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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살아있다-64화 (64/313)

[64]

고통과 인내의 시간이었다. 추운 날씨와 불어오는 칼바람은 체온을 빠르게 앗아갔다. 그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은 날카롭게 선 신경 위에 두려움이라는 녹을 끊임없이 뿌리기 시작한다. 참자, 인내하자. 우리는 이를 악물고 두려움의 근원을 끊임없이 쫓아갔다.

밤 12시가 지나자 눈이 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황급하게 담요를 뒤집어쓰고 한곳에 뭉쳐 체온을 나누었다. 몸은 덜덜 떨리고 크로스 보우를 잡은 손은 딱딱하게 굳었다. 난 손가락에 끊임없이 입김을 불어 넣으며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새벽 4시가 되었다.

* * * * * *

누군가 황급히 내 어깨를 잡는 게 느껴졌다. 난 움찔하며 멍한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무릎위에 올려두었던 크로스 보우를 꾹 잡았다. 나는 굳었던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 몸 안에 쌓인 피로를 억지로 털어내기 시작했다.

내 어깨를 잡은 것은 노인이었다. 노인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입술위에 검지를 올려두더니 차례차례 일행들을 흔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뻗어 마트 정문 방향으로 보이는 건물들과 골목길을 차례차례 가리켰다.

난 어둠에 익숙해진 눈동자를 계속해서 깜빡이며 노인이 가리킨 방향을 눈으로 쫓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건물 윤곽들 사이를 빠르게 기어 다니는 그림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난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거리며 몸을 숙였고 난간으로 빠르게 기어가 머리를 살며시 내밀었다.

그림자는 마치 흘러 지나가는 안개처럼 건물과 건물의 그림자 사이를 빠르게 스며든다. 그리고 잠시 멈춰서 기괴하게 몸을 틀거나 흔들 때면 그 녀석의 윤곽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녀석이다.

난 말라붙은 목구멍으로 침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황급하게 일행들을 돌아보며 떨리는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일행들은 바닥을 정신없이 기어가며 원래 지정했던 장소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난 아찔한 정신을 애써 부여잡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젠장, 잠깐 한눈판 사이에 또 없어졌다. 난 떨리는 눈꺼풀을 빠르게 감고 뜨며 정신없이 그놈의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붉은 반딧불이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는 그 녀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그놈들도 진정한 포식자의 등장을 아는 것일까? 붉은 안광을 살벌하게 빛내던 그놈들은 그녀석의 등장에 집을 잃은 꿀벌마냥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녀석은 놈들을 마치 벌레처럼 보듯 손으로 쳐내며 앞으로 기어갔다.

그 녀석은 무엇을 그리 찾는지 목각인형처럼 목을 이리저리 꺾으며 사방을 계속해서 둘러봤다. 그리고 개인주차장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담을 넘어 집안으로 들어가는 등 정신없이 이 근방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난 그 모습을 빠짐없이 두 눈에 담으며 담내 나는 숨결을 훅 내뱉었다. 그리고 그녀석의 동선을 하나하나 기억해내며 잠시 추위 속에 감춰져 있던 기억들을 들춰내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걸 느꼈다.

우리가 공사현장을 들러 마트로 돌아왔던 길을 그 녀석은 그대로 따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유난히 오래 머무른 자리는 노인이 파카 조각을 던져놓은 자리일 것이다. 그녀석이 담을 넘으며 벽을 긁는 소리가 귓가에 기기긱 울린다.

그 녀석은 한동안 그곳을 맴돌았다. 아마 노인이 무작위로 던져둔 파카 위치 때문에 우리의 정확한 위치는 찾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여러 번 허탕 친 그 녀석은 짜증이 난건지 성대를 거칠게 긁는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신경질적으로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난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오늘밤은 오지마라, 우리를 발견하지 마라. 적어도 준비가 제대로 된 상태에서 싸울 수 있기를 난 간절히 바랬다. 난 눈 한번 깜빡이지 못하고 그놈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숨죽여 바라봤다.

그리고 한 시간이 지났다.

