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누군가 나를 흔들었다.
난 기겁하며 일어나 주위에 있는 총을 잡았다. 눈을 비비며 떠보니 노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없이 사방을 훑는다. 그리고 내가 텐트 안에서 잠이 들었다는걸 깨달았다. 난 흘린 침을 소매로 닦으며 노인을 바라봤고 노인은 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시간 다됐어.’
맞다. 시간을 정해서 모두 일어나 있기로 했었다. 그들이 움직이는걸 발견하고 작전을 시작하기에는 늦다. 적어도 정신을 차리고 정해둔 자리에서 대기해야했다. 난 텐트 옆에 둔 물병을 잡고 정신없이 삼켜 마른 목을 적셨다.
그리고 텐트 밖으로 나와 창고 문을 열었다. 옥상 한쪽에는 용팔이가 담요를 끌어안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그 옆에서는 두식이가 앞쪽 건물을 살피고 있었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지만 저 멀리 여명의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30분에서 1시간정도면 해가 뜰 것이다. 난 옥상 한쪽에서 기지개를 펴며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노인은 두식이 옆에 쭈그려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듯 인상을 찡그렸고 우리 사이에는 묘한 침묵이 흘렀다.
폭풍전야.
전쟁터로 뛰어드는 병사의 마음과 같았다. 난 떨리는 가슴과 치솟아 오르는 뜨거움을 참기위해 숨을 쉬었다 마시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와중에 옥상으로 올라오는 계단에서 차분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곳에는 강수련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냄비를 들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강수련은 살며시 웃으며 냄비를 들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냄비, 저절로 침이 흘러 나왔다.
‘속이 든든해야죠.’
강수련은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들으니 긴장감과 두려움이 천천히 가시는걸 느꼈다. 그리고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무거워 보이는 냄비를 받아들고 강수련과 함께 일행들이 모여 있는 옥상 앞으로 향했다.
난 강수련에게 조용히 물었다.
‘채연이는요?’
강수련은 조용히 대답했다.
‘아직 자고 있어요.’
나는 그녀를 마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들고 있던 냄비를 조심히 옥상 한쪽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꾸벅꾸벅 졸고 있던 용팔이가 눈을 번쩍 뜨더니 이곳을 빤히 바라봤다. 두식이는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강수련을 발견한 노인도 굳은 얼굴을 풀며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강수련을 보고 흐흐 웃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왔다.
우리는 해가 뜨려는 이른 새벽, 냄비 앞에 모여서 수저를 들었다.
메뉴는 단출했다. 냄비 안에는 흰죽이 담겨 있었다. 간장 간을 한 듯 갈색을 띄우는 흰죽은 수저에게 오라고 끊임없이 손짓했다. 냄새 때문에 창고 안에서 먹을까 고민 했지만 냄새가 그렇게 자극적인 편은 아니었다.
이정도면 괜찮겠다는 생각에 우리는 수저를 들었다.
양도 넉넉지 않고 맛도 그저 그런 흰죽이었지만 여명을 맞으며 먹는 죽은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맛있었다. 따뜻한 흰죽은 차갑게 식어있던 속은 따뜻하게 데웠고 몸속에 숨을 거칠게 흔들었다. 입에서는 저절로 이 소리가 나왔다.
아, 맛있다.
우리는 순식간에 냄비를 비웠다. 그리고 완전히 뜨기 시작하는 해를 바라보며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나는 빈 냄비를 챙기는 강수련을 바라보며 작게 말했다.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마요.’
강수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와 노인 그리고 용팔이 형제를 번갈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다치지 말아요.’
우리의 대화는 그걸로 충분했다.
* * * * * * *
손목시계를 확인하자 한 시간이 흘렀고 잠시 뒤 정육점에서 나오는 무리들을 포착했다. 그들은 주변을 천천히 두리번거리며 그놈들이 있나 없나를 살폈다. 그리고 주위에 그놈들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 살며시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노인이 황급하게 수신호를 보내며 우리에게 작전의 시작을 알려준다.
우리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식이와 용팔이는 재빠르게 밑으로 내려가 물품들 사이에 몸을 숨긴다. 그리고 나는 마트 뒤쪽으로 뛰어가 뒷문 잠금장치를 살며시 풀어놓는다.
