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그 종이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옥상 바닥에 찰싹 붙어 계속해서 사방을 둘러봤다. 하지만 돌은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고 결국 어디서 보내는 쪽지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난 결국 포기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문과 창문을 하나하나 점검하고 다시 옥상위로 올라왔다.
그놈은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걸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낮에 우리가 이곳으로 들어온걸 봤다는 뜻인데 기분이 착 가라앉고 불쾌감이 몰려왔다. 돌멩이를 날릴 수 있는 거리다. 먼 거리가 아니라면 옆 건물이거나 길 건너 건물일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주위 건물 옥상과 창문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없었다. 난 찜찜한 기분을 안고 노인과 교대하기 전까지 날카로운 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그리고 살얼음판 같은 두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별다른 변화는 없었고 난 결국 노인에게 다가가 노인을 깨웠다.
노인은 천천히 일어나 엽총과 손전등을 잡았다. 난 노인에게 긴말 없이 주위를 경계하라고 말했다. 지금은 밤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가 뜬 뒤에 해도 충분했다. 노인도 내 굳은 얼굴을 발견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노인이라면 내 의도를 대충이나마 눈치 챘을 것이다.
그리고 난 복잡한 생각은 안고 천천히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이 복잡했다. 하지만 지금은 충분히 쉬어야할 시간이다. 난 담요를 머리끝까지 덮고 잠에 빠져들었다.
* * * * * *
누군가 나를 흔들었다.
눈을 뜨자 노인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 사이로 햇빛이 새어 나오는 게 아마 아침이 된 모양이었다. 난 오랜만에 숙면을 취했고 온몸은 나른함으로 가득했다. 난 시원한 기지개를 펴며 긴 하품을 했다.
주위에선 맛있는 냄새가 났다.
텐트에서 나오자 창문 사이로 새어나오는 아침햇살이 나를 맞이했다. 그리고 창고 한쪽에선 강수련이 쪼그려 앉아 무언가를 끓이고 있었고 노인은 그 옆에서 열심히 밥을 퍼먹고 있었다. 맛있는 냄새의 원인은 저것이었다.
‘밥 먹어.’
노인은 밥알을 남김없이 입에 욱여넣으며 나에게 말했다. 난 코를 녹이는 맛있는 냄새 때문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선을 냄비안 물체를 향해 고정시켰다. 그곳에는 보글보글 끓고 있는 김치찌개가 있었다.
난 나도 모르게 감탄하며 냄비 앞으로 기어갔다. 그리고 준비된 밥을 뜯고 허겁지겁 수저를 들어올렸다. 무려 김치찌개다. 참치가 들어간 김치찌개는 내 정신을 쏙 빼놓았다. 난 떨리는 손으로 수저를 찌개로 가져갔고 경건한 자세로 국물 한입을 삼켰다.
아, 일기로 쓰면서도 그 맛이 잊히지가 않는다.
‘결혼할 남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복 받았네.’
노인은 흐뭇하게 웃으며 밥 한 알 남기지 않고 몽땅 먹어치웠다. 노인의 칭찬에 강수련은 수줍게 웃으며 김치찌개를 휘저었다. 난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이 김치찌개는 정말 맛있었다. 난 밥을 퍼먹다 말고 문득 생각이 들어 그녀에게 물어봤다.
‘애들은요?’
그러자 그녀는 웃으며 생수 한 병을 나에게 건넸다.
‘벌써 밥 먹고 놀고 있어요.’
난 물을 꿀꺽 삼키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저래 신경 쓸게 너무 많았는데 그 짐을 강수련과 다른 여성 멤버들이 조금씩 덜어주고 있었다. 채연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야한다. 그리고 누군가에 세심한 캐어가 필요했다.
그 역할을 해주는 강수련을 향해 난 큰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잠시 수저를 입에 물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놈들에게 강제로 잘린 머리를 가리기 위해 예쁜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하루사이에 안색도 좋아지고 살도 붙었다.
내가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도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친 강수련은 갑자기 고개를 숙인다. 저번에 화냈던걸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 걸까? 나는 얌전히 식사를 계속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난 수저를 내려놓았다. 국물 한 방울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소중한 식사를 끝냈다. 난 포만감과 나른함을 느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강수련이 그릇들을 챙기고 계단을 내려갔다.