그 녀석은 지독한 집요함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이 근방을 돌고 있었다. 그리고 또 같은 허탕을 칠 때마다 신경질적으로 담벼락을 긁거나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내 정신을 괴롭혔다.

아히이…….

아히이…….

난 귀를 틀어막았다. 그리고 거친 숨을 내뱉으며 그 녀석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제발, 제발 그냥 가라! 난 울음소리 때문에 저려오는 오금에 힘을 주었다. 일행들은 괜찮을까? 뒤돌아보고 싶었지만 난 그 녀석을 시야에서 놓칠까봐 그러지 못했다.

그 녀석은 어두운 하늘을 향해 목을 빼 내밀고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마치 우리를 향해 어디 있냐고, 도대체 어디로 숨은 거냐고 울부짖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고 그놈은 계속된 허탕 끝에 결국 포기한 건지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몸에 힘이 빠지는걸 느꼈다.

난 난간에 몸을 기대며 천천히 크로스 보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일행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상황종료. 노인 덕분에 하루를 벌 수 있었다. 내가 그녀석이 물러갔다는 신호를 보내자 일행들도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난 바닥에 내려놓은 크로스 보우를 잡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뚜벅뚜벅 일행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일행들은 모두 긴장이 풀렸는지 잔뜩 굳어있던 몸을 풀며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순간,

에취!!

모두의 시선이 용팔이에게 향했다.

용팔이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기 입을 황급하게 막았다. 그리고 퍼렇게 질린 얼굴을 들어 올려 우리를 멍하니 바라본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긴장이 풀리자 갑작스레 새어나온 기침. 사정없이 떨리는 용팔이의 눈동자는 나의 침과 함께 두려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

발끝에서부터 시작한 짜릿함이 머리끝에 도달하자 신경은 계속해서 경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위험! 경고! 나는 저려오는 오금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일행들에게 필사적으로 손을 휘저으며 황급하게 뒤를 돌아본다.

가가가가가각

바닥을 긁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귀를 강렬하게 울린다.

온다!

그놈이 온다!

그놈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목을 꺾은채 이곳을 향해 기어오기 시작했다. 저렇게 빨리 달려오는데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점점 그놈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다. 찢어진 입은 한껏 올라가 있었고 입에서는 성대를 긁는 기괴한 소리를 내뱉는다.

너 거기 있었구나.

웃는 그놈의 얼굴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난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내려놓았던 크로스 보우를 황급하게 잡았다. 그리고 일행들을 바라봤지만 일행들은 그녀석이 이곳으로 기어오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깊은 두려움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넋 놓고 있다간 다 죽는다.

난 일행들에게 필사적으로 달려가 그들을 흔들었다. 손으로 밀고 발로 차고!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면 뺨을 냅다 후려 버렸다. 그러자 일행들은 멍한 시선을 나에게 고정시켰고 이내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본능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나는 힘이 풀린 다리를 애써 움직이며 재빠르게 난간에서 멀어졌다. 점점 울음소리는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그놈이 바닥을 훑는 소리도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난 창고 뒤로 빠르게 달려갔다.

그리고 내가 창고 뒤에 도착해 정면을 바라보는 순간 난간에는 거대한 손 하나가 걸쳐있었다. 콘크리트로 된 난간을 연신 긁으며 올라오는 손은 어느새 두 개로 늘어났고 그 아래로는 칠판을 긁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이

그 손 사이로 서서히 올라오는 흉측한 얼굴 하나. 그 얼굴은 닳아 없어진 코를 연신 킁킁 거리며 흉측한 입을 헤 벌렸다. 그리고 얼굴을 이리저리 꺾으며 우리가 있는 옥상을 살펴보았고 이내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녀석은 침을 흘리며 히죽 웃었다.

올 것이 오고 말았다. 나는 크로스 보우를 잡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크로스 보우를 어깨에 견착하고 그 녀석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두려움 때문에 흔들리는 눈과 팔을 조준점 안에 있는 그 녀석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내 팔을 이렇게 만든 게 너지? 집요하고 교활한 악마는 마치 나를 기억한다는 듯 코를 계속해서 킁킁 거렸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리고 기쁜 듯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그 녀석은 순식간에 난간을 넘어 미친 듯이 나를 향해 기어오기 시작했다.

