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48화 (48/313)

[48]

난 긴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었지만 정확하게 생각나는 단어가 없었다. 그냥 오늘 하루는 푹 쉬고 싶었다. 일행들도 마찬가지인지 짐을 풀 생각도 안하고 모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노인이 준 손목시계를 확인하자 점심때가 훨씬 지났다. 빠르게 마트 내부를 확인하고 짐을 풀어야겠다. 고된 몸을 겨우겨우 일으켜 뒤를 바라봤다. 그러고 잠시 아무 말 없이 일행들을 바라봤다. 일행들 사이에서 묘한 침묵이 돌았다.

모두가 갑자기 찾아온 평화 앞에 적응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나는 멍하니 있는 일행들을 향해 박수를 한번 치고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할 일 합시다.’

* * * * * * *

마트 내부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작은 규모는 아니었다. 마침 물건이 들어오는 날이었는지 내부에는 쌓인 박스들로 가득했다. 든든한 마음으로 박스들을 바라본 뒤 가장먼저 문들을 확인했다. 우리가 들어온 정문은 유리문과 방범창으로 단단하게 막혀 있었다. 하지만 혹시 몰랐기에 바리케이드를 세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마침 세제나 섬유 유연제 같은 무거운 물품들이 남아돌았다. 박스에 담아 이 문 앞을 빼곡히 막아야겠다.

하지만 문은 하나가 아니었다. 마트 뒤쪽으로 향하자 직원들이 쓰는 문인지 작은 철문 하나가 존재했다. 열린 흔적은 없었고 창문을 통해 살짝 밖을 살펴보자 좁은 골목 하나가 보였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난 조심히 문손잡이를 놓으며 잠금장치를 확인했다.

그리고 마트 내부에 있는 방들을 하나하나 열어보며 내부구조를 파악했다. 생각보다 내부구조는 간단했다. 직원 휴게실겸 탈의실로 보이는 방 하나, 그리고 물품들을 쌓아두는 큰 창고 하나가 있었다. 그곳도 다양한 물품들이 박스째 쌓여 있었다.

그 외에는 화장실이 있었는데 쓸모 있어 보이는 물품은 발견하지 못했다. 마트에 봉지가 아주 많으니 이곳에 봉지를 두고 뒤처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일단 일행들을 이끌고 직원 휴게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일행들에게 이곳에 짐을 풀라고 말해둔다. 아무래도 여자와 아이들은 이방에서 자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바닥에 장판이 깔려 있었고 마트 안쪽에 위치하는지라 심리적으로 안심이 되었다.

가뜩이나 불안 증세를 보이는 아이들이였다. 그리고 채연이도 알게 모르게 지쳐가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정신적 충격으로 이름을 기억 못하는 아이들과 아직도 말을 더듬는 아이들에게는 특별한 케어가 필요했다.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오혜연과 김시은에게 따로 말을 해봐야겠다.

어느새 우리들은 휴게실 안에 둥글게 모여 있었다. 추운 날씨에도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자연스럽게 기대고 있었다. 난 침을 꿀꺽 삼키며 손목시계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육포를 먹은 뒤로 물 한 모금, 음식 한입 먹지 못했다.

아마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기다리는 시간이 아닌가 싶었다.

난 종이와 펜을 찾아 손에 들었고 모두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떨며 말을 더듬었다. 저절로 침이 고여 목 안으로 넘어간다.

‘주문.’

그러자 여기저기서 폭풍 같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라면부터 시작해서 따뜻한 밥과 다양한 반찬들 그리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인스턴트식품부터 과자들까지. 그리고 저 뒤에서 노인이 소심하게 손을 들고 막걸리를 말하길래 가볍게 무시했다.

물자는 풍족했다. 장기적으로 볼 때는 체계적인 식단을 짜고 식량을 아껴먹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원 없이 먹을 것이다. 그동안 고생했던 일행들과 하는 회식이자 기념 파티다. 일행들의 밝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채연이도 한쪽에서 손을 들며 ‘꽈자!’ 하고 외친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줬다.

* * * * * *

쇼핑 하는 마음으로 장바구니를 들었다. 여자들이 돕겠다고 나섰지만 난 한숨 돌리라고 말한 뒤 나 혼자 휴게실을 나왔다. 곧 음식을 먹을 생각을 하니 이 움직임조차 즐겁게 느껴졌다. 일단 나는 마트 내부를 부지런히 걸으며 식품 상태를 확인했다.

전기가 끊긴 이상 신선도를 유지해주는 장치는 없을 것이고 물론 시간도 많이 흘렀다. 날씨가 춥다고는 하지만 유통기한이 짧은 식품들을 무리해서 먹을 이유는 없었다.

