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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살아있다-51화 (51/313)

[51]

내 말을 들은 강수련은 김치찌개와 식사를 준비했다. 3일을 굶은 그들을 위해 햇반을 여러 개 넣은 흰죽을 끊였고 자극적이지 않은 반찬도 여러 개 준비했다. 그리고 뒷문이 열리고 노인과 함께 용팔이 형제가 안으로 들어왔다.

조카는 삼촌! 을 외치며 용팔이에게 달려가 안겼고 어느새 옷을 입은 용팔이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품안가득 조카를 안았다. 앞서 걸어오던 노인은 길게 하품하며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강수련과 다른 여자들에겐 일행으로 받을 사람을 데려온다고 넌지시 말해두었다. 하지만 일행들이 경계심을 푸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일행들의 시선에는 경계심만 있을 뿐 배척이나 두려움은 없었다. 이런 식으로 하나둘 모인게 우리들이니까.

용팔이와 그의 동생은 일행들을 보는 족족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했고 일행들도 얼떨결에 인사를 받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이들은 경계보단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용팔이와 그의 가족들을 보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고 난 그 침묵을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다가 이내 박수를 한번 쳤다. 그리고 용팔이 가족을 바라보며 말했다.

‘식사하시죠.’

식사.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일 것이다. 식사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용팔이의 눈은 멍하니 변했고 그 옆에 있던 조카와 동생은 본능적으로 침을 삼켰다. 그리고 저절로 눈이 돌아가 김치찌개와 흰죽을 멍하니 바라본다.

그리고 간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난 아무 말 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용팔이 가족들은 허겁지겁 음식 앞으로 다가가 식사를 시작했다.

우리가 폭풍 같은 식사를 했다면 이들의 식사는 아마겟돈과 같았다. 용팔이는 허겁지겁 뜨거운 흰죽을 먹으면서도 조카를 잊지 않고 챙겼고 그의 동생은 무슨 곰마냥 끊임없이 음식물을 밀어 넣었다.

아무래도 부족할 것 같았다. 강수련은 기겁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다 이내 햇반과 다른 부식들을 챙겨서 그들 근처에 놓아주었다. 얼굴이 샐쭉한걸로 보아 이들이 너무 많이 먹어서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강수련이 음식을 더 가져다주자 용팔이는 잊지 않고 고개를 숙여 감사함을 표한다. 그리고 강수련을 잠시 바라보다 나를 바라보고는 웃으며 말한다.

‘형님, 사모님이 참 예쁘십니다.’

나는 그 소리에 볼을 긁적였다. 아까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오해를 하는 모양인데, 참 곤란했다. 내가 아니라고 말 하려는 순간 갑자기 강수련이 환하게 웃으며 음식들을 더 가지고 왔다. 그리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드세요.’

그러자 용팔이는 헤헤 웃으며 염치도 없는지 음식을 더 받아 들었다. 난 웃고 있는 용팔이와 나에게 눈웃음을 지어보이는 강수련을 멍하니 바라봤다.

벌써 친해졌나?

한참동안 폭풍 같은 식사는 이어졌고 그들의 식사를 지켜보던 노인은 내 옆으로 오더니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후회가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내가 돼지새끼들을 데려왔어…….’

그리고 노인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용팔이의 동생을 가리키며 물었다.

‘용팔이! 동생 이름이 뭐야?’

노인의 물음에 용팔이는 입에 욱여넣은 음식물을 필사적으로 씹으며 꿀떡 삼켰다. 음식을 삼킨 용팔이는 동생 옆으로 다가가 그만 좀 처먹어! 하고 외치며 뒤통수를 친다. 그리고 노인에게 고개를 숙이도록 뒤통수를 꾹 눌렀다.

‘헤헤 두식입니다! 두식이.’

그러자 두식이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사슴 같은 눈망울로 우리를 바라봤다. 큰 덩치답지 않게 참 순수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두식이는 노인과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 다시 음식물을 입안으로 욱여넣었다.

노인은 작게 탄식하며 말했다.

‘저놈은 내일부터 다이어트야.’