강수련이 자리를 뜬 순간 노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나도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노인을 마주보며 천천히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어제 돌멩이들 사이에 날아온 쪽지를 꺼내들고 노인에게 건넸다.
노인은 그것을 받아들고 한참을 뚫어져라 노려본다. 그리고 얼굴을 굳히며 싸늘한 음성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다 지켜보고 있었군.’
난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가 이곳으로 들어 왔다는 것, 그리고 해가 지자 옥상으로 올라온 것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예상하기로는 이곳에 물품들을 노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마 자물쇠와 방범창 때문에 실패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다 우리가 들어가는걸 발견했고……. 접선을 시도한 것 같다. 사실 이 쪽지를 보낸 의도를 잘 모르겠다. 식량을 목적으로 하는 협상 시도인가, 아니면 순수하게 도움을 구하는 것인가. 우리는 창고 바닥에 앉아서 잠시 동안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난 결국 한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채연이좀 보고 올게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쪽지와 엽총을 잡고 천천히 일어났다.
‘망보고 있겠네.’
* * * * * * *
계단을 내려와보니 마트 내부는 조금 정돈된 기분이었다. 나는 무슨 일인가 하고 유심히 마트 내부를 쳐다봤고 순간 내 앞을 지나가는 강수련을 발견했다. 난 그 모습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시야에는 일행들이 분주히 물건들을 옮기는 모습이 들어왔다.
먹을 수 있는 건 따로 정리하고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은 봉지에 담아 모아둔다. 아이들도 작은 고사리 손으로 여자들을 도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 채연이도 있었다. 채연이는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아이들과 히히덕거리며 물건을 옮기고 있었다.
요즘 채연이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말을 더듬거리기는 하지만 분명히 의사표현도 하고 있었고 불안한 기색도 많이 사라졌다. 난 그 모습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다 이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채연이를 보고 양팔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채연이는 물건을 바닥에 내려놓고 도도도 소리를 내며 나를 향해 뛰어왔다. 그리고 내 품속에 쏙 들어와 나를 안았다. 난 품속에 채연이를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행들이 일하고 있는데 나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나도 그들을 도와 물건을 옮기려고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강수련이 나에게 다가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를 만류했다. 그리고 잠시 나를 한쪽 구석으로 데려가더니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속삭였다.
‘무슨 일 있죠?’
난 순간 당황했다. 노인을 제외한 일행들에게는 알리지 않으려고 했었다. 이제 갓 평화를 찾은 일행들에게 확실치 않은 일로 불안해하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아까 옥상에 있을 때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모양이었다.
난 잠시 뜸을 들이며 어떻게 그녀에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는 내 팔을 툭 치더니 계단을 가리켰다.
‘여긴 우리가 정리하고 있을게요. 올라가 봐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빙긋 웃더니 다시 일행들 곁으로 걸어갔다. 난 잠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뭘 하든 믿겠다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난 따뜻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작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난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보호해야할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보호해야할 대상이 아닌 그저 나와 같은 길을 걸어가는 ‘우리’였다. 난 그 생각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 노인이 있는 옥상으로 향했다.
계단을 걷고 있는데 옥상 문에서 노인이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발견하곤 조금 큰 소리로 나에게 외쳤다.
‘스케치북! 매직!’
난 그 외침을 듣자마자 재빠르게 계단을 내려가 많은 박스들 사이에서 노인이 말한 물건들을 찾기 시작했다. 필기구가 모여있는 곳에서 큰 스케치북을 찾고 유성매직도 색깔별로 하나씩 꺼내들었다.
내가 무언가를 한 아름 들고 가자 일행들이 나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하지만 그 시선들을 애써 지나치며 재빠르게 계단 위를 올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으로 올라서자 노인이 정문이 보이는 방향에 서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건들을 들고 그쪽으로 걸어가 노인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은 정육점 건물 옥상이었고 그 위에는 한 남성이 서 있었다. 그 남성도 나를 발견했는지 살짝 움찔거린다. 그러다 갑자기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 왔다.
뜬금없었다.
지금 같은 세상에선 초면의 인사조차 생소하게 느껴졌다. 생존자끼리 마주친 순간 서로를 죽이고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총이나 협박대신 갑자기 받은 인사 앞에 난 벙찌고 말았다.
