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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살아있다-54화 (54/313)

[54]

물을 맞은 그들은 기겁하며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팔다리가 묶여있는걸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쳤고 이내 두려움과 공포가 가득한 눈을 천천히 내리깔았다. 물까지 맞아서 그런지 더 처량해보였다.

하지만 단 한사람, 대장이라고 불리던 여자만이 나를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독기와 증오로 가득한 눈은 분명한 적의를 내보이고 있었다. 노인은 그런 여자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쪽은 대화할 준비가 되었나보네.’

퉤!

노인이 총을 들고 여자 앞으로 다가가자 여자는 망설임 없이 노인을 향해 침을 뱉었다. 침 한 방울이 노인의 옷과 손에 튀었다.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내려 옷에 묻은 침을 바라봤고 얼굴을 싸늘하게 굳혔다.

노인은 고개를 돌려 강수련을 바라본다.

‘애들하고 같이 들어가 있어.’

강수련은 불안한 눈빛으로 노인을 바라보더니 이내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허락이라도 구하는 것일까? 혹은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걸까? 하지만 나는 그녀를 향해 별다른 사족을 달지 않고 조용히 고개만을 끄덕였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들어가 있어요.’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여자들을 인솔해 휴게실로 향했다. 하지만 단 한명만이 그 자리에 남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채연이었다.

채연이는 엄지를 입에 물고 빤히 나를 바라봤다. 난 그런 채연이와 눈을 마주쳤고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웃으며 안기라는 듯 팔을 벌렸다. 그제야 채연이는 환하게 웃으며 도도도 달려와 내 품에 안겼다.

사람에게 윽박지르고 협박해야할지도 몰랐다. 그런 공간에는 묘한 간극이 생겼다. 천국과 지옥을 넘나드는 그런 묘한 간극에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난 채연이에게 볼 뽀뽀를 받으며 아이를 어르고 달랬다.

한참을 칭얼거린 채연이는 결국 강수련을 따라 휴게실로 향했다.

쾅.

휴게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싸늘한 바람이 우리와 포로들 사이를 헤집고 지나갔다. 한쪽에선 용팔이가 삼키는 침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노인은 천천히 자세를 풀고 내려놓았던 엽총을 들어올린다.

침묵을 깬 건 대장이라 불리던 여자였다. 그 여자는 표독한 얼굴로 나를 향해 침을 뱉었다. 그리고 비꼬는 목소리로 나를 조롱했다.

‘더러운 새끼, 그 애는 네 깔이냐? 하다못해 애를 건들…….’

여자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여자가 나를 향해 조롱하는 순간 노인은 기다렸다는 듯 주먹을 들어 여자의 얼굴을 후려 갈겼다. 망설임도 없었고 준비자세도 없었다. 불시에 가해지는 공격에 입술에서는 피는 팍 하고 튀기고 여자는 뒤로 철퍽 넘어졌다.

‘아가리 여물어.’

살얼음판을 걷는 차가운 목소리가 마트 내부에 울려 퍼진다. 난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내뱉는다. 용팔이와 두식이는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듯 연신 눈동자를 굴렸다. 그리고 조금 놀란 얼굴로 노인을 바라봤다.

하지만 나와 노인은 그 누구하나 당황하지 않고 싸늘한 분위기속에 차가운 안광을 밝혔다.

노인과 나는 공포를 가지고 있다.

그 공포는 너무나 무섭고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하루하루가 걱정되어 미칠 것만 같고 어쩔 때는 악몽으로 등장해 꿈속에서까지 나를 괴롭힌다. 그런 공포는 우리를 겁쟁이로 만들지만 또 끔찍한 괴물로 만들기도 했다.

난 차가운 목소리로 그들을 향해 말했다.

‘말해.’

아직도 채연이가 잡혀가는 꿈을 꾼다. 노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말하지 않았지만 서로를 이해했다. 그렇기에 잔인하고 괴물처럼 변한 스스로를 인정하고 서로의 손을 잡는다. 지키기 위해 잔인해져야 한다면……. 수백 번이고 그럴 수 있다.

