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불길이 치솟는다.
‘애 데리고 나가!’
불길 속에서 남성의 목소리가 날 밀어낸다. 치솟는 불길, 지옥 같은 인페르노. 우리를 재로 만들어버리겠다는 악의가 사방을 불태우고 한줌의 공기마저 앗아간다. 그리고 그 지옥 속에서 형님이 지켜낸 아이. 난 조심스럽게 아이를 받아들고 온몸으로 불길과 열기를 막았다.
그리고 난 다급하게 형님의 몸을 잡고 끌어냈다. 하지만 깔린 잔해 때문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불타오르는 지옥은 마치 아가리를 벌려 우리를 물어뜯듯 형님의 몸을 잡아당긴다. 한 놈은 놓고 가라, 절대로 놔줄 수 없다. 불길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나도 형님도 알고 있었다. 난 새어나오는 절망을 참지 못했고 결국 고함을 내질렀다. 그리고 형님을 꺼내기 위해 온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하지만 상황은 마치 정해진 법칙처럼 뒤바뀌지 않았다.
죽음의 공포가 다가온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가.’
난 아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소방관의 본능이 나를 일으켰다. 하지만 인간으로서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이 날 막았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시야. 미친 듯이 떨리는 손. 난 하기 싫지만 해야만 하는 선택을 해야 했다.
형님 나 믿죠.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고 계세요. 꼭 기다리고 있으라고! 난 처절하게 외쳤다. 그러자 형님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못 온다. 아마 지금이 끝일 것이다. 나도 형님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난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 있었다. 우리 동윤이 아니면 누굴 믿나. 형님은 조용히 읊조렸다. 난 눈물로 점철 된 숨을 꺼억 내뱉으며 다급하게 뒤로 돌았다.
죽음이 두렵다. 그렇기에 너무나 부끄러웠다. 죄책감이 물밀듯 몰려오고 절망이 끈적하게 내 발을 붙잡는다. 나는 불길을 뚫고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불로 만들어진 뱀의 혀가 날름거린다.
무너진다.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젠 내 거친 숨소리밖에 들려오지 않는다. 그리고 폭음! 내 귀를 강타하는 폭음이 뒤에서 울려온다. 난 본능적으로 아이를 끌어안았다. 폭발이 나를 밀어낸다. 난 마치 재처럼 힘없이 앞으로 밀려나간다.
모든 게 어지럽게 흩어진다. 불길도, 연기도. 눈앞에 모든 기억이 스치듯 지나간다. 그리고 주마등처럼 웃고 있는 형님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 무력감이 내 몸을 잠식시키고 내 발목을 붙잡는다.
세상이 사라졌다.
* * * * * *
‘악몽이라도 꿨어?’
눈을 뜨자 노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아직도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밤사이 낀 악몽의 찌꺼기를 내뱉듯 숨을 길게 후 내뱉었다. 난 노인을 바라보며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켰다. 창고문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침이 찾아왔다.
‘떡국먹자.’
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 떡국. 종말이 왔음에도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해가 바뀐다는 생각이 들자 괜한 씁쓸함이 입안에 감돌았다. 난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텐트 밖으로 조심히 나왔다.
날씨가 너무나 좋았다. 여전히 춥긴 했지만 햇살도 따뜻하게 비추고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난 눈을 가늘게 뜨고 솟아오른 해를 멍하니 바라봤다. 너희들 무슨 일 있니? 태양은 그렇게 말하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옥상은 조용했다. 용팔이와 두식이는 어디 갔냐고 물어보자 노인은 마트로 향하는 계단을 가리켰다. 그리고 어제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빙그레 웃으며 나를 지나쳐간다. 노인은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떡국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어.’
나를 기다린걸까? 서둘러야겠다. 난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앞서 걸어가는 노인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쫓았다.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은 조금씩 안정을 되찾기 시작한다. 난 소매로 눈에 남아있는 눈곱과 옅은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키며 다시 하루를 시작했다.
* * * * * * *
계단을 내려와 마트로 들어가자 맛있는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마트 한쪽에 자리하고 있는 포로들을 바라봤다. 자고 있는 사람, 혹은 눈을 뜨고 가만히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 특이사항은 없었다. 그래도 밤중에 얼어 죽지 말라고 담요는 가져다준 모양이었다.