그러자 두식이가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먹는 걸 멈추지는 않았다.

* * * * * * *

식사가 끝났다.

식사가 끝나자 용팔이와 가족들은 일사불란하게 그릇들과 쓰레기들을 치웠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마트 한쪽에 모였고 용팔이 가족을 중심으로 둥글게 뭉쳤다. 그리고 노인이 삐딱하게 서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빠릿하게 잘해. 밥만 축내지 말고.’

그러자 용팔이는 넙죽 엎드려 울먹였다.

‘영감님 진짜 감사합니다!’

참 무릎이 싼 남자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용팔이가 넙죽 엎드리자 그걸 멍하니 바라보던 두식이도 따라 엎드렸다.

조카는 자리에 없었다. 어딜 갔나 찾아보니 벌써 아이들 틈에 껴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아이들이란 참 신기했다. 서로가 이름을 물어보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울려 놀았다. 키가 작건 크건 말을 잘하건 못하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참 바쁘게도 놀았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노인이 갑자기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얘가 대장이야. 알았어?’

그러자 용팔이와 두식이가 나를 올려다본다. 난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서 어이없는 얼굴로 노인을 바라봤다. 노인은 익살스럽게 웃고 있었고 그 모습을 바라본 나도 결국 마주 웃고 말았다.

표정하나 없던 노인이었다. 하지만 손녀를 구하고 나와 만나 이렇게 일행들을 꾸리자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웃음이 많아졌고 가끔 이렇게 농담도 건넨다. 아이들에겐 좋은 할아버지, 그리고 여자들에겐 든든한 아버님.

좋은 변화였다. 나는 웃으며 노인에게 대답했다.

‘제가 대장입니까?’

그러자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용팔이 머리를 탁 치더니 일으켜 세운다.

‘맞잖아, 골목대장.’

나도 노인도 소리 내서 웃고 말았다.

용팔이와 두식이는 나이 먹고 이게 뭐하는 짓이냐는 얼굴로 우리를 한심하게 보고 있었다. 난 나도 모르게 형제의 머리를 탁탁 때리고 말았다.

* * * * * *

갑작스런 손님의 등장으로 하지 못한 일이 잔뜩 쌓여있었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다시 창고 내부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나와 노인, 그리고 용팔이 형제는 마트 정문으로 다가가 머리를 굴렸다.

마트 정문은 당겨서 여는 유리문과 방범창 하나가 있었다. 방범창은 무지개 패턴과 회색이 섞인 구형 방범창이었고 그 뒤로는 유리문이 있었다. 유리문의 강도는 당연히 약할 것이고 방범창은 사람을 상대로는 쓸 만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놈들이었다.

충돌을 최대한 회피한다 해도 변수라는 게 존재했다. 언제 어디서 그놈들이 쳐들어올지 모른다. 그렇다는 것은 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인데 이 얇은 방범창으로는 완전한 방어가 불가능했다.

난 처음 들어왔을 때 했던 생각을 노인과 형제에 말했다.

마트 내부에는 물품들이 다양하게 존재했다. 그 중에는 우리가 당장 쓰지 않는 섬유 유연제나 세제 혹은 액체로된 생필품들이 많았다. 당연히 무게가 많이 나갈 것이고 그것을 박스째 담아둔다면 성인남성도 들거나 밀어서 옮기기 힘들었다.

그놈들은 입체적인 행동을 하지 못한다. 방범창을 들어 올린다거나 문고리를 돌린다거나 하는 행위를 하지 못한다는 건 이곳을 습격했을 때 단순히 1차원적인 행동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밀거나 손을 이용해 부수거나.

그 점을 생각해봤을 때 단순히 문 앞에 박스들을 쌓아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들을 제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조곤조곤 설명하자 노인과 형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것을 제외한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축내느니 일단 움직이기로 결정을 내렸다.

용팔이와 두식이는 밥값을 하겠다는 듯 내 지시에 따라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난 노인에게 우리가 작업할 동안 주위를 경계할 것을 부탁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엽총을 잡고 바쁘게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우리는 본격적인 노동을 시작했다.

