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아쉽게 됐군요.’
‘그러네요.’
난 남성과 악수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노끈으로 묶여있던 손은 자유롭게 풀려있었고 압수당했던 물품 또한 모두 제자리를 찾았다. 남성은 연신 우리 일행 쪽을 바라보며 아쉽다는 소리를 해왔다. 하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고 나를 향해 웃음을 지어 보인다.
나도 남자를 향해 마주보고 웃고 있었지만 남자의 웃음을 믿는 건 아니었다. 그 웃음 뒤로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이들을 풀어주는 이유는 에덴이라는 쉘터와 작은 연결고리를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에덴은 다른 쉘터와 그래왔듯이 우리에게도 동맹이라는 명목을 내세웠다. 연락과 교류, 그리고 간접적인 도움. 그 정도는 손해 볼게 아니기에 난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포로들을 풀어줬다.
포로들은 갑자기 풀려나게 되자 얼떨떨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성이 포로들을 향해 잘 이야기하자 대부분 안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쭈뼛거리는 꼴이 아직도 우리를 경계하거나 두려워 하는 게 분명했다.
좋은 일이다. 난 그 두려움을 오랫동안 간직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는 이곳으로 오지 못하게 혹은 이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죽을 뻔했던 오늘의 일을 기억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겉으로는 화해를 하던 날이었지만 난 다른 포로들에게는 말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그들이 들고 왔던 총은 노인이 완전분해해서 남자의 가방 속에 따로 챙겨줬다. 남자는 우리가 이러는 이유를 알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고 혹시 모를 일을 방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행들을 이끄는 대장 여자를 풀어준 뒤 모두 뒷문으로 향했다.
‘……그럼 연락책은 나중에 알려드리겠습니다.’
남자는 우리에게 추후 만날 수 있다는 언질을 해놓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난 남성과 마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어느새 내 옆으로 온 노인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히들 가시라고.’
무서운 얼굴로 포로들을 대할 때랑은 영 딴판인 모습에 그들은 적응하지 못하고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지 남자에게 눈치를 주며 연신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단 한사람만은 아직도 우리에게 적의를 풀지 않았다.
흥,
콧방귀가 들려왔다. 우리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고 그곳에는 무리들을 이끌던 여자가 팔짱을 끼고 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은 그런 여자를 보며 피식 웃음을 지어보이더니 능글맞게 농담을 건넸다.
‘처자도 고생했네. 다시는 오지 말고!’
그러자 여자는 노인을 노려보더니 다시 콧방귀를 뀌고 자기혼자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남은 이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쭈뼛거리더니 이내 우리에게 고개를 꾸벅이고 여자를 따라 바쁘게 뛰어갔다.
혼자 남게 된 남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우리를 향해 중얼거렸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저 사람이 탐색조는 처음이라.’
나는 남자의 말에 의문이 들어 넌지시 물었다.
‘탐색조가 처음인 사람이 어떻게 대장을 맡습니까?’
그러자 남성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먼 산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이다가 이내 후회와 씁쓸함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정이 있습니다. 그럼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남자는 우리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빠르게 일행들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건조한 인사와 관계. 여기까지가 끝이었다. 우리는 천천히 멀어지는 그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그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노인은 조용히 용팔이를 불렀다.
‘용팔아 내가 챙기라는 거 다 챙겼냐?’
그러자 언제 이곳으로 왔는지 모를 용팔이가 문 사이로 고개를 배꼼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재빠르게 움직여 노인에게 적당한 크기의 가방 하나를 내밀었다. 노인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나도 한쪽에 숨겨둔 물품들을 노인에게 건넸다. 손전등부터 시작해서 추위를 이기기 위한 핫팩들, 그리고 날카롭게 갈아둔 대검과 함께 엽총이 아닌 소총을 내밀었다. 그리고 탄창이 넉넉하게 든 탄띠도 잊지 않았다.
난 조용히 물었다.
‘얼마나 걸립니까?’
