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목욕이 모두 끝났다. 난 오랜만에 느끼는 개운함을 만끽하며 한참을 채연이와 놀아줬다. 그리고 오랜만에 일행들과 수다도 떨고 아이들이 가져온 이상한 보드게임도 같이 즐겼다. 내일부턴 바쁘게 뛰어다녀야한다. 그렇기에 오늘만큼은 일행들에게 자유 시간을 줬다.
그렇게 시간은 덧없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나와 용팔이는 옥상에서 초조하게 노인의 복귀를 기다렸다. 나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다급하게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오후는 지났고 저녁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노인과 두식이에게선 아무런 무전도 별다른 연락도 오지 않았다.
분명히 해가 지기 전에 온다고 했었는데, 목욕을 끝내고 이른 저녁까지 먹은 지금까지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재빠르게 창고에서 총을 가져오고 대검을 착검했다. 그리고 비상태세를 갖추고 용팔이에게 마트 아래로 내려가 있으라 지시했다.
황혼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시는 어둠속으로 잠겨 들어간다. 난 옥상 난간에서 쭈그려 앉아 정신없이 사방을 살폈다.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다르게 도시는 심해 속에 갇힌 듯 어둠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붉은색 빛들이 어둠속에서 별처럼 반짝인다. 우리들의 낮이 지나면 이제 그들의 밤이 찾아온다. 그놈들은 어둠속에서 어슬렁거리며 활동을 시작한다.
해가 완전히 졌다.
이 어둠은 노인과 두식이가 오늘 복귀하지 못한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제발 해가 뜨기 전에 그놈들이 노인을 발견하지 못하길 빌고 또 빌었다.
나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마트로 뛰어 내려갔다. 내가 계단을 타고 마트 아래로 내려오자 모든 일행들이 계단 앞에 서서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노인과 두식이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난 총에서 손을 놓고 한참을 고민했다. 모두의 눈빛은 노인이 제발 무사하다고, 연락이 왔다고 말해달라는 것 같았다. 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일행들에게 너무나 침착하고 냉정한 거짓말을 해야 했다.
‘……연락이 왔습니다.’
그러자 김시은(노인의 손녀)이 반색하며 내 앞으로 황급하게 뛰어왔다. 그리고 손톱과 입술을 뜯으며 불안해하던 용팔이도 환하게 웃으며 그 대열에 합류했다. 김시은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뭐라고 왔어요? 저하고 연락이 될까요? 네?’
난 덩달아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무전기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김시은에게 침착하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설명했다.
‘아까 전에 무전기로 연락이 왔어요. 마트 근처인데 해가 져서 못 들어오고 있다고 하네요. 무전기는 소리 때문에 잠시 꺼놓기로 했으니 걱정 마요.’
내가 조곤조곤 설명해주자 그녀는 안심했는지 깊은 숨을 내쉬었다. 물론 나는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기분이었다. 거짓말을 하기 싫었다. 하지만 진실을 말했다간 일행들 사이에 큰 균열이 생길지도 몰랐다.
그만큼 일행들 사이에서 노인의 존재감은 컸다.
난 일행들에게 들어가 쉬고 있으라 말하고 애써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러자 일행들은 수군수군 떠들다가 이내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옮겨 휴게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 옆에 서있는 용팔이에게 말했다.
‘……오늘 옥상 보초는 혼자 할 거야. 너는 뒷문 근처에서 자고 있어.’
용팔이는 안심하고 있다가도 내가 하는 말에 의문을 달았다. 하지만 난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며 거의 반 강제로 용팔이를 마트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혹시 밤중에 노인과 두식이가 올지도 모른다. 용팔이를 뒷문에 대기시키고 준비를 해둬야 했다.
그리고 나는 무기와 손전등을 챙기고 마트 옥상으로 올라왔다.
영겁 같은 시간이 지나고 완전한 밤이 되었다. 오늘은 달도 뜨지 않아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날에는 차라리 꼭꼭 숨어있는 게 더 안전할 것이다. 난 옥상 난간에 조용히 앉아 붉은색 반딧불이들이 맴도는 길가를 멍하니 바라봤다.
