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69화 (69/313)

[69]

‘……좋습니다.’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내 대답을 들은 단체장은 환하게 웃었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난 그의 손을 잡으며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그 숨에는 후련함과 일말의 불안감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노인 쪽으로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내 결정에 맡기겠다고 말하던 노인은 의자에 앉아 저 멀리 걸려있는 액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액자에는 단체장이 말하던 그들의 교리가 적혀 있었다. 노인은 그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난 단체장과 잡은 손을 살며시 놓으며 말했다.

‘소속감은 기대하진 마십쇼.’

나는 에덴이란 단체를 신뢰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봐왔던 에덴의 모습까지 부정하는 건 아니었다. 일행들이 그토록 바라던 일상의 복귀, 그리고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 선택은 불가피했다.

모든 건 채연이와 일행들을 위해서다. 신용과 불신 사이, 그리고 선과 악 사이. 난 회색으로 만들어진 안경을 쓰고 저들을 감시할 것이다. 과연 저 웃음 뒤에 감춰진 본모습이 천사일지, 악마일지는 내 총알이 떠난 그날에 판단할 것이다.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하신 결정이 많은 사람을 구할 거라는 건 잊지 말아주세요.’

‘……저는 그냥 일을 하는 겁니다.’

‘그걸 로도 충분합니다.’

그것으로 우리들의 대화는 끝이 났다. 서로가 서로에게서 원하는 것을 받고 이득을 취한다. 마치 비즈니스 관계처럼 건조하고 이상적이었다. 하지만 단체장은 그런 관계로도 충분히 만족하는지 너무나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고 주황색 황혼이 우리 발밑에 드리우고 있었다. 단체장은 호들갑을 떨며 우리를 방 밖으로 안내했고 일행들이 모여 있는 식당에는 모든 상황이 정리된 후였다.

일행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한곳에 둥글게 뭉쳐 방 밖으로 나오는 우리를 바라봤다. 이제 뭐해요? 나에게 쏟아지는 순수한 시선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우리가 모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단체장은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경비들도 단체장을 따라 사라졌고 이제 이 방에는 나와 일행들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조용히 일렁이는 커튼 사이로 너무나 예쁜 주황색 빛들이 흘러내렸다. 황혼은 우리의 평화를 축복해주었고 너무나 포근하게 쏟아져 내렸다.

나는 그 주황빛 별들을 바라보며 조금 감상에 젖었다. 그리고 반짝거리며 빛나는 일행들과 눈을 마주치며 조용히 속삭였다.

‘이곳에서 지내기로 했습니다.’

큰 소란은 없었다. 일행들은 그저 아 그렇구나. 하는 작은 반응을 보일뿐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내 입에서 자세한 설명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난 가장 중요한 일행들의 의사를 알아야 했다.

‘괜찮겠습니까?’

그러자 일행들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그 침묵은 곧 일행들 사이에서 튀어나온 조그마한 손에 의해 깨져버렸다. 나와 일행들은 빠르게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고 그곳에는 내가 신서울대에서 구출했던 오혜연이 손을 들고 있었다.

질문하려는 걸까? 손을 든 오혜연은 앞쪽으로 살며시 걸어왔고 입술을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모인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한참을 망설이던 오혜연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려는 질문을 시작했다.

‘그럼 아저씨랑 떨어져야 하나요?’

오혜연의 질문이 끝나자 일행들은 다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가 묻고 싶었던 질문인지 무언의 눈빛으로 나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난 피식 웃었고 노인도 머리를 긁적이며 하하 웃었다. 아이들은 그새 정이 들었는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아니, 다 같이 있을 거야.’

그러자 오혜연은 들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 * * * *

우리가 건물을 나왔을 때는 해가 지고 짙은 어둠이 깔려있었다. 낮에 활발한 모습을 보여주던 에덴 마치 이면의 세계로 들어온 듯 침묵과 고요함으로 휩싸여있었다. 거리는 순찰을 도는 경비들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마치 통금시간을 지키기라도 한 듯 모든 건물은 굳게 잠겨 있었고 창문들은 두꺼운 커튼이 가리고 있었다. 말 그대로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소리와 빛을 완전히 차단한 모습.

어둠이 우리의 편이 아니라는 걸 이들은 잘 숙지하고 있었다. 우리를 숙소로 안내하기 위해 나타난 은테 안경은 우리에게 주의할 점을 알려줬다. 일행들은 건물 한쪽에 조용히 쭈그려 앉아 남성의 말에 집중했다.

해가 지기 전에 모든 인원은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지금같이 불가피하게 거리를 나와야 할 때는 인솔자의 명령을 잘 듣는다. 간단하고 합리적이었다. 그 말을 끝낸 남성은 조심히 손전등을 들고 인솔을 시작했다.