온다.

지옥의 정수가 육편의 파도로 변해 나를 순식간에 덮쳐온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 시간이 느려지고 내 머릿속에서 돌아가던 사고는 한순간에 멈춰버린다. 이 순간이 마치 억겁처럼 느껴지고 이마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 한 방울에 모든 신경이 쏠린다.

죽음을 등지고 서자 등이 서늘했다.

쏠까? 아니야 기다려. 하지만 죽을지도 몰라! 아니, 아직 이야. 죽을지도 모른다는 본능과 사냥을 해야 한다는 이성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충돌한다. 내 손가락은 방아쇠 위에서 고뇌의 춤을 추었고 흐른 식은땀은 내 코끝에 맺혀 떨어져 내렸다.

두쿵 두쿵, 이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심장소리는 모든 두려움을 마비시키고 아드레날린을 미친 듯이 이끌어낸다. 그리고 코끝에 맺힌 땀방울이 바닥위에 떨어질 때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소리가 심장소리 사이에서 들려왔다.

핑!

끽?

그 녀석은 그 자세 그대로 멈춰버렸다. 그리고 믿지 못하겠단 얼굴로 멈춰버린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달려오는 반동과 덫에 걸린 손. 그 역방향으로 가해지는 힘은 서로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중심을 잃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석이 바닥에 몸을 처박자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한 소리. 핑, 핑, 핑 핑! 그 소리를 신호탄으로 옥상 한구석에 숨어있던 일행들이 빠르게 치고 달려왔고 그놈은 무언가 잘못된걸 알았는지 처절한 괴음을 내뱉는다.

드디어 이 순간이 왔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자 뭉쳐있던 두려움이 분노로 바뀌어 폭발한다. 이제는 떨리지 않는 조준점을 그 녀석에게 겨누며 난 어딘가에 있을 용팔이를 기다렸다.

번쩍! 용팔이가 들고 있던 손전등에 불이 밝혀진다. 마치 타오르는 불꽃이 점화되듯 빛은 경건하게 타올라 버둥거리는 그 녀석을 비춘다. 난 분노를 폭발시키며 끓어오르는 고함을 삼킨다. 그리고 정확하게 그 녀석을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긴다.

볼트가 나를 떠난다. 그리고 그 볼트는 맹렬하게 날아가 그 녀석에게 정확하게 박힌다. 내 사격을 시작으로 이곳저곳에서 볼트가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강력한 공격을 받은 그 녀석은 고통이 섞인 분노의 괴음을 내뱉었다.

끼이이이이이익!!!!!!

난 재빠르게 볼트를 장전했다. 그리고 입술을 꽉 깨물며 끊임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퉁 퉁 퉁, 이제는 익숙해진 소리가 그 녀석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발버둥 치면 칠수록 근육과 살 속에 파묻힌 날은 신나게 춤을 추었다.

하지만 난 가면 갈수록 조급함을 느끼고 있었다. 분명 몸을 맞히는 유효타를 주고 있음에도 그놈의 발버둥은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갈수록 심해지고 격렬해주는 저항에 덫들은 삐걱 소리를 내며 하나둘 뽑혀지고 있었다.

치명적인 공격이 필요하다.

머리를 제외한 다른 곳을 아무리 맞혀봤자 그놈은 죽지 않는다. 그걸 알기에 두개골을 노려봤지만 격하게 발버둥 치는 그놈의 머리를 맞춘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행들도 그것을 알기에 서서히 사격 빈도가 늦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덫이 부셔지고 우리는 모두 죽는다.

나는 노인을 찾아 사방을 둘러봤다. 그러자 노인 역시 사격을 멈추고 나와 눈을 마주친다. 우리는 시선을 교차하며 무언의 소통을 짧게 나눴다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빠르게 움직이며 행동을 개시했다.

난 앉아쏴 자세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서서히 걸어가며 그 녀석을 향해 볼트를 날렸다.

내가 시선을 끌어야 했다.

난 일부러 과장된 몸짓을 더하며 녀석을 자극했다. 그러자 그 녀석은 증오가 가득한 얼굴을 꺾더니 나를 노려봤고 이내 꿈틀거리며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그래, 나를 봐라!

