정말 몰라서 물었다. 하지만 내 앞에 있는 남성은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인상을 험악하게 찡그리더니 누군가를 부르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자 이곳저곳에서 덩치 큰 남성들이 걸어오기 시작했다.
다들 팔에 노란 완장을 차고 있었는데, 아마 배급소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싶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험악해졌고 주민들은 서서히 몸을 피하기 시작했다.
‘형씨는 어디 출신인데 식권을 모르실까? 식권이 없으면 집에 가야지.’
덩치 큰 남성들이 걸어오자 일행들은 본능처럼 뭉치기 시작했다. 노인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혀를 찼고 용팔이 형제와 털보는 자연스럽게 일행들을 뒤로 숨겼다. 난 다시 한 번 침착하게 대응했다.
‘저희가 어제 와서 잘 모릅니다. 혹시 책임자 없습니까?’
‘책임자? 아니 우리 조장님이 그렇게 한가로워 보이나?’
혹시 시비를 거는 걸까? 이상하게 대화가 통하지 않는 남성을 바라보며 난 기분이 가라앉는걸 느꼈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했던 행동을 되새겨보며 분쟁의 요소가 없는지 생각해봤다. 하지만 아무리 과정을 살펴봐도 그가 우리에게 시비를 걸 이유는 없었다.
채연이가 겁에 질렸는지 나에게 달려와 안아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채연이를 본 나는 흥분했던 가슴이 조금씩 가라앉는걸 느꼈다. 쓸모없는 분쟁은 하지말자. 안타깝지만 아침은 건너뛰어야겠다.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며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건들거리던 남성은 자기들이 이겼다고 생각하는지 만족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물러나는 나와 채연이를 보며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당신 같은 사람이 하루에 몇 명이나 있는 줄 알아? 딸이랑 같이 험한 꼴 당하기 싫으면 조용히 꺼져.’
사실 일기를 쓰는 지금도 이 과정이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마치 차단기가 내려가고 필라멘트가 터져버린 그 기분은 아무리 생각해도 달갑지 않았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이성이란 것은 자각 할 때는 난 이미 누군가에게 제지를 당하고 있었다.
고개를 살며시 돌리자 내 허리를 꽉 부여잡고 있는 용팔이가 보였고 그 오른쪽에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노인이 내 팔을 붙잡고 있었다. 내 손에는 무언가 묵직한 것이 들려 있었는데 그것은 날이 날카롭게 갈린 대검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대검을 항상 허리춤에 꽂아놓고 잠이 들었던 게. 마치 미친놈처럼 뛰어다니던 날도, 채연이와 같이 잠에든 날에도 난 항상 대검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마치 부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중히 대검을 챙기는 나는 뚜렷하지만 미약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뭉친 그 응어리는 남자가 채연이를 언급한 순간 팍 하고 터져 나왔다.
‘집어넣어.’
노인이 나를 달래며 조용히 속삭였다. 나는 손에 힘을 빼며 들고 있던 대검을 천천히 대검 집에 넣었다. 영감님, 제가 좀 이상한 것 같습니다. 난 그 말을 침과 함께 삼키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난 쿵쾅거리는 심장을 제어하기위해 노력했다.
눈앞에 남자는 얼굴이 퍼렇게 질려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칼을 꺼내들어 다가올 줄은 몰랐는지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주위 남성들도 살벌한 날붙이 앞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불안한 눈동자를 깜빡였다.
그 모습을 보라보던 노인은 용팔이를 향해 외쳤다.
‘용팔아 마트에서 가져온 음식 남아있냐’
내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용팔이는 노인의 물음에 깜짝 놀라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잠시 우물쭈물 거리더니 이내 격하게 머리를 끄덕이며 남은 통조림이 있다는 대답을 해왔다. 그러자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행들에게 말했다.
‘집에 가서 그거나 먹자.’
상황정리는 순식간에 이뤄졌다. 넋이 빠져있는 나를 대신해 노인이 일행들을 인솔했고 우리는 다시 숙소로 향했다. 하지만 노인은 아직도 볼일이 남았는지 걸음을 멈췄고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우리에게 시비를 걸던 남자에게 검지를 내밀며 중얼거렸다.
‘밖에서 마주치지 말자. 뒤지기 싫으면.’
진심이 담긴 경고였다.