난 지도를 들고 입에서 피를 흘리는 여성 앞에 들이밀었다.

‘이게 뭐지?’

수상한 지도. 빨간색으로 x가 그어져 있는 이 지도! 이것부터 알아야 했다. 점점 우리 쪽으로 향해오는 이 빨간색의 파도는 나에게 괜한 불안감을 심어두었다. 하지만 여자는 어림도 없다는 듯 독기가 가득찬 눈을 치켜뜨며 다시 한 번 침을 뱉었다.

피가 섞인 침이 지도위에 튀겼다.

여자는 역시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린 그런 모습에서 작은 의문을 느꼈다. 난 잠시 침묵을 지켰고 노인은 독한 모습을 보여주는 여자를 향해 조용히 읊조렸다.

‘단체 소속이야.’

그 순간 침을 뱉었던 여자는 움찔한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동료들도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수신거리가 긴 무전기를 보고 대략 예상은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예상이었고 확신은 가지지 못했었다.

무언가를 감추려는 의도. 절대 대답하지 않겠다는 함구. 그리고 그 사이에는 작은 틈이 보였고 노인은 그 틈을 향해 거침없이 찔러 들어갔다. 우린 의문에서 확신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배후가 있다.

나는 참담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노인도 작게 숨을 내뱉으며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하필, 왜 하필 우리 마트였을까. 난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느끼는 참담함은 당장 그 단체가 두렵거나 무서워서 오는 감정이 아니었다.

노인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살려두면 안 돼.’

그 말은 기폭제였다.

싸늘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죽음 앞에서 오는 공포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망을 내뿜게 했다. 두려움과 원망이 서서히 퍼져나가 내 피부를 찐득하게 핥는다. 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

너무나 묵직하다. 나는 많은 피를 손에 묻혔고 생명을 뺏었다. 하지만 난 단 한 번도 죽음의 무게를 잊어본 적이 없었다. 생동감 있게 뛰던 심장은 단 한순간에 멈춰버리고 수십 년을 살던 육체는 딱딱한 고깃덩어리로 변한다.

그 감촉은 영원히 내 손 끝에 남아 살과 피를 썩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참담함을 느꼈다.

사람을 죽이기 싫다. 생명을 뺏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이성과 감성이 끊임없이 충돌하며 나에게 참담함을 선사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기저기서 욕설과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나에게 목숨을 구걸하거나 혹은 증오와 욕설을 내뱉는다. 마치 내 발 아래 핏물이 고인 것만 같았다. 난 그 끈적끈적한 감촉을 잊지 못하며 서서히 눈을 뜬다.

‘형님……, 거짓말이죠?’

그리고 한쪽에서 가만히 우리를 지켜보던 용팔이가 살금살금 내 옆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믿지 못하겠다는 듯 내 팔을 잡으며 천천히 흔든다. 장난하는 거죠? 겁주는 거죠? 용팔이는 그렇게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나를 붙잡는다.

‘……이러면 안 되잖아요……. 사람을……. 사람을…….’

‘용팔아.’

용팔이가 내 손을 붙잡자 그것을 조용히 바라보던 노인이 조금 큰 목소리로 용팔이를 불렀다. 용팔이는 깜짝 놀랐고 곧 떨리는 눈으로 노인을 바라봤다. 그러자 노인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용팔이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단 한줌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죽이면?’

‘……네?’

용팔이는 얼떨결에 대답하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러자 노인은 안광을 빛내며 용팔이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나를 붙잡고 있던 손을 떼어내고 강하게 힘을 준다. 노인은 다시 용팔이에게 물었다.

‘안 죽이면?’

안 죽이면?

용팔이는 무언가 대답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용팔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많은 생각이 들었겠지만 그 모든 게 지금 같은 상황에선 쓸모가 없었음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불과 보름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었던 물음.