노인은 바닥에 쭈그려 앉아 신발 끈을 묶으며 대답했다.
‘반나절 안 걸려. 해지기전에 올 거야.’
노인은 신발 끈을 꽉 묶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가 내민 총과 탄띠를 챙기고 완전 무장했다. 노인은 걱정스러워 하는 나를 보며 피식 웃더니 용팔이를 따라 나온 두식이의 등을 툭툭 쳤다. 그리고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이놈하고 같이 갈 거니까 걱정 말고.’
* * * * *
포로들을 풀어주기전, 일행들의 결정을 들은 나는 옥상에 있는 노인에게 그 소식을 전해줬었다. 그러자 노인은 소리 내서 웃었고 흐뭇하게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마치 잘하라는 듯 어깨를 툭툭 쳐주며 나에게 통보하다시피 말했다.
‘그렇다면 꼬리를 물어야겠군.’
‘저들이요?’
노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아직도 의심을 버리지 못했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노인의 말에 조용히 동의를 보냈다. 살인멸구 같은 극단적인 방법은 아니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예방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노인이 말하길 꼬리 물기, 즉 미행이다.
처음에는 내가 가겠다고 나섰지만 노인은 말없이 거부했다. 나에게 미안해서 그런가? 하고 다시 한 번 권해봤지만 노인이 말하길 미행에도 노련함이 필요하다 했다. 나같이 물렁물렁한 놈은 하지도 못할 거라 말하고는 내 허리를 쿡 찔렀다.
그리고 말없이 건물 한편을 바라보며 표정을 굳혔다.
‘근처까지 따라갈 거야. 그러다 만약에 낌새가 보이면……. ‘
노인은 말을 흐렸다. 그리고 조용히 옥상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 * * * *
준비가 끝난 노인과 두식이가 떠났다. 나는 노인과 두식이가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노인에게 받은 무전기를 꾹 잡았다. 이 무전기가 유일한 연락책이 되어줄 것이다. 내 옆에 용팔이는 노인을 따라가는 두식이가 걱정이 되는지 불안한 눈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고 너보다 두식이가 든든하다고 나무라며 등을 짝 쳐줬다.
잠시 우리의 둥지를 떠나는 일행들이 걱정되긴 했지만 꼭 필요한 원정이었기에 난 애써 불안한 마음을 지웠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켜고 하늘을 향해 후우우 내뱉었다. 몸이 너무나 가볍고 속도 후련했다.
여태 안개낀 길을 뛰어다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 안개가 모두 걷히고 저 멀리 푸른 동산 하나가 보이고 있었다. 저곳에서 뛰고 싶었다. 그리고 일행들 모두와 뛰어가고 싶었다.
쉘터를 만들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치 재미난 장난감을 마주한 아이처럼 흥분되기 시작했다. 채연이와 일행들이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쉘터. 저 에덴처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쉘터를 만들고 싶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린 던, 내 몸이 힘들다고 비명을 지르던 상관없었다.
내 등에는 많은 이들이 있었다.
무겁고 힘들었다. 지치고 아프고, 거대한 부담감은 언제나 놓고 싶은 돌이었다. 그리고 그 부담감은 여태 내 앞을 막던 역풍이었다. 하지만 내가 몸을 돌리는 순간 역풍은 거짓말처럼 나를 밀어주는 순풍이 되었다.
난 작게 기합을 내지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울상을 짓고 있던 용팔이는 갑자기 일어난 나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래 너도 오고가며 심부름 하면서 고생 많았겠지. 난 힘내라는 의미에서 등을 짝 쳐주고 말했다.
‘용팔아, 일하자.’
그리고 빠르게 걸어 마트로 들어갔다. 저 뒤에서는 용팔이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형님 그렇게 웃으니까 이제 좀 사람 같네요.’