* * * * * *
우리는 다시 같은 길을 걸으며 숙소로 돌아갔다. 물론 일행들은 걷는 내내 말이 없었고 조심히 내 눈치만을 살폈다. 그 눈치가 나에 대한 걱정이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나는 입을 다물고 묵묵히 걸었다.
그리고 우리가 숙소 앞에 도착할 무렵 저 멀리서 한 남자가 뛰어오고 있었다. 참 다급하게 뛰어오긴 하는데 달리기가 느려서 그런지 거리가 영 좁혀지지 않았다. 결국 숙소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남성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역시나 은테 안경이었다. 그는 아예 우리를 마크하기로 작정한 건지 수시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좀 급해보였는데,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은테 안경이 흘러내릴 만큼 열심히 뛰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은테 안경이 바쁘게 뛰어온 이유를 곧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은테 안경이 식권으로 보이는 종이뭉치를 손에 꼭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뒤에 서있던 용팔이가 오랜만에 맞는 소리를 했다.
‘……빨리도 오네.’
노인이 용팔이의 민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었다.
식권을 미리 말해주지 않은 은테 안경은 우리 앞에 도착하자마자 열심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울상을 지어 보인다. 은테 안경이 우리에게 배급소로 가자는 제안을 해왔지만 입맛이 사라진 나와 일행은 조용히 그 제안을 거절했다.
우리는 간단한 요기를 위해 아이들이 자던 방으로 향했다. 현관 앞에서 기다리겠다는 은테 안경을 혼자 세워놓기 그래서 그를 아침식사에 초대했다. 은테 안경은 얼굴에 송구함을 써놓고 조심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마트에서 챙겨온 식품은 꽤 많았다. 비록 한두 번 식사면 사라질 것들이었지만 아침을 때울 간단한 요기로는 충분했다. 난 파인애플 통조림을 뜯고 일회용 포크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조금 작은 목소리로 은테 안경에게 물었다.
‘식권 부족한 사람이 많습니까?’
초콜릿 바를 뜯어먹던 은테안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우리는 남녀불문, 나이 상관없이 하루에 3장씩 발급합니다.’
그런데 그 남성은 왜 그랬을까? 꼭 식권이 없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우리에게 과민반응을 보였다. 난 그 이유가 궁금했기에 아까 있었던 일을 숨김없이 은테 안경에게 말해줬다. 그러자 은테 안경은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에덴에선 식권이 화폐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식권을 가지고 물건을 교환하거나 상점에서 기호식품을 구매하죠. 각자 맡은 직무를 수행하면 추가로 지급하기는 하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은테안경은 살며시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입을 꾹 다물더니 남은 초콜릿 바를 입에 털어 넣었다. 난 더 이상 물어보지 않고 파인애플을 먹는 것에 집중했다. 더 듣지 않아도 그런 사람들이 왜 생기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은테안경은 할 말이 더 남았는지 초콜릿 바를 삼키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배급소 직원도 대응에 문제가 있군요. 제가 주의를 주겠습니다.’
난 통조림 국물을 마시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살며시 고개를 돌려 옥수수 콘을 퍼먹고 있는 노인을 바라봤다. 노인은 내 시선을 느끼지 못했는지 여전히 뚱한 얼굴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난 엄지로 노인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충분합니다.’
은테 안경은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 * * * * *
식사를 끝낸 은테 안경은 오늘 일정과 관련해 간단히 설명을 시작했다. 말이 길었는데 일단 요약하자면 이랬다.
성인이 아닌 아이들은 기본적인 교육과 함께 에덴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단체 생활을 하며 마치 평상시 학교처럼 교육을 받는데, 그 수업 중에는 지금 같은 상황에 필요한 생존 교육도 동반한다고 한다.
그리고 큰 충격을 받은 채연이와 어린 아이들을 위해 하루 30분씩 정신치료를 해준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난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쉴 수 있었다. 마음속에 얹힌 커다란 돌멩이 하나가 치워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른들은 심신이 멀쩡하다면 모두 정해진 일을 수행해야 했고 나와 노인 그리고 용팔이 형제는 약속한대로 탐색조로 빠졌다. 그리고 강수련과 김시은은 1:1 상담을 통해 적절한 일을 배분 받는다고 한다.
물론 털보는 탐색조에서 빠졌다. 이런 귀한 인재는 귀한 곳에서 바쁘게 굴려줘야 했다. 본인도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기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 바쁜 하루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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