노인도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했다.
‘또라이 같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 대답을 들은 노인은 잠시 고민하다 싶더니 나한테서 스케치북과 매직 팬을 뺏어들었다. 그리고 매직 팬을 이용해 무어라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노인은 스케치북을 머리위로 들어 올려 저 앞에 남자가 글자를 읽도록 했다. 스케치북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너 뭐야?]
그 글자를 읽은 남성은 갑자기 머리를 긁적이더니 연신 뒤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쪽을 향해 달려가더니 손에 무언가를 들고 다시 나왔다. 유심히 그것을 바라보니 우리와 같은 스케치북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스케치북을 들어 올렸다.
[용팔이요.]
우리 사이에 작은 정적이 흘렀다. 잠시 뒤 노인은 바닥에 내려둔 엽총을 꺼내 그 남자를 조준했다.
‘미친놈이 누가 이름 물어봤어?!’
노인이 화를 내며 엽총을 조준하자 그 남성은 깜짝 놀라 바닥에 엎드렸다. 나도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노인을 만류하며 엽총을 내려놓게 했다. 진짜로 쐈다가는 큰일 난다. 그리고 나는 노인에게서 스케치북을 뺏어들고 글을 썼다.
[어제 쪽지 보낸 거 너야?]
그러자 상대는 겁을 먹었는지 잠시 눈치를 봤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살며시 스케치북을 들어올린다. 그곳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네, 저 맞습니다.]
[만나서 이야기 좀 해주세요.]
그는 스케치북 두 장을 연달아 보여주며 무언가를 호소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난 당연히 의심하고 경계했다. 꼭 만나서 이야기해야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리 좋은 쪽으로 보려고 해도 결론은 이거였다.
불가.
난 스케치북을 내려놓고 길게 하품했다. 시간만 낭비한 셈이다. 은신처 앞에 저런 놈이 있다는 게 찝찝하긴 했지만 저놈이 동귀어진을 각오하지 않는 이상 우리를 해치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보초를 설 때 저곳을 더 경계해야겠다.
난 손목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했다. 노인도 저놈에게서 신경을 끊었는지 길게 하품하며 기지개를 폈다. 마트 밑에 가서 일행들을 돕고 물품들을 분류해야겠다. 생각을 마치고 뒤로 돌려는 순간 남자가 황급하게 스케치북을 들어 올리며 붕붕 흔들었다.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어떻게 하면 만나주실 겁니까?]
참 끈질긴 또라이다. 그 남성의 순진무구한 눈빛을 바라보며 노인도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순수한 건지 아니면 순수한척 연기를 하고 있는 건지. 나와 노인은 인상을 찡그리고 잠시 옥상에 걸터앉았다.
난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반 장난삼아 스케치북에 갈기듯 글을 쓰고 들어올렸다.
[아무것도 입지 말고 토끼뜀으로 오던가.]
노인은 웃음이 터졌는지 얼굴을 가리고 큭큭 웃었다.
어찌 보면 맞는 말이다.
우리가 낯선 상대를 경계하지 않으려면 적어도 그 상대가 무기를 들고 있지 않음을 알아야했다. 그리고 무기를 숨길 수 있는 의류도 포함되었다. 난 설마 저놈이 이 짓을 고분고분 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한 말, 그것은 좀 저속하게 말하자면 재밌자고 한 말이었으니까.
그리고 답장은 없었다.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 나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노인에게 말했다.
‘문을 제대로 막아야겠죠?’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도 아마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저 무거운 것들을 모두 옮기려면 부지런히 옮겨야했다. 난 노인에게 먼저 내려가 있겠다고 말하고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내가 걸어가는 순간, 노인이 경악한 듯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
‘저, 저 미친놈…….’
순간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나는 황급히 몸을 돌리고 노인 옆으로 황급하게 뛰어갔다. 그리고 노인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며 경악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남성이 토끼뜀으로 길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유난히 덜렁거리는 육체를 바라보며 난 황급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뒤로 돌아 빠르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채연이에게 저딴 장면을 보여줘서는 안 된다. 내 뒤에서는 노인의 읊조림이 조용히 들려왔다.
‘말세야, 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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