‘동윤씨!’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가 돌아갔다. 그곳에는 강수련과 채연이가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그 광경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난 얼굴을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휴게실 내부에는 사람들로 바글바글 했다. 다들 크지 않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떠들며 식사를 준비하는데 꼭 새해 풍경 같아서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휴게실 중앙에는 큰 냄비가 끓고 있었는데 살며시 걸어가 냄비를 열어보니 그곳에는 떡국이 끓고 있었다.
‘떡은 어디서 구했어요?’
내가 의문이 들어 그녀에게 묻자 강수련은 헤 웃으며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노란색으로 된 일회용 용기들이 쌓여 있었다. 인스턴트식품인 것 같은데, 따뜻한 물을 부어서 컵라면처럼 먹는 음식이었다.
그것을 모아놓고 냄비에 끓이니 나름 비주얼이 살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요리하는 게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붉혔다. 난 설마 떡국을 먹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못했다고 거듭 그녀를 칭찬했고 그녀는 그제야 얼굴을 들고 웃었다.
내가 오자 식사 준비는 모두 끝이 났다. 어느새 많아진 인원들은 냄비를 가운데 두고 둥글게 모여 앉아 새해를 맞이했다. 맛있게 끓은 떡국들은 그릇에 적당이 옮겨져 분배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릇을 앞에 두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식사를 향한 감사인사.
노인이 조용히 말했다.
‘새해 복 많이 받읍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우리는 작은 목소리로 합창했다. 그리고 웃고 떠들며 식사를 시작했다. 나도 일행들이 식사를 시작하자 내 앞에 놓인 일회용 그릇을 들어올렸다. 그곳에는 따뜻하고 먹음직스러운 떡국이 담겨져 있었다.
그릇 사이로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왔다. 맛있는 냄새도 풍겨왔다. 하지만 난 먹지 못하고 있었다. 난 잠시 그릇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일행들을 바라봤다.
새해.
일상의 잔재다. 어쩌면 다음해는 오지 못하지도 모른다. 인간이 정한 해는 당장 내일이 끝이 여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일행들은 그것들을 모두 잊고 지금 이 순간을 열심히 즐기고 있었다.
난 고개를 돌려 채연이를 바라봤다. 채연이는 그릇에 얼굴을 박아 넣고 열심히도 먹고 있었다. 서툰 수저질을 하면서도 용케 입안으로 음식을 넣는 게 내 눈에는 너무나 기특했다. 내가 입 근처를 닦아주자 아이는 히 웃어 보인다.
그리고 내 눈에는 못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채연이의 얼굴은 더러웠다. 물티슈로 닦아주긴 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채연이 머리는 언제 감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추운 날씨에 콧물을 질질 흘리고 있었고 옷도 신서울대를 탈출할 때 옷 그대로였다.
채연이는 떡국을 먹으면서 간간히 피부를 긁고 있었다. 내가 살며시 채연이의 옷을 걷어보자 피부에는 긁은 자국이 가득했다.
다른 일행들도 다르지 않았다. 더러운 얼굴, 떡진 머리. 갈아입지 못해 냄새나고 더러운 옷들. 콧물은 기본적으로 달고 있었고 기침을 하는 아이들도 보인다.
갑자기 방안이 너무나 춥게 느껴졌다. 바닥을 손으로 집어보자 강한 한기가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다. 그 한기는 담요와 옷마저 뚫고 온몸을 차갑게 만들었다. 공기는 건조했고 추운 날씨에 환기조차 쉽지 않았다.
난 한계를 느꼈다.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최고는 아니었다. 살아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점점 죽어가고 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사람이 사람처럼 살지 못한다면 그것은 과연 살아있다고 해도 되는 걸까.
목숨이라도 건져서 다행이라고, 숨이라고 붙어있는 게 어디냐고.
난 아이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아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좋은 음식을 먹고 따뜻한 잠자리에서 자고 아무런 걱정 없이 또래 아이들과 배우면서 지냈으면 좋겠다. 만일 내가 쓰레기를 먹고 쓰레기 위에서 자더라도 혹은 목숨을 잃더라도 아이만큼은 일상을 되찾았으면 좋겠다.
난 천천히 수저를 내려놓았다.