그리고 다시 반대 방향으로 뛰어 방범창이 있는 마트 정문으로 향했다. 나는 박스들 사이에 숨어서 귀를 기울이고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그리고 잠시 뒤, 무언가 두런두런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리가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선을 계단 쪽으로 옮기니 노인이 완전무장을 한 상태로 마트로 내려오고 있었다. 노인은 큰 동작으로 수신호를 보내며 그들이 오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난 숨을 후 내쉬며 뭉친 근육을 필사적으로 풀었다.
그리고 잠시 뒤 방범창을 살짝 흔들리며 사람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누님 이거 제대로 잠겼는데요?’
묵직한 한 남성의 목소리 뒤로 무언가 피곤해 보이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안에 누구 있는 거 아니야?’
‘그거야 모르죠……. 원래 이런 곳에는 뒷문이 하나씩 있는데…….’
그리고 천천히 멀어지기 시작하는 발소리. 난 뒤를 바라보며 숨어있는 일행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모든 게 척척 들어맞기 시작한다. 난 무기들을 점검하고 눈을 한번 꾹 감았다 뜬다.
그리고 지정해둔 매복 장소로 황급히 뛰어갔다.
내가 장소에 도착하고 몸을 숨기자 마트는 작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침묵이 감도는 와중에 무언가 철컹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사람 말소리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야 뒷문은 열려있네요.’
아까 방범창 앞에서 들었던 남성의 목소리다. 남성은 땡잡았다는 어투로 살며시 문을 열고 마트 내부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로는 아까 문 앞에서 들었던 여성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진다.
‘모두 주변 경계해!’
하나 둘, 발소리가 늘어난다. 모두 문을 통과해서 마트 내부로 들어오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난 활시위를 잔뜩 당긴 병사처럼 긴장감을 머리끝까지 당겨놓는다. 총을 손으로 꽉 쥐고 솟아오르는 흥분을 숨 속에 뱉어 넣는다.
‘누님 걱정하지 말라니까요! 와……. 그나저나 물자가 장난 아니네요.’
앞서 방범창에서 시끄럽게 떠들던 남자가 호들갑을 떨며 마트 내부를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우린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며 기회를 노리고 기다렸다. 범의 아가리로 들어온 먹이들. 우린 절대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총을 든 여자를 바라보자 그녀는 갑자기 흠칫 멈추며 사방을 둘러본다. 그리고 얼굴을 굳히며 조용히 읊조린다.
‘주변이 너무 정리된 기분인데…….’
그리고 그녀는 내가 숨어있는 곳을 천천히 지나간다. 촉이 좋은 여자였다. 하지만 지금 의심하기에는 많이 늦었다. 난 마치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앞으로 몸을 날렸다. 내 목표는 하반신. 난 단숨에 그녀의 다리를 붙잡고 몸을 들이밀어 그녀를 넘어트렸다.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형편없이 넘어졌다. 난 그녀가 들고 있는 총을 단숨에 빼앗고 저 멀리 던져버렸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녀의 턱을 주먹으로 강타했다.
완벽한 무력화. 모든 동작들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난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정신을 잃은 그녀를 놓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무리들을 바라보자 그들은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혼란은 오래가지 않았다.
‘뭐야?!’ ‘대장!!’
총을 들고 있던 여자가 단숨에 제압당하자 나머지 일행들은 소리를 지르며 무기를 들었다. 그리고 총을 든 여자에게서 가장 근접해있던 남자가 창을 들고 이쪽으로 뛰어왔다. 잔뜩 화나고 흥분된 얼굴, 조잡하지만 사람 피부 정도는 가볍게 뚫어버린 창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 남성의 공격은 너무나 느리고 단순했다. 난 남성이 내지르는 창과 맞서 살며시 총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대검을 앞으로 세우고 창날이 날아오는 방향을 향해 총구를 틀었다.
가가가각
창날과 대검이 맞부딪혀 듣기 싫은 소음을 내지른다. 내가 설마 공격을 막을 거란 곤 생각치도 못했는지 창을 든 남성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난 그때를 놓치지 않고 대검을 치켜세워 창날을 옆으로 흘렸다.
