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털보를 데리고 마트로 들어왔다. 그러자 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일행들이 깜짝 놀라며 털보를 바라봤고 난 어쩔 수 없이 대략적인 설명을 해야만 했다. 내 설명을 들은 일행들은 경계하는 눈초리를 치우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배척하지는 않았다.
라면을 끓이려고 했는데 털보 아저씨 안색이 영 좋지 않았다. 그래서 메뉴를 급선회, 용팔이와 두식이때처럼 흰죽을 가득 준비했다. 햇반이 조금 없어지긴 했지만 크로스 보우를 얻기 위해서라면 나머지 햇반이 아깝지 않았다.
털보 아저씨는 용팔이와 함께 마트 한쪽에 주저앉아 우리가 분주히 식사준비를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왕 식사를 대접하는 거 부탄을 아끼기 위해 같이 밥을 먹기로 결정했다. 여자들은 음식을 요리하고 아이들은 분주히 수저와 그릇을 옮긴다.
나는 여자들을 도와주려다가 방해가 된다며 진즉에 쫓겨나버렸다. 그리고 한쪽에 얌전히 앉아 아이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리고 털보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는 넋이 빠져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도도도 뛰어다니는 아이들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난 순간 주먹을 쥐며 움찔했다. 아무래도 그의 겉모습 때문에 나도 모르게 경계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 털보는 눈물을 찔끔 흘리더니 소매로 그 눈물을 닦았다.
나는 털보의 눈물을 본 순간 경계심이 사르르 사라지는걸 느꼈다. 분명히 아들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런 아들이 혼자 부산을 가서 소식이 끊겼는데 어찌 부모마음이 멀쩡하겠는가? 아마 속이 썩어 문드러지지 않았을까.
아무래도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아들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털보가 눈물을 흘리자 용팔이도 표정이 어두워졌고 열심히 그를 위로했다. 아이들은 다 큰 어른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니 호기심 어린 눈으로 털보를 관찰한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 신경을 돌리기 위해 과장된 행동을 취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까르륵 웃으며 나를 따라 다녔다. 한 아버지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자 털보는 콧물을 삼키더니 눈물을 소매로 찍어냈다. 그리고 회한이 묻어나는 한숨을 훅 내뱉었다.
묘한 분위기속에 식사준비는 끝나가고 있었다. 자극적이지 않은 담백한 냄새가 마트 안에 퍼지자 털보가 침을 크게 삼킨다. 그리고 그 순간 휴게실문이 열리더니 노인과 두식이가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음식 냄새를 맡고 깬 모양인데 둘 다 얼굴색이 많이 호전되어 있었다. 두식이는 가장 먼저 점심 메뉴를 확인했고 노인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나에게 돌렸다. 그리고 용팔이 근처에 있는 털보를 발견했고 마치 이건 뭐야? 하는 얼굴을 지어 보인다.
털보는 휴게실 문이 열리자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반가운 얼굴인 두식이를 발견했는지 손을 들어 올려 참 힘차게도 인사했다. 두식이도 그답지 않게 환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털보를 향해 쿵쿵쿵 뛰어왔다.
‘털보!’
평소 목소리를 듣기 힘들던 두식이다. 근데 정확하게 털보 이름을 부르는 것이 친하게 지냈다는 용팔이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털보는 두식이가 달려오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주먹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두식이는 지지 않고 주먹을 내밀어 거친 주먹인사를 해 보인다. 지금 보니 털보가 조금 작아서 그렇지 참 생긴 것도 비슷하고 분위기도 똑같았다.
둘은 한참을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 같이 자리에 주저앉아 식사를 기다렸다. 노인은 살며시 걸어와 내 옆에 앉았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누구야?’
긴말이 필요 없었다. 난 내가 뒤에 감추고 있던 크로스 보우를 살며시 꺼내 노인 무릎위에 올려주었다. 노인은 갑자기 묵직한 무게가 느껴지자 깜짝 놀라며 크로스 보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크로스 보우를 살펴보던 노인이 눈을 날카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노인도 단번에 알아본 모양이었다. 노인은 조금 떨리는 손으로 크로스 보우를 만지다 마치 해명 하라는 듯 나를 바라봤고 난 입을 뻐끔거리며 털보를 엄지로 가리켰다.
저 사람이 만듦.
그러자 노인의 표정이 돌변했다. 노인은 크로스 보우를 조심히 내려놓더니 아주 예의바른 발걸음으로 털보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평범한 동네 할아버지처럼 인자한 웃음을 지어보이더니 굉장히 다정한 목소리로 털보를 불렀다.