쓰지 않는 물품이 담긴 박스를 가지고와 마치 블록놀이를 하듯 문 앞에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벽돌집을 쌓는 마음으로 틈 하나 없이 박스를 쌓는다. 고되고 힘든 일이었지만 안전을 위해서란 생각을 하니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추운 날씨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근육은 딱딱하게 뭉쳤고 시간이 지나자 온몸이 땀범벅으로 변했다. 용팔이와 나는 결국 지쳐서 마트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직 반도 하지 못했는데 벌써 뻗어버렸다.

나와 함께 바닥에 주저앉은 용팔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님, 담배 좀 펴도 됩니까?’

난 까칠하게 대답했다.

‘죽고 싶으면 펴.’

그러자 용팔이는 시무룩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담배는 기호식품이다. 그리고 흡연자에게는 극한 스트레스와 두려운 상황을 잠시나마 회피해줄 수단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용팔이에게 웬만하면 끊으라는 말을 해줬다.

물론 마트 내부에 담배는 차고 넘쳤다. 하지만 이곳은 아이들과 여자들이 많이 있는 공간이다. 간접흡연을 고려하면 실내흡연은 당연히 안 되고 그렇다고 밖에서 피는 것은 더더욱 안 된다. 담배 냄새는 굉장히 자극적이고 담뱃불은 밤이 되면 멀리서도 보인다.

그깟 담배 하나 때문에 우리들의 위치가 발각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쥐죽은 듯 살아야한다.

‘익숙해질 거야.’

난 용팔이에게 그렇게 위로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정면에 보이는 광경에 집중했다.

사실 이렇게 쉬어서는 안 된다. 해가 지면 그놈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그놈들은 소음 하나하나에도 굉장히 민감하고 사나웠다. 그렇기에 야간작업은 되도록 피해야 하는 것 중 하나였다.

그렇다는건 결국 해가 떠있을 동안 이 작업을 끝내야 한다는 소리인데, 이러고 쉴틈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앉아서 쉬고 있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불도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식이는 생체 불도저였다.

두식이는 밥값을 하겠다는 의지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두식이는 상자 여러 개를 가뿐하게 들어 올리고 쉴틈없이 움직여 상자를 쌓는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나도 모르게 멍하니 두식이를 바라봤다. 처음에는 많이 먹는다고 뭐라 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연비도 좋고 힘도 좋은……. 두식이는 불도저 그 자체였다.

난 용팔이를 노려봤다. 형만 한 아우 없다더니, 그건 다 거짓말이었다. 난 껌을 짝짝 씹으며 두식이를 응원하는 용팔이 뒤통수를 후리며 물어봤다.

‘넌 잘하는 게 뭐야?’

용팔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브레인?’

지가 말하고도 어이가 없는지 용팔이는 헛기침을 했다. 우리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돌았고 난 말없이 일어났다. 그리고 두식이를 따라 다시 일을 시작했다. 용팔이는 다급하게 나를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 *

그리고 시간이 흘러 모든 정리가 끝났다.

우린 결국 해가 지기 전에 작업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여자들과 아이들도 마트 정리를 끝냈는지 마트 내부는 훨씬 깨끗해져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그리고 조용히 떠들며 하나 둘 휴식을 취했다.

난 이중으로 막혀있는 굳건한 정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정도면 안심이겠거니 하고 한숨을 내쉬며 목장갑을 벗었다. 두식이는 내 옆에 서서 끔뻑끔뻑 나를 바라봤다. 내가 팔을 톡톡 치며 수고했다고 말하자 두식이는 쑥스럽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인다.

이제 곧 해가 진다.

여자들은 다시 분주하게 움직이며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아이들은 한쪽에서 휴식을 취하며 그 모습을 바라본다. 난 개운한 기지개를 펴며 길게 하품했다.

‘동윤.’

순간 흠칫했다. 내가 빠르게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노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따라오라는 듯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가리킨다. 무슨 일이 있다! 그렇게 직감한 나는 일행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조용히 노인을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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