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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살아있다-52화 (52/313)

[52]

해는 주황색으로 변해 있었고 석양은 건물들 사이에 걸쳤다. 늦은 황혼, 30분만 있으면 해는 질것이다.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숨죽여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에 난 불안함과 작은 짜증을 느꼈다.

우린 옥상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노인을 바라보자 노인은 정문이 보이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자세를 숙이고 재빠르게 그쪽으로 걸어갔다. 노인도 내 뒤를 바짝 쫓아 따라왔다.

우리는 옥상에서 살며시 얼굴을 내밀고 주위를 열심히 살폈다. 그리고 곧 노인은 나에게 보여줄 것을 발견했는지 손가락을 들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내 시선은 노인의 손가락을 따라 천천히 그쪽으로 옮겨졌다.

한 건물 뒤였다. 이 건물이 생각보다 높았고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이곳보다 낮았기에 한 블록에 있는 거리가 두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한 생존자 무리가 있었다. 난 나도 모르게 총을 들어 올리고 침을 삼켰다.

남자 세 명과 여자 두 명. 상당히 색다른 조합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오래 알고 지낸 듯 좋은 팀워크를 보여주며 신속하고 정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더 놀라운 점은 다섯 명이 한조로 뭉쳐 그놈들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남성 두 명이 조잡해 보이는 방패를 들고 그놈들의 시선을 끌면 그 뒤에 있는 남자 한명과 여자 한명이 길쭉한 창을 들고 단숨에 그놈들 대가리를 찍어 버린다. 그리고 나머지 여자 한명은 그 뒤에서 무언가를 들고 대기 하고 있었다.

나무 재질이라 처음에는 창 인줄 알았는데 들고 있는 폼을 보아 창은 절대 아니었다. 무기 중에 저렇게 들 수 있는 무기는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총이다. 우리는 그것이 총이란 걸 눈치 챈 순간 불안감과 경계심이 몰려오는걸 느꼈다.

이 생존자들, 상당한 베테랑이 분명했다.

합이 척척 맞았고 그놈들 두 마리 정도는 큰 무리 없이 처리했다. 아니, 꼭 사냥을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이 행하는 사냥방법은 굉장히 효율적이고 안전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 사이에 생기기 시작한 균열을 발견했다.

노인은 살며시 내 귀에 속삭였다.

‘불안해보이지?’

난 지체 없이 대답했다.

‘네.’

그들 사이에는 불안감이 깃들고 있었다. 조급함과 공포가 서서히 그들을 찾아온다. 안개처럼 짙은 어둠이 서서히 주위를 장악한다. 사냥의 시간은 끝이 나고 그들의 시간이 찾아온다.

아무리 베테랑이여도 엄습해오는 공포 앞에 면역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들이 이 회색 도시의 주민인 이상 해가 진다는 건 무슨 의미인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저들은 불안해하고 조급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하던 일을 중단하고 다급하게 골목 한쪽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이쪽 블록으로 넘어오는 골목을 지나 다급하게 담을 넘었다. 그리고 이곳으로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급하게 몸을 숨기며 그들에게 포착되지 않게 주의했다.

다시 얼굴을 내밀어 길가를 바라보자 그들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총을 든 여자가 열심히 사방을 둘러보더니 우리가 있는 마트를 가리켰다. 하지만 그 옆에 있던 동료들이 고개를 열심히 흔들며 정문을 가리켰다.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대략 유추할 수 있었다. 총을 든 여자는 이 마트에 숨자고 말했고 그녀의 동료들은 우리가 든든하게 막아둔 정문을 발견한 모양이다. 우리는 숨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해가 졌다.

어둠이 찾아오자 붉은 반딧불이들은 오늘도 사냥감을 찾기 시작한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들은 해가 지자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본다. 그리고 허겁지겁 한 건물을 향해 들어간다. 나와 노인은 그때가 돼서야 고개를 완전히 들고 그들이 들어간 건물을 바라봤다. 노인이 조용히 속삭였다.

‘용팔이 집이네?’

그들이 들어간 건물은 용팔이가 있었던 정육점 건물이었다. 말 그대로 가까운 거리였다. 좀 평화롭게 지내나 싶었는데 다시 한 번 불편한 이웃이 생기고야 말았다. 난 한숨을 푹 내쉬고 옥상 한편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노인이 내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그때 말한 그놈들 아니냐?’

난 고개를 흔들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부랑자.

직접 충돌한 적은 없었지만 그들이 뭐하는 무리인지는 오혜연의 목격담으로도 충분했다. 부랑자들. 우리가 그놈들 다음으로 조심해야할 생존자 무리였다. 호전적이고 파괴적, 그리고 비윤리적인 그들은 최우선 경계대상이었다.

저들은 과연 부랑자들일까?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부랑자가 아니라도 저들이 우리에게 호의적일거란 법은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조차 저들을 완전히 경계하고 있다. 내 옆에 따라 앉은 노인이 불안한 듯 조용히 읊조렸다.

‘꼭 이곳에 올 것 같은 눈치란 말이야…….’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들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이대로 떠나준다면 우리도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까 마트를 가리키던 여성의 손가락이 아직도 생각났다.

아직 물자가 있다는 걸 증명하듯 굳세게 닫힌 정문. 이런 곳을 발견한 이상 나라도 그냥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혹 저들이 절단기 같은 장비라도 챙겨서 침입을 시도한다면 굉장히 위험했다. 노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표정이 몹시 어두웠다.

혼자 결정하기 힘들었다. 이건 일행들과 상의를 해봐야겠다.

나와 노인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마트로 내려갔다.

* * * * * * *

‘이런 시부랄!’