노인과 두식이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노인과 두식이는 저 회색 도시 어딘가에 숨어서 그놈들이 지나가길 기다리며 그토록 바라던 해가 밝아 오길 원하고 있을 것이다. 난 굳게 믿고 있었다.
난 무전기를 양손 가득 잡고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바닥에 무전기를 내려놓고 들고 있는 총을 들고 열심히 사방을 살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이 자리를 지킬 뿐이다.
* * * * * * *
‘- - - - - -’
무전기가 울렸다.
난 기겁하며 무전기의 볼륨을 줄였다. 그리고 뛰다시피 걸어가 창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잡음을 내뱉는 무전기를 양손으로 꾹 잡고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3시, 너무 늦은 새벽이다. 이 시간에 무전기가 울릴지 몰랐던 터라 손이 덜덜 떨렸다.
난 무전기를 향해 조용히 외쳤다.
‘영감님?’
그러자 무전기는 다시 한 번 시끄러운 잡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잡음 사이로 옅은 목소리의 한줄기가 들려오더니 이내 너무나 익숙하고 듣고 싶었던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 - - 들리냐?]
살아있다! 살아있어! 난 기쁨이 묻어나는 목소리를 차마 외치지는 못하고 속으로 꾹 삼켰다. 그리고 무전기를 잡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침을 삼키며 노인에게 대답했다.
‘네 들립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왜 안 오신 겁니까? 괜찮은 거죠?’
그러자 무전기는 다시 한 번 시끄러운 잡음을 내뱉는다. 난 침착하게 노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뒤 무전기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제야 신호가 잡히는군. 일단 걱정하지 마. 둘 다 무사해.]
난 긴장감이 풀려 숨을 크게 내뱉었다. 그리고 창고 벽에 편안하게 등을 기대고 무전기를 조용히 바라봤다. 노인의 목소리는 조금 지쳐있었지만 급박한 상황은 아닌 듯 조용했다. 그리고 무전기를 통해 상황을 보고하는걸 보니 안전한 은신처도 찾은 모양이었다.
난 무전기를 들고 노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그러자 노인은 고민하는 건지 흠 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짧은 침묵이 이어졌고 이내 침착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자세한건 도착해서 말해줄게. 해가 뜨자마자 출발할거니까, 그때 이야기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 지금 같은 새벽에 소리를 내서 이야기를 나눠봤자 좋을 게 없었다. 난 조심하라고 거듭 강조하며 천천히 무전기를 내려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노인의 떨리는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말이야.]
‘네?’
[지금 옥상이지? 용팔이는?]
노인은 아까와 다르게 불안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덩달아 불안해진 나도 침을 꿀꺽 삼키고 옆에 놓아뒀던 총을 꾹 잡았다. 그리고 숨을 고르며 침착하게 근황을 보고했다.
‘저는 옥상입니다. 용팔이는 마트 안에 있고요.’
그러자 노인은 여전히 작지만 다급함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내게 알렸다.
[이 무전 끝나자마자 소리 내지 말고 마트 아래로 내려가. 그리고 용팔이랑 밤새 자지 말고 있어. 알았지?]
나는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직감했다. 그리고 황급하게 대검과 탄창을 확인했다. 그리고 한쪽에 놓아둔 손전등을 잡고 창고 문을 살며시 열어 사방을 둘러봤다. 하지만 바람소리 외에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난 아까보다 더 작아진 목소리로 노인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무전기에서는 옅은 잡음만이 들려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노인은 살짝 말을 더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읊조렸다.
[그녀석이야.]
[그녀석이 산 아래로 내려왔어.]
온몸에 있는 모든 세포가 노인의 말에 반응해 끓기 시작한다. 발끝부터 시작해 머리끝까지 소름이 끼쳐 피부가 아려온다.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식은땀으로 흥건한 손을 펼쳐보았다. 노인은 거듭 조심하라는 무전을 끝으로 연락을 끊었다.