* * * * * * *
나는 가장먼저 위생 상태를 점검했다. 휴게실로 들어가 굳게 닫혀있던 창문을 모두 열고 꿉꿉한 공기를 환기시켰다. 그리고 아이들을 시켜 바닥을 쓸게 하고 여자들에겐 수건에 물을 묻혀 바닥을 닦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마트 안을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물을 끓일 준비를 했다. 마트 안에 있는 냄비 중에서 가장 큰 냄비를 꺼내다가 그곳에 생수를 가득 부어넣었다. 그리고 가스레인지와 부탄을 이용해 물을 팔팔 끓였다.
끓인 물과 안 끓인 물을 적당히 섞어 따뜻한 물을 대량으로 준비했다. 한 명당 생수 두통 정도는 쓸 수 있을 것이다. 이정도 물이면 목욕은 무리일지 몰라도 머리 정도는 충분히 감을 수 있었다.
난 따뜻한 물들을 화장실에 옮겨두고 다시 한 번 물을 끓였다. 순식간에 부탄과 생수를 소모했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위생과 사기를 위해 목욕은 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난 깨끗한 수건을 모아서 바가지 안에 넣고 그 위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리고 고무장갑을 끼고 한 장씩 조심히 꺼내 물을 짜내고 예쁘게 접어 비닐위에 올려둔다. 용팔이도 내 옆에서 열심히 작업을 도왔다.
용팔이가 가세하자 작업은 금방 끝나버렸다. 뜨거운 수건이 넉넉히 준비되었고 나는 휴게실로 빠르게 뛰어갔다. 그리고 방청소를 마무리하고 있는 일행들에게 밝게 웃으며 씻자고 외쳤다. 그 외침에 일행들은 환하게 웃으며 도란도란 떠들기 시작했다.
1인당 뜨거운 물수건 두 개와 생수 두통. 그리고 머리를 감기위한 샴푸와 비누도 준비했다. 턱없이 부족한 물이었지만 물수건을 이용한다면 목욕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난 일행들을 위해 화장실 근처에 조잡한 칸막이도 설치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번갈아가며 목욕을 할 수 있게 신경 썼다.
채연이는 강수련의 손을 잡고 까르륵 웃으며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따뜻한 열기 앞에 일행들 모두가 들뜬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난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차례를 기다렸다. 그리고 칸막이 옆에서 조용히 앉아 생각에 빠져들었다.
쉘터를 완성시키는 조건이 무엇일까?
가장먼저 안전한 방어시설이 필요했다. 적어도 외부의 침입은 너끈하게 막을 수 있는 방어시설. 그리고 부랑자 같은 생존자 집단이 쳐들어오더라도 방어와 더불어 반격까지 가할 수 있는 무기도 필요했다.
두 번째는 난방시설. 이제 1월초에 다다랐다. 봄이 오기 전까지 더 추워 질게 분명했고 핫팩으로 버티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확실한 난방시설이 필요했지만 마땅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지금 같이 씻고 입는 문제가 있었다. 식량이나 다른 기구들은 마트 내부에서 해결하면 된다. 하지만 마트 내부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물자들이 있는 건 아니었다. 갈아입을 옷도 없었고 따뜻하게 덮고 잘 이불도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물이 나오지 않았다. 물론 가득 쌓여있는 생수가 있기는 했지만 그 생수들은 어디까지나 마셔야 하는 물이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물 인만큼 최대한 아껴 마셔야 했고 씻는 곳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모든 게 부족하다.
해결해야할 일은 많았고 일손과 물자는 부족했다. 내 입에서는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고개를 흔들며 필사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일기장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적어가기 시작했다.
이곳은 문명의 집약체인 도시다. 비록 종말이 다가와 제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지만 적어도 그 잔재는 남아있을 것이다. 내일 노인과 두식이가 오면 이 근방을 수색하고 청소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필요한 물품들은 모으기 시작할 것이다.
‘빠아.’
내가 정신없이 메모를 하고 있는데 칸막이 사이로 누군가 나를 부른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뽀송뽀송하게 변한 채연이가 손가락을 입에 물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채연이는 헤- 웃어 보인다.
나도 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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