떡국은 차갑게 식어갔고 내 마음 또한 차갑게 식어갔다.
난 멍하니 일행들을 바라보며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고 냄비를 가득 채웠던 떡국들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일행들은 모두 식사를 끝내고 빈 용기를 모아 정리를 시작했다. 그리고 얼추 모든 게 마무리되어 갈 때 나는 조용히 그들을 불렀다.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러자 일행들은 일제히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하던 대화를 끝내고 얌전히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노인은 자리를 비켜주려는지 살며시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조금 소란스럽던 휴게실은 갑자기 침묵으로 가득해졌다. 난 그런 침묵 속에서 일행들 전부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용팔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용팔아, 그 남자 데려와.’
* * * * * * *
‘형님, 데려왔습니다.’
잠시 뒤 휴게실 문이 다시 열렸다. 그리고 용팔이가 뒷목을 긁적이며 얼굴을 내밀었고 이내 손이 묶인 한 남자가 쭈뼛거리며 우리를 바라봤다. 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와 용팔이는 살며시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일행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생존자 집단에서 온 사람입니다.’
여기저기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는 호기심을 그리고 누구는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그 남성을 바라봤다. 남성은 그 시선을 느꼈는지 살며시 고개를 숙였고 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부랑자나 약탈 집단인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연경을 통해 아닌 것을 확인했고 합류 제의도 받았습니다.’
이연경이란 이름이 나오자 일행들은 시선을 그녀에게로 향했다. 이연경은 갑자기 시선을 받았지만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쉘터라는 존재와 에덴이라는 단체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일행들은 반신반의 하면서도 조곤조곤 잘 설명해주는 그녀의 말에 빠져들었다. 난 그 말이 끝나길 기다렸고 이야기가 전부 끝나자 가운데 무릎을 꿇고 있는 남성을 불렀다. 그러자 남성은 깜짝 놀라 나를 바라봤다.
‘설명하세요.’
나는 그에게 반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강압적인 태도를 취하지도 않았다. 그러자 남자의 얼굴을 밝아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나에게 자신이 뺏겼던 가방에서 책자 하나를 꺼내달라고 부탁했다.
난 수락했고 용팔이에게 심부름을 시켜 빠르게 책자를 가져다주게 했다.
남자가 말하길 생존자들과 마주하면 백이면 백, 우리처럼 경계하게 되어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 탐색 조는 그걸 위한 매뉴얼과 안내책자를 손수 만들었다고 말해왔다. 남자는 묶인 손을 열심히 움직여 책자를 열고 우리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에덴, 생존자 집단, 혹은 쉘터.
단체장이라 불리는 사람을 시작으로 백 명이 넘는 인원을 수용하고 있고 한 구역 자체를 요새화 시켰다고 말했다. 모든 일은 민주적으로 돌아가며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에덴은 인간이 남긴 마지막 보루라는 설명을 잊지 않았다.
요새화된 쉘터, 그리고 충분한 방어인력, 풍족한 물자와 거주 지역, 또 체계화된 부서와 의료시설. 마지막으로 태양광 시설로 이용한 전기 공급까지. 마치 이 종말을 예견이라도 한 듯 쉘터에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다.
그리고 남자는 우리가 믿지 못할까봐 안내 책자 속에 사진들을 하나하나 꺼내주며 우리들에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나도 그것을 받아들고 천천히 살펴보았다.
사진 속에 이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마치 꿈에 그리던 이상향처럼 남, 여 그리고 아이와 어른 구분 없이 모두 밝게 웃으며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누구나 꿈처럼 찾아 헤매던 일상의 모습 그대로였다.
모든 이야기를 끝낸 남성은 그대로 가만히 서서 나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나는 말없이 용팔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용팔이는 천천히 일어나 남자를 데리고 문 밖으로 나갔다.
휴게실은 다시 한 번 침묵으로 가득 찼다.
난 일행들과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그리고 떨리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긴 한숨을 내쉬며 준비했던 철제 통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어젯밤 텐트에서 종이를 찢어 만든 용지들을 한창한창 나눠주며 말했다.
‘……무기명 투표하겠습니다. 눈치 보지 마세요.’
이것이 내 최선이었다. 난 일행들에게 선택권을 주고 싶었다.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가 아닌 그들이 직접 선택할 기회를.