우린 마치 소풍을 나가는 아이들처럼 일렬로 줄줄이 서 걸으며 소음을 최소화 했다. 그렇게 3분가량을 걸었을까 우리 눈앞에는 3층으로 된 빌라가 보이기 시작했다. 새로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빌라는 단체장이 우리를 배려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남자는 1층 복도를 향해 조용히 손짓했고 이내 모든 일행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 서둘러 문을 닫았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지더니 열쇠 꾸러미와 무전기 하나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난 그것을 받아들고 남성을 바라봤다.

‘1층을 통째로 쓰시면 됩니다. 2,3층은 비어있으니 걱정 마시고……. 여기 열쇠랑 무전기 받으십쇼. 그리고 이 무전기는 단체장님과 연락이 가능한 직통 라인입니다.’

말 그대로 단체장이랑 직통으로 연락이 가능한 무전기란 소리였다. 난 단체장의 특별대우가 슬슬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받아서 손해 볼 건 없었기에 난 물건을 받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성은 잠시 밖을 살펴보더니 이내 나에게 속삭였다.

‘짐은 다 옮겨놨으니 따로 움직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1시간 뒤에 현관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제가 다시 오겠습니다.’

‘또 할 일이 있습니까?’

‘탐색조 관련해서 설명해드릴게 많습니다.’

어차피 해가 지고 나면 할 일도 없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조용히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동시에 난 일행들을 돌아봤다. 하품을 하는 채연이와 피곤한 얼굴의 아이들. 난 주머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들었다.

* * * * * *

1층에는 총 3개의 호가 있었고 전부 투룸이라 방이 부족할일은 없었다.

집에 들어가서 전등 스위치를 눌렀는데 반응이 없었다. 아마 제한적으로 전기를 공급하는 모양인데 큰 불만은 없었다. 그것이 훨씬 안전하고 경제적이니까. 하지만 거주자를 배려한 건지 방 한구석에서 불이 들어오는 스탠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화장실 변기는 수압이 약하긴 했지만 물은 정상적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다른 용무는 공용으로 사용하는지 수도꼭지에선 물이 나오지 않았다. 화장실 거울위에 적혀있는 물 절약 포스터가 너무나 생소하게 느껴졌다.

일단 구경하는 건 이쯤 하고 인원을 나누어 쉬기로 했다.

방이 많은 만큼 좀 떨어져서 자나 싶었는데 일행들은 또 아닌 눈치였다. 아이들은 휴게실에서 잘 때처럼 한방에 모였고 그 아이들을 돌보는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강수련이 말하길 서로가 떨어지면 불안 증세를 보인다고 하기에 난 사족을 달지 않았다.

여자와 아이들은 거실에 모여 이불을 피고 누웠다. 나는 잘자라는 인사와 함께 남자들을 데리고 그 옆집으로 향했다. 눈치를 보아하니 남자들도 한곳에 모여 잠을 잘 것 같았다. 그렇다면 빌라문과 제일 가까운 집 하나가 남는다는 소리다.

일기도 쓰고 혹시 모를 상황도 대비할 겸 그곳은 내가 혼자 사용하기로 했다. 용팔이가 왜 같이 안자냐고 묻기에 나 대신 노인이 대답했다.

‘회장님이잖아. 회장이 신입사원이랑 같이 방 쓰는 거 봤어?’

나와 털보는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오랜만에 크게 웃으니 기분이 좋았다.

* * * * *

1시간이 지나자 은테 안경이 다시 찾아왔다. 기다리고 있던 나는 옷을 챙겨 입고 노인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혼자가도 상관없었지만 에덴을 둘러보고 싶다는 노인의 말에 같이 동행하게 되었다. 참고로 털보와 용팔이 형제는 코를 골며 잠에 빠져있었다.

현관문이 열리자 남성은 기다렸다는 듯 우리에게 다가왔고 이내 조용한 거리로 나와 우리에게 손짓했다. 문을 열고 나오자 싸늘한 밤공기가 얼굴을 스친다. 난 입김을 내뱉으며 우리를 안내하는 안경을 향해 조용히 물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그러자 은테 안경은 조용히 안경을 만지더니 빌라와 멀지않은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탐색조 담당 본부입니다. 지금부턴 조용히 하셔야해요.’

우리가 지내는 빌라는 거주지역의 경계면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몇걸음 걷지도 않았을뿐인데 주변 분위기가 돌변했기 때문이다. 거리를 걷는 경비들의 밀도가 늘어났고 이곳저곳에서 우리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말 그대로 경비가 삼엄했다.

밤인데도 불구하고 이곳저곳에서 들리는 발소리는 에덴의 사람들이 아직도 일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고요 속에 분주함이랄까? 이상하게 괴리감은 느껴지지 않았고 어두운 숲속에 동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묘한 생동감마저 느껴졌다.

은테 안경이 우리를 데리고 들어간 곳은 1층으로 된 낡은 상가 건물이었다. 그 옆에 있는 깨끗한 건물과 비교하면 너무 갭이 심했다. 난 복도 곳곳에 붙어있는 전단지를 바라보며 천천히 남자의 뒤를 쫓았다.