난 조용히 무전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총과 손전등을 잡고 조심히 창고 문을 열었다. 창고 문을 여는 순간 차가운 겨울바람이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사방은 빛 한 점 없는 어둠 천지였다. 마치 나를 잡아먹듯 다가오는 어둠에 난 공포를 느꼈다.
살며시 발을 뻗었다. 그리고 사방을 살펴볼 여유도 없이 그대로 계단을 통해 마트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마트로 들어가자마자 자고 있는 용팔이를 깨웠다. 용팔이는 황급히 잠에서 일어났고 내 표정을 보자마자 무슨 일이냐고 거듭 물어왔다. 하지만 난 대답해주지 못했다. 그리고 말없이 손전등과 건전지를 모으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 * * * * * *
바스락.
창문을 가리고 있는 신문지를 치우고 살며시 밖을 내다봤다. 시간이 되자 건물들 사이로 여명의 기운이 살며시 새어나오고 있었다. 난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총을 챙기고 한쪽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용팔이를 발로 툭 쳤다.
‘……용팔아 해 뜬다.’
용팔이는 흡 하는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깨어났고 졸린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흘린 침을 닦으며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용팔이와 함께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걸어가는 중간에 휴게실문을 살며시 열어보았다. 휴게실 안에 일행들은 햄스터처럼 모여서 잠에 빠져있었다. 난 한쪽에 강수련과 같이 잠이 든 채연이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휴게실 문을 닫았다.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
옥상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싸늘한 바람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피곤한 몸과 졸린 정신은 긴장감과 더불어 내 몸을 지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곧 이곳으로 올 노인과 두식이를 위해 정신을 바짝 조였다.
건물들 사이로 완전한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붉은 안광을 빛내던 그놈들은 서서히 자기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고 칠흑 같던 어둠이 가득한 자리는 어느새 여명의 기운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녀석이 산 아래로 내려왔다.
그 녀석을 피해 도시까지 도망쳤지만 그것은 여전히 우리를 쫓고 있었다. 여태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을 보아 우리가 어디 있는지는 구체적으로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중요한건 그것이 아니었다.
그녀석이 도시까지 왔다는 것, 그리고 여전히 우리를 쫓고 있다는 것.
그것으로 충분했다.
조급함이 들었다. 이정도면 괜찮겠지? 하는 생각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다. 당장 우리들이 있는 이 옥상조차 그녀석이 있는 한 안전하지 못했다. 난간의 높이를 올려야 했다. 그리고 소리가 크지 않은 무기도 구해야한다.
난 밖을 살피면서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장비와 물자가 부족했다. 그것들을 구할 곳은 없을까? 튼튼한 바리케이드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을 만들 장비와 물자는 마트 내부에 없었다. 철근이나 튼튼한 자재들, 그리고 전문적인 장비가 있는 곳을 찾아야했다.
난 졸린 눈을 비비고 있는 용팔이를 툭툭 치며 물었다.
‘용팔아, 근처에 공사 현장이나 철물점 없어?’
그러자 용팔이는 흠 하는 소리와 함께 눈을 감았다. 그리고 살며시 눈을 뜨고 눈가를 긁으며 대답했다.
‘털보 아저씨.’
‘뭐?’
‘아, 털보 아저씨가 아니라……. 저 근처에 철물점 있거든요.’
그렇게 말한 용팔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저 멀리 건물 하나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주위 풍경과 다른 한산한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유일한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 건물은 간판도 없고 몹시 낡아보였다.
‘저기 주인이 털보 아저씨거든요. 아들이랑 같이 사는데……. 살아계시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철문점 안에는 없는 게 없어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황급하게 일기장을 꺼내 간략한 지도와 함께 철물점의 위치를 상세하게 적어놓았다. 노인과 두식이가 오고나면 빠르게 저곳을 다녀와야겠다. 그리고 그 녀석을 대비해 방어시설을 만들어야 했다.
‘어!’
내가 정신없이 기록을 하고 있는데 용팔이가 갑자기 큰 소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휙 돌렸다. 난 천천히 시선을 돌려 용팔이가 바라보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그곳에는 두식이와 노인이 골목과 골목 사이를 지나 이곳으로 뛰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난 총을 잡고 황급하게 마트 아래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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