용팔이가 흥분했는지 욕설을 내뱉으며 일어났다. 그러자 노인의 손바닥이 용팔이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용팔이는 꽥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고 노인은 조용히 용팔이를 나무랐다.

‘애들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어…….’

그러자 용팔이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일행들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아이들은 그 모습이 웃긴지 조용히 까르륵 웃었다. 그러자 용팔이도 바보같이 헤 웃으며 웃긴 얼굴을 해 보인다. 그러자 아이들이 다시 한 번 자지러진다.

탁!

깝죽거리는 용팔이를 보고 노인은 다시 인상을 찡그린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풀스윙을 날린다. 그 풀스윙 앞에 용팔이의 머리는 앞으로 푹 숙여진다. 용팔이는 진짜 아프다는 듯 울먹이며 노인을 바라본다. 하지만 노인은 어림도 없다는 듯 주먹을 들어올린다.

그러자 분위기는 다시 차분해지며 소강상태를 맞이한다.

그 분위기속에서 용팔이는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린다.

‘아직 집에서 못가지고 온 게 많은데…….’

얼떨결에 집을 뺏겨버린 용팔이는 처량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마 해가 뜨고 나면 가지고 올 생각이었나 본데 참 운도 지지리 없었다. 두식이는 우리말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순진한 눈망울을 끔뻑거리며 용팔이를 바라본다.

노인은 흠 숨을 내뱉으며 일행들 전부를 바라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와 눈이 마주쳤고 노인은 조용히 읊조렸다.

‘싸워야할지도 몰라.’

전후사정은 일행들에게 전부 설명했다. 그들의 인원 그리고 무장상태, 또 현재위치까지. 일행들은 처음에 불안해하면서도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며 해결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지금처럼 안정적인 분위기를 되찾았다.

학습효과였다.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모두 종말 앞에 적응한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인내를 배우고 어른들의 말을 군소리 없이 따른다. 그리고 여성들과 남자들은 자기들 할 일을 찾으며 매사 최선을 다한다.

그것이 이 무리를 이끄는 원동력 이였고 그 힘은 지금 같은 위기 상황에서 최대의 효과를 발휘했다. 이제는 어떤 적이 와도 무섭지 않았다. 우리는 두려움이라는 적을 몰아내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용팔이가 외쳤다.

‘확! 우리가 먼저 쳐들어가버리죠!’

나와 노인은 동시에 대답했다.

‘안 돼.’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선공을 해볼까 생각해봤지만 결과에 비해 리스크가 너무 컸다. 우리의 장점은 끈끈한 유대감이었다. 만약 무리하게 행동을 취하다 한명이라도 다치거나 죽는 날에는 그 유대감에 금이 가버리고 만다.

최대한 피해 없이 일을 진행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저절로 수동적이고 방어적으로 변했다. 우리가 선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저들이 이곳에 침입한다는 전제를 깔고 계획을 짜야한다.

우리는 머리를 모으고 회의를 시작했다.

아이들이라고 빠지지는 않았다. 물론 아이들이 안건을 내는 건 아니지만 자리에는 꼭 참석시켰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진지하게 회의를 하는 모습을 보며 조용히 과자를 먹고 있었다. 졸거나 정신을 파는 아이들은 없었다.

회의는 30분간 이어졌다. 더 치밀하고 완벽한 계획을 짜고 싶었지만 슬슬 보초를 설 시간이다. 회의를 통해 30분간 우리가 내린 결론이 이것이었다.

매복.

매복의 효과는 그동안 톡톡히 봤었다. 그놈들을 상대할 때나 군인들을 상대할 때나 뜻밖의 공격이 가해지면 상대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더군다나 최후방에 있는 총을 먼저 제압해야 하는지라 정면공격은 무리였다.

우리는 그들을 마트 안으로 끌어들일 것이다.

만약 그들이 아무런 방해 없이 마트로 들어온다면 안심하며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 이 물품들은 온전히 우리의 것이구나. 그리고 그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한 마트 안에서 무방비한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우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몸을 숨기고 매복해 있다가 사방에서 그들을 덮친다. 어쩌면 적을 우리 둥지로 끌어들이는 위험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둥지가 호랑이굴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실 싸우기 싫다.

제압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어쩌면 사람을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되도록 그런 상황이 오지 않았으면 한다. 하지만 망설이지는 않을 것이다. 안전을 위해 싸움을 준비한다. 그것은 그간 겪어왔던 경험이 알려주는 조언이었다.

총을 꺼내 대검을 착검한다. 그리고 탄창 두 개를 챙기고 허리춤에 끼어 넣는다. 노인은 꼬챙이와 엽총을 챙기며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강수련에게도 탄창을 빼고 대검을 착검한 총을 내밀었다. 그녀는 마지막 보루다. 아이들과 여자들을 지켜달라는 부탁을 하니 강수련은 굳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여자들과 아이들을 휴게실 안으로 들여보냈다.

당연히 용팔이 형제도 무장시켰다.

하지만 총은 3자루뿐 이였고 나와 강수련이 무장하니 한 자루밖에 남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용팔이에게 나머지 한 자루를 넘겼는데 대검은 줬지만 탄창은 주지 않았다. 용팔이가 펄쩍 뛰면서 날뛰기에 군대는 다녀왔냐고 물어봤다.

공익이라길래 뒤통수를 쳐줬다.

용팔이가 말하길 두식이는 면제라 했다. 자세한 사정은 물어보지 않았지만 아마 정신적인 문제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냥 넘겼다.

당연히 두식이는 총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총을 들지 않는 두식이는 용팔이보다 든든해보였다.

우리는 옥상으로 올라갔고 두 명씩 보초를 섰다. 유난히 날씨가 추웠다. 난 입김을 훅 내뱉으며 눈을 꼭 감는다.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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