안 죽이면?

노인은 용팔이에게 쐐기를 박듯 일갈했다.

‘놓아줄까? 그럼 이놈들이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고 다시는 오지 않을까?’

용팔이는 손을 떨었다. 그리고 창백해진 얼굴로 나와 노인을 번갈아 바라봤다. 지독한 현실이다. 쓰디쓴 상황이다. 하지만 노인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경찰 흉내라도 내볼까? 어디 감옥이라도 만들어서 가둬볼까? 근데 그걸 누가 감시하지? 인력은? 저놈들이 처먹을 식량은?’

그렇게 말한 노인이 용팔이의 손을 놓자 용팔이는 힘없이 엉덩방아를 찍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마치 꿈처럼 느껴지는지 나와 노인 그리고 포로들을 몽롱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푹 숙여버린다.

고개를 숙인 용팔이 앞에서 노인은 씁쓸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두식이 데리고 들어가 있어.’

난 잠시 내려놓았던 총을 잡고 들어올렸다. 검은 찌꺼기가 속을 진창으로 만든다. 이 대검과 포로들 사이에 두려움이라는 벽 하나가 생겼다. 모두가 이 대검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난 천천히 포로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 순간 한쪽에서 떨고 있던 남성이 필사적으로 앞으로 기어왔고 이내 내 다리를 붙잡았다.

‘살려줘! 아니, 살려주세요! 다 말할게요!’

그러자 한쪽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대장 여자가 그 남성을 향해 일갈했다.

‘닥쳐! 부랑자 개새끼들한테 한마디도 하지 마!’

그러자 남성은 눈물을 질질 짜며 여자를 향해 처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누님! 살아야 할 거 아냐! 난 죽기 싫어! 죽기 싫다고!’

그러자 여자는 욕설을 내뱉으려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노인이 빠르게 다가가 재갈을 물려 버렸다. 더 이상 큰소리가 나서는 곤란했다. 노인이 여자에게 재갈을 물려버리자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내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다 말할게요! 다 말할 테니까 제발 살려만 주세요!’

난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좋은 기분은 아니다. 아니, 속이 썩어 문드러질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당장 남자를 뿌리치고 밖으로 튀어나가서 토악질을 해버리고 싶었다. 더러운 기분, 끔찍한 정신.

하지만 난 숨을 크게 들이키며 토악질을 참았다. 그리고 말없이 지도를 들어 올려 남성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ㅅ, 생존자를 체크하는 겁니다.’

겁에 질린 남자는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재갈을 물고 있던 여자가 격한 반응을 보이며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다. 그리고 읍읍 소리를 내며 남자를 죽일 듯이 쳐다봤다. 노인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길게 하품했고 이내 남자에게 물었다.

‘체크해서 뭐하게? 니들 부랑자 새끼들이지? 근데 왜 우리보고 부랑자라고 지랄이야?’

그러자 남자는 필사적으로 손과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무언가 더 말하려던 남성은 황급하게 입을 다문다. 그리고 살며시 눈알을 돌려 재갈이 물려있는 여성에게 곁눈질 친다. 그러다 결국 눈이 마주쳤고 눈이 마주친 여성은 무섭게 눈을 빛내며 재갈을 깨물었다. 그 모습의 남성은 기겁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살며시 바라보던 노인은 피식 웃었다. 대장이라고 불리는 여자 눈치를 보는 모양인데 꽤나 꼴이 우습다. 나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멍하니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용팔이 형제를 불렀다.

‘두식아, 저 여자 끌고 가서 화장실에 가둬놔. 그리고 용팔이는 얘들 입 못 맞추게 감시하고.’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용팔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두식이는 뒷목을 긁적였다. 그리고 지체 없이 여자를 들어 올리더니 화장실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여자는 온몸을 바동거리며 발버둥 쳤지만 두식이는 물건이라도 옮기듯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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