덫은 위태로운 소리를 내며 뜯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본 나는 위험한 도박의 끝이 왔음을 직감했고 마지막 볼트를 그놈에게 발사하며 최후의 배팅을 마무리했다.

끼이익!

급조한 덫은 파괴의 단말마를 내뱉으며 뽑혀버린다. 하나가 망가지기 시작하자 위태롭게 버티던 다른 덫들도 그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녀석은 이제 자유로워진 몸을 이끌고 검은색 피를 질질 흘렸다.

그리고 흉측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나에게 미친 듯이 기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 옆에선 시선이 끌린 틈을 타 접근한 노인이 크로스 보우를 들고 정확하게 머리를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도 주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착각에 빠진다. 나에게 기어오는 그 녀석과 화살이 교차되는 그 순간 이제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볼트의 떨리는 깃이 두 눈 가득 들어온다. 시위를 떠난 볼트는 맹렬한 기세로 날아들었고 정확히 관자놀이로 향했다. 난 모든 신경을 집중해 날아가는 볼트를 두 눈으로 쫓았다.

육편이 터지는 소리가 묵직하게 들려왔다. 볼트는 정확하게 그놈의 머리를 꿰뚫었다.

그 녀석의 머리는 옆으로 꺾였고 미친 듯이 기어오던 몸도 힘을 잃었다. 녀석은 자기가 당했다는 것도 인지 못했는지 힘이 빠지는 몸을 멍하니 바라보며 의문 가득한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노인 쪽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노인은 크로스 보우를 살며시 내려놓으며 자신이 만든 결과물을 바라봤다. 기쁨도, 환호도, 그 어떤 감정도 없었다. 그저 이 길고 긴 싸움이 끝이 났다는 것에 허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뿐이다. 난 메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무미건조한 상황을 맞이했다.

그 녀석은 애처롭게 울며 몸체를 돌렸다. 그리고 느릿하게 난간을 향해 기어가며 이곳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쏟아지는 검은 피는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고 강인했던 근육은 하나 둘 힘을 잃는다.

난 허리춤에서 대검을 빼들었다.

그리고 기어가는 그 녀석을 쫓아 걸음을 옮겼다. 모든 일행들의 시선은 나에게로 향했고 저 멀리 여명이 건물들 사이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 녀석은 얼굴을 틀어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순식간에 역전된 포식자의 관계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축 늘어진 손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그것이 마치 벌레가 꿈틀거리는 것 같아 난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난 녀석의 팔을 밟고 가슴팍 위로 한발을 올렸다. 그리고 대검을 양손으로 꽉 부여잡고 머리위로 들어올렸다. 지긋지긋한 악연. 집요하게 나를 쫓던 포식자와의 관계를 끊을 최후가 도래했다.

끼이…….

그 녀석은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흘리며 나를 바라봤다. 녀석의 얼굴에는 기쁨도, 증오도, 사냥감을 향한 목적도 이젠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두려움, 이제 죽는다는 공포만이 그 녀석을 지배하고 있다.

날카로운 대검으로 녀석의 머리를 찍어 내린다. 살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두꺼운 뼈를 깨부수는 감촉이 손끝을 타고 흐른다. 긴 단말마를 내뱉은 그 녀석은 뇌가 완전히 파괴되자 옅은 경련을 일으키며 천천히 움직임을 멈췄다.

난 대검을 꽂은 상태에서 손을 놓고 살며시 고개를 들어올렸다.

해가 뜨고 있었다. 따뜻한 햇볕은 이제 모든 게 끝난다고 말하며 내 얼굴을 조심히 어루만져 주었다. 모든 걸 불태운 기분이었다. 흥분으로 가득했던 정신은 하얗게 불탄 재가 되어버렸고 경직된 근육은 마치 물처럼 흘러내린다.

힘이 빠진다. 정신도 저 멀리 날아가기 시작한다.

세상은 밝아졌지만 난 눈을 뜨고 있지 못했다.

나는 아직 살아있었다.

[그는 다음날 일기를 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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