에덴의 미래! 탐색조가 당신을 원합니다. 누가 만든 전단지인지는 모르겠는데 참 구려 보였다.

상가 건물은 조용했다. 대부분 방은 사용하지 않는지 막혀 있었고 그 중에 한곳만이 옅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유리창에 크게 세탁소라고 쓰여 있는 방, 그곳으로 걸어간 은테 안경은 살며시 문을 열었다.

아직 물건을 치우지도 않았는지 방 한편에는 세탁물과 옷걸이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전단지와 다 쓴 이면지로 가득했는데 한마디로 방이 어수선 했다. 하지만 은테 안경은 그 풍경이 익숙한 건지 앞길을 막는 물건들을 발로 치우며 외쳤다.

‘김혜정 팀장님, 계십니까?’

그러자 어둠속에서 밝은 빛 하나가 샘솟더니 숏컷을 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자다 일어난 듯 피곤해 보이는 얼굴은 촛불로 인해 조용히 일렁였고 그 얼굴에는 짜증이란 감정이 묻어 있었다. 아, 첫인상은 글렀네. 난 조용히 생각했다.

‘뭐야 이 밤에! 이 사람들은 또 뭐고? 새로운 지원자야?’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혜정이란 여자는 우리를 바라보며 말하더니 이내 조심히 촛불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마치 감평하듯 우리를 바라보는데, 나도 그 시선을 쫓아 얼떨결에 그녀를 마주봤다.

그녀의 머리는 짧은 숏컷이었고 키는 나만큼 컸다. 그리고 현장에서 뛰는걸 증명하듯 오밀조밀한 근육은 옷 겉으로 드러났다. 강한 여전사, 첫인상을 표현하자면 그랬다. 하지만 김혜정은 내 호평과는 다르게 우리에겐 박한 평가를 선사했다.

‘이번 지원자는 영 비실한데? 얼씨구 할아버지까지?’

그러자 은테 안경이 조심히 안경을 치켜 올리며 대답했다.

‘지원자 아닙니다. 탐색조를 도와주실 분들입니다.’

도와? 누구를? 대답을 들은 김혜정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표정에는 자기 영역을 침범 당했다는 짜증과 분노가 섞여 있었는데 그 표정을 발견한 나는 그녀의 대답을 대충이나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대답은 내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왜? 어디 군인 분들이신가? 그런 귀한 분들은 전투 조에나 갈 것이지 왜 누추한 탐색조에 오셨대?’

나는 그녀의 비아냥거림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도발로 흥분할 만큼 내 정신은 활동적이지 않았으니까. 난 무신경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 말해줘야 할지 고민했다. 피곤한 말싸움은 내 쪽에서 사양이다.

하지만 노인은 피곤한 말싸움이 하고 싶었는지 그녀를 향해 친절히 대답해줬다.

‘군인은 아니고 대신 군인 모가지는 따봤지.’

그러자 은테 안경과 김혜정이 움찔했다. 치기어린 허세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나 찐득하고 살벌한 목소리였다. 마치 목젖을 가로지르는 찌릿한 신경은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들이 알아채기에 충분했다.

‘……허, 허세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기선제압을 하고 싶었겠지만 참 의미 없는 싸움이었다. 나는 질책하는 눈으로 노인을 바라봤고 노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내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고 나는 혀를 작게 차며 우리를 경계하는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래서 할일이 뭡니까?’

내가 할 일을 묻자 아까보다 기세가 약해진 그녀는 책상위에 놓인 공책 하나를 나에게 던져줬다. 난 날아오는 공책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었고 그것을 잽싸게 펼쳤다. 그 공책에는 있으나마나한 조잡한 메뉴얼과 함께 지도가 한 장 들어있었다.

그 지도에는 형광펜으로 더럽게 칠해진 장소들이 있었는데 대충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공책을 접었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는 작은 히스테릭을 부리며 축객 령을 내렸다.

‘됐지? 이제 나가!’

별거 없다. 난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돌렸고 노인도 별다른 사족을 달지 않았다. 하지만 은테 안경의 남성은 처음으로 인상을 찡그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자세한 설명을 해드리세요.’

하지만 그녀 역시 곱게 넘어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인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녀는 억울함이 섞인 울먹임 내뱉으며 은테 남성을 항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어제만 3명이 뒤졌어! 우리가 큰걸 바래? 이딴 사람들 말고 전투조랑 같은 무기를 달라고!’

‘우리가 주기 싫어서 그럽니까? 부족한걸 우리보고 어떡하라는 겁니까?’

‘변명하지 마! 걔들이 나가서 싸워? 아니잖아!’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그 둘은 우리가 안중에도 없는지 신나게 말싸움을 시작했고 나와 노인은 불똥을 피해 살며시 방 밖으로 나왔다. 내일 해야 될 것도 받았겠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비즈니스는 우리끼리 합 맞춰서 하면 될 일이다.

속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나와 노인은 사이좋게 공책을 들고 일행들이 기다리는 숙소로 걸어갔다.

왠지 퇴근하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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