‘아이고~ 고생이 많아. 정말 잘 왔어! 혹시 먹고 싶은 건 없나?’
난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걸 가까스로 참았다. 노인이 하는 행동이 너무 노골적이고 태도변화가 극심했기 때문이다. 난 터져 나온 콧물을 소매로 닦으며 노인이 하는 행동을 조심히 지켜봤다.
다행히 털보는 별다른 눈치는 못 느꼈는지 살갑게 다가오는 노인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인다. 그리고 잘 왔다는 소리에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인사를 건넸고 노인은 흐뭇하게 웃으며 털보의 어깨를 툭툭 쳐준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음식이 준비되었다. 일행들 앞에 하나 둘 그릇이 놓이고 중앙에는 큰 냄비와 흰죽이 가득 놓여졌다. 인원이 많다보니 한 끼 먹는 양이 장난이 아니었다. 다음부터는 햇반이 아닌 생쌀을 조리하라고 해야 하나 고민이 들었다.
언제나 식사 시작은 똑같았다. 음식이 모두 놓이자 모든 일행들은 나를 바라봤고 난 천천히 눈을 감는다. 그러면 나는 그릇을 들고 예의바르게 외친다.
‘잘 먹겠습니다.’
침묵을 지키던 일행들이 나를 따라 조용히 합창한다. 잘 먹겠습니다! 아이든 어른이든 오늘 먹는 식사 앞에 예의를 갖추고 감사함을 전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릇을 들고 정신없이 식사를 시작한다.
우리는 언제 침묵했냐는 듯 도란도란 떠들며 식사를 시작한다. 채연이는 식사를 시작하자마자 그릇을 달랑 들고는 내 무릎위에 앉았다. 난 너무나 자연스럽게 채연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흰죽을 입으로 쓸어 넣는다.
아이는 이제 젓가락질도 곧잘 한다. 투정도 부리지 않고 웃음도 많아졌다. 그리고 요즘은 짧고 어눌했지만 말도 많이 하고 표정도 다양해졌다. 처음과 비교하면 상당히 호전된 상태다. 시간이 나면 책도 읽어주고 대화도 많이 해주고 싶었다.
난 채연이를 무릎위에 올리고 평화로운 식사를 지속했다.
털보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풍경에 조금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음식이 눈앞에 놓이자 모든 생각이 날아갔는지 맹렬하게 흰죽을 퍼먹기 시작했다. 한 그릇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음 그릇도 1분이 걸리지 않았다.
거의 두식이와 필적하는 속도에 모든 일행들 시선이 털보를 향했다. 하지만 많이 먹는다고 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노인마저 흐뭇하게 털보를 바라보며 죽을 덜어주기 바빴다. 노인이 말만 안했지 얼굴에는 다 쓰여 있었다.
많이 먹고 일해야지?
그렇게 전투적인 식사가 끝나고 오랜만에 디저트란 사치도 부려봤다. 가득 쌓여있는 음료 캔을 기호별로 골라서 마시고는 오후 일과를 시작했다. 일행들이 하나 둘 흩어지는 와중에 노인은 살며시 일어나 털보 앞에 앉았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야 했다. 노인은 헛기침을 하며 살며시 털보를 살펴본 뒤 조용히 말을 꺼냈다.
‘……흠 그래서 갈 곳은 있고?’
털보는 떡진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조용히 창밖을 바라봤다. 갈 곳? 철물점이 있긴 할 것이다. 하지만 식량이 떨어진 그곳에서 산다면 얼마나 살 수 있을까?
노인도 나도 그것을 알기에 털보가 이곳으로 합류했으면 하는 것이다. 뭐, 원래 목적은 따로 있었지만. 심란한 얼굴을 흔드는 털보를 보고 노인은 이때다 싶었는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은근한 목소리로 털보를 유혹했다.
‘그럼 여기서 지내는 건 어때? 보다시피 식량도 충분하고 분위기도 좋아 보이지? 다들 각자 할 일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어.’
그러자 털보는 송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인다. 이렇게 도움만 받다보니 스스로가 염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절대 그렇지 않았다. 노인과 나는 부담가지지 말라는 말을 거듭 하면서 털보를 꼬셨다.
물론 용팔이와 두식이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양심이 찔리긴 했지만 용팔이는 나와 노인이 얼마나 대단하고 착한사람인지 칭찬했고 두식이는 순박한 눈으로 털보 아저씨를 쳐다보기만 했다. 하지만 효과는 대단했다.
털보는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노인과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진성이랑 소식 끊긴 이후로 그냥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또 이렇게 살 기회가 생기네요…….’