그리고 손을 뻗어 창대를 잡고 잡아당겼다. 창대를 잡아당기자 자연스럽게 남성의 자세는 무너졌고 몸이 내 쪽으로 끌려온다. 그러자 남성은 본능적으로 창을 놓아버렸다.
순식간에 뺏겨버린 창.
난 뺏은 창을 한쪽에 휙 던져버린다. 그리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눈앞에 남성을 바라봤다. 남성은 히익 비명을 지르며 뒤로 돌아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뒤에는 노인이 엽총을 들고 서있었다.
노인은 도망쳐 달려오는 남성의 배를 그대로 발로 차버렸다. 그러자 남성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배를 감싸 안았고 그 자세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남성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며 고개를 푹 숙였고 이내 옆으로 쓰러졌다.
주변을 바라보자 이미 현장은 정리되고 있었다. 내가 공격을 가하자 숨어있던 일행들도 바로 습격을 한 모양이었다. 두식이와 노인이 진작 처리했는지 합판방패를 들고 있던 남성 두 명은 한쪽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저쪽 한구석에선 용팔이와 창을 들고 있던 여성이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둘 다 무기는 어따 팔아먹었는지 보이지 않았고 욕설과 고함을 내지르며 사이좋게 개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용팔이는 여성에게 머리가 뜯기며 외쳤다.
‘이 시바!! 놔! 놓으라고! 아, 형님 나서지 마요! 내가 처리할게!’
그러자 용팔이의 머리카락을 뜯던 여성도 지지 않고 외쳤다.
‘웃기고 있네! 미친놈이!’
나와 노인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저 앞에 가만히 서있던 두식이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눈을 껌뻑이며 길게 하품했다. 난 놓고 있던 총을 다시 잡았다. 그리고 뚜벅뚜벅 용팔이 앞으로 걸어가 그 여성이 들으라는 듯 노리쇠를 당겨 장전했다.
철컥.
싸늘한 장전음이 고막을 노크하듯 지나간다. 그러자 용팔이와 여성은 순식간에 움직임을 멈추고 조용히 나를 올려다본다. 용팔이는 씨익씨익 거리며 싸우다가 나를 발견하자 멋쩍게 웃었고 용팔이의 머리끄덩이를 잡던 여성은 조용히 손을 놓는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양손을 들어올렸다.
‘살려주세요…….’
* * * * * *
‘묶어.’
노인은 어디서 챙겨왔는지 모를 노끈들을 가지고와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나와 용팔이 형제는 그것을 받아들고 제압당한 그놈들의 팔과 다리를 노끈으로 꽉 묶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몸수색을 시작했다.
잡다한 것을 나열하기에는 너무 많았다. 그들이 들고 있는 배낭을 열고 바닥에 뿌리자 온갖 잡동사니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 눈에 띄는 건 무전기와 신림동 지도가 그대로 프린트된 종이였다. 노인과 나는 그것을 발견하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노인은 조심히 무전기를 들고 전원을 꺼버렸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조심히 지도를 건넸고 난 지도를 받아들고 빠르게 펼쳤다. 지도에는 신림동의 지형이 자세히 나와 있었는데 부동산에서 가져왔는지 지번이나 도로명들도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그리고 빨간 볼펜으로 x자가 쳐진 곳이 많았는데 이것이 무얼 의미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중요한건 이들은 많은 곳을 지나쳐왔고 그들이 지나친 곳에는 x자가 쳐져 있었다는 것이다. 난 조심히 지도를 접었다.
정체가 뭐지?
의문이 들었다. 무전기와 지도, 그리고 무장 상태와 전투능력을 보아 이 일을 꽤 오랫동안 해왔던 무리다. 나는 그들이 왜 이런 일을 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나는 기절한 그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상황이 정리되자 휴게실에 숨어있던 여자들과 아이들이 쭈뼛거리며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곧 완벽하게 정리된 이들을 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수련은 우리들중 다친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고 이내 밝게 웃었다.
아이들은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쓰러진 그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흥미가 떨어졌는지 여자들 뒤쪽으로 모여 조심히 떠들었다.
난 복잡한 머리를 애써 가라앉히며 노인에게 조용히 말했다.
‘일단 깨웁시다. ‘
그러자 노인은 기다렸다는 듯 생수를 들고 왔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있는 그들 머리에 쪼르르 부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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