난 채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종이와 펜을 손에 꼭 쥐어줬다. 그리고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조곤조곤 설명해줬다. 그러자 채연이는 크게 응! 하고 대답하더니 헤헤 웃었다. 알아들었을까? 난 걱정이 되었다.
나는 강수련에게 아이를 부탁하고 객관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철제 통을 앞에 두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왔다.
* * * * * *
문 밖을 나서자 노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은 울상이된 내 얼굴을 보고 조용히 웃으며 옆에 앉았다. 그리고 엽총을 바닥에 내려놓더니 내 허리를 꾹꾹 찌르며 말했다.
‘왜그리 울상이야?’
난 대답하지 못했다. 그냥 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아쉬움과 억울함, 그리고 옳은 선택을 했다는 생각에서 오는 후련함이 내 몸을 감싸 안았다. 난 자리에 주저앉으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노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만약 간다고 하면 따라가실 거예요?’
노인은 쭈그려 앉아 있다가 이내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턱과 입술을 만지며 씁쓸하게 웃었다.
‘손녀가 가자고 하면 가야겠지.’
역시 그럴 것이다. 난 노인에게서 시선을 떼고 조용히 마트 내부를 바라봤다. 이상하게 눈이 시큰거리고 속이 답답했다. 후련하면서도 섭섭한 기분, 난 살며시 손을 들어 올려 내 무릎위에 올려두었다.
그러자 옆에서 노인이 작게 읊조렸다.
‘이왕이면 자네를 따라가고 싶고.’
난 나도 모르게 픽 웃었다. 그러자 노인도 피식 웃으며 낯부끄럽다고 소리쳤다. 그리고 나를 툭 밀어버렸다.
시간이 지나자 휴게실 문이 열렸고 투표가 끝났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 * * * * * *
휴게실 내부는 여전히 조용했다. 다만 일행들의 표정이 몹시 어두워져 있었다. 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일행들을 바라보며 작게 침을 삼켰고 이내 휴게실 중앙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 표들이 모여 있는 철제 통을 잡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내가 입을 열자 모든 일행들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난 그들의 표정을 읽으려 했지만 복잡한 감정이 섞여있어 읽지 못했다. 나를 바라보던 일행들은 다시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했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난 떨리는 손으로 철제통 뚜껑을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통을 개봉했다.
그리고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고,
철제 통은 비어있었다.
난 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그리고 통안에 손을 넣어봤지만 역시나 잡히는 물체는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는데, 그 순간 무언가 작은 게 날아와 내 품에 안겼다.
채연이었다.
채연이는 무엇이 그렇게 서러운지 눈물을 질질 흘리며 내 품에 얼굴을 비볐다. 난 깜짝 놀라서 채연이를 안아들었고 이게 무슨 일이냐는 듯 일행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일행들은 전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수련은 조심히 입을 열었다.
‘이런 거 하기 싫어요.’
‘……네?’
나는 의문 가득한 얼굴로 대답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숙였고 주옥같은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혹시 우리가 귀찮아졌어요? 지친거죠?’
그 말을 들은 나는 뒤통수에 커다란 돌을 맞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내 품속에 얼굴을 비비고 있는 채연이를 말없이 끌어안았다. 나는 말을 더듬으며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그녀와 일행들에게 말했다.
‘나는 그냥 선택권을 주고 싶었어요.’
그러자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아까보다 커진 목소리로 울면서 말했다.
‘……다음부터 이런 종이 같은 거 주지 마세요.’
그리고 손을 뻗어 구겨진 종이를 휴게실 중앙에 가져다 놓았다. 그러자 일행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구겨진 투표용지들을 중앙에 내려놓았다.
나는 오늘 보지 못한 것을 보았다. 그리고 지금 보지 못했던 걸 또 보고 말았다. 일행들 눈 속에는 내가 비춰지고 있었다. 거울처럼 나를 비춰주는 눈망울은 너무나 맑고 깨끗했다. 난 그 눈망울 속에서 믿음과 존경을 읽었다.
강수련은 조용히 말했다.
‘따뜻한 밥 먹고 싶어요. 그리고 따뜻한 물에 목욕도 하고 안전하고 좋은 침대에서 잠도 자고 싶어요.’
‘……하지만 그게 동윤씨 옆이 아니라면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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