그렇게 말한 털보는 다시 눈물을 머금고 문 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살아는 있는지…….’
그의 얼굴에는 짙은 그리움과 후회가 남아 있었다. 자신의 생살을 저 멀리 때놓은 기분일 것이다. 하지만 털보는 소매로 눈물을 터프하게 닦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까보다 밝아진 목소리로 힘차게 대답했다.
‘진성이 이놈 꼭 돌아올 겁니다. 그동안 신세 좀 지겠습니다, 어르신.’
털보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 번 우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아들은 꼭 돌아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이 동네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 털보는 그런 기약 없는 믿음을 가지고 또 내일을 살아갈 원동력을 얻고 있었다.
물론 가능성은 낮았다. 당장 우리가 사는 곳도 어찌되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저 멀리 있는 부산이 어떨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하지만 아무도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희망이란 이름은 단 1%만 있어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무기를 보고 섭외를 시도했다면 지금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 앞에 마음이 이끌렸다. 노인은 흐뭇하게 웃으며 잘 지내자는 말을 전했고 나도 그에게 일행으로서 첫 인사를 건넸다.
겉모습과는 참 다른 사람이었다.
두식이는 평소와 다르게 소리 내서 웃었고 용팔이는 참 열심히도 촐싹거렸다. 정식으로 우리와 합류하게 된 털보에게 일행들을 한명한명 인사시켰다. 털보는 밝아진 얼굴로 열심히 고개를 숙였고 천천히 일행들 사이로 녹아들었다.
특히 털보는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아이들은 털보를 무서워하면서도 아이들답게 시간이 지나자 금세 털보와 친해졌다. 털보를 까르륵 거리며 따라다니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시간이 참 빠르게도 흘렀다.
하지만 해가 지기 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 노인과 나는 동시에 말했다.
일하자!
* * * * * *
털보가 가장먼저 철물점을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그곳에 자신이 쓰던 장비들과 옷가지들을 가지고 말하는데 혼자 철물점에 다녀오기는 위험했다. 그렇기에 내가 자진해서 털보와 같이 다녀오겠다고 말하자 갑자기 노인이 눈을 빛내며 크로스 보우를 가리켰다.
‘혹시 이런 거 더 있나?’
털보는 자부심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어르신.’
그 말을 들은 노인은 우리가 하려던 스케줄을 모두 캔슬시켰다. 그리고 철물점을 탈탈 털고 말겠다는 얼굴로 자신도 동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마트에는 용팔이를 남겨 보초를 서게 하고 그 외 나머지 남성 인원은 모두 철물점으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오늘은 동네를 수색해 이불과 배게를 챙겨오려고 했지만 얼떨결에 모두 철물점으로 향하게 되었다. 포근한 이불이 그리웠다. 하지만 철물점 물건들도 상당히 궁금했기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방어시설이 가장 시급했으니까.
우리는 바쁜 시간을 쪼개 장비를 가장먼저 갖추고 손전등도 꼭 챙겼다. 그리고 복귀해야할 시간을 정확하게 정하고 용팔이에게 무전기를 맡겼다. 우리는 마치 장난감을 사러가는 아이들 마냥 뒷문을 열고 바쁜 걸음을 옮겼다.
가까운 거리다. 그리고 그놈들이 주위에 없었기에 우리는 긴장감을 조금 풀고 나란히 일렬로 걷기 시작했다. 내가 선두로 그리고 노인이 제일 뒤 후방에 섰다. 노인은 평소와 다르게 털보 뒤에 찰싹 붙어 조용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질문했다.
군대는 다녀왔는가? 이건 어떻게 만드는 건가? 혹시 다른 것도 만드나?
난 노인이 이렇게 말이 많은지 처음 알았다. 그만큼 우리는 절박했고 이런 기술자의 등장은 노인을 흥분시켰다. 노인은 말하면서도 그녀석의 존재를 잊지 않았는지 털보에게 방어시설과 관련된 이야기를 했다.
노인은 열심히 그녀석의 존재를 설명했고 결국 결론은 이것이었다.
그 녀석을 막을 수 있을까?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사실 일반적인 그놈들의 존재만으로도 인간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그렇기에 그보다 더 강력한 적인 그 녀석을 막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하지만 털보는 그 포기를 너무나 가볍게 무시했다. 그리고 마치 개 한 마리가 우리 집에 들어오는데 막을 방법이 없을까? 하는 질문을 듣기라도 한 듯 하품을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가능할걸요?’
털보가 참 듬직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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