유통기한을 확인하니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분명하게 나누어졌다. 오늘은 휴식을 취하고 내일 한꺼번에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며 장바구니에 식품들을 담기 시작했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물품의 종류는 상당히 많았다. 일단 손이 가는대로 음식을 담고 냄비와 부탄가스 그리고 휴대용 가스레인지까지 담았다. 별로 돌지도 않았는데 장바구니는 벌써 묵직해져 있었고 그만큼 내 마음도 든든해졌다.

나는 휴게실로 돌아가 재빠르게 문을 열고 음식들을 풀었다. 내가 가져온 음식들을 보자 일행들 얼굴은 환해졌고 이내 각자 움직이며 빠르게 식사준비를 시작했다. 여자들은 능숙하게 가스레인지를 켜 음식을 준비하고 아이들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그릇과 수저를 분배한다.

노인과 나는 움찔거리며 할 일을 찾다가 결국 강수련에게 한소리 듣고 말았다. 그리고 구석에 앉아서 그 모습을 구경했다. 조잘조잘 떠들며 식사준비를 하는 일행들의 모습을 표현하자면……. 한마디로 보기 좋았다.

곧 맛있는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비록 인스턴트가 대부분 이였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이런 음식도 감지덕지였다. 햇반을 하나씩 받아들고 가져온 반찬들을 골고루 개봉했다. 그리고 중앙에는 먹음직스러운 라면이 놓여졌다.

우리는 둥글게 앉아 수저를 양손에 들고 가만히 침을 삼키며 음식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모든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난 경건한 의식을 치르듯 고개를 한번 꾸벅인다. 그리고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먹겠습니다.’

그러자 일행들은 모두 합창하듯 나를 따라 외치며 그릇에 코를 박았다. 나는 뜨거운 물을 이용해 따뜻하게 데운 햇반을 양손으로 들고 포장지를 벗겼다. 고슬고슬하고 윤기 있는 밥알에 저절로 침이 넘어갔다.

우리는 전쟁 같은 식사를 치렀다. 정말 오랜만에 먹는 제대로 된 식사였다. 따뜻한 밥과 따뜻한 국물. 그 두 개가 주는 감동은 영영 잊지 못할 만큼 고마웠다. 식사를 하는 동안 일행들 사이에 묘한 침묵이 돌았다.

대화는 없었고 오직 음식을 씹고 정신없이 면발을 삼키는 소리만이 방안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소리들 사이로 히끅 히끅 울음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여자들은 잠시 그릇을 내려놓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아이들은 서툰 수저질로 입안에 음식을 욱여넣으면서 흘린 눈물과 콧물도 같이 삼켰다. 노인은 그 모습을 아련하게 바라보며 잠시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도 노인을 따라 천천히 그릇을 내려놓았다.

일행들은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안전한 방안에서 사람들과 옹기종기 모여 따뜻한 음식을 먹는다. 그놈들이 나타난 이후로 다시는 못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꿈같은 상황이 막상 눈앞에 다가오자 일행은 기쁨과 더불어 서러움과 슬픔을 느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말없이 고마움을 표현했다.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꼭 1년이 지난 것 같았다. 그만큼 길고 힘든 여정이었다. 일행은 우리라는 이름으로 서로가 유대감을 확인했다.

그리고 우리는 점점 노인이 말하는 개미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 * * * * * *

식사를 끝내자 해가 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신나서 과자를 뜯었고 여자들은 분주하게 먹은 식기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오래가지 않았다. 피곤은 흙마냥 우리 몸속에 축적되고 있었다.

밝게 웃으며 과자를 먹던 아이들은 빠르게 골아 떨어졌고 여자들도 그 사이에서 잠들어 버렸다. 난 잠이든 채연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노인은 밥을 먹자마자 잠시 주변을 살펴보고 오겠다고 말하며 나가버렸고 난 조용한 방안에서 긴 상념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이내 문이 열렸고 노인이 나를 조심히 불렀다.

난 채연이를 담요위에 올려두고 춥지 않게 담요를 여러 장 덮어줬다. 그리고 일행들이 깨지 않게 조심히 일어나 문을 열고 휴게실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노인이 차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노인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안 피곤해?’

‘피곤하죠.’

당연히 피곤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하루 종일 뛰고 싸운 기억밖에 없었다. 마음 편하게 자본적도 없었고 제대로 식사를 한 기억도 없었다. 그만큼 내 몸은 당장 탈진을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노인도 다 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옥상이 있어. 거기에 있으면 주위도 훤하게 보이고.’

난 그 말을 듣자마자 노인의 의도를 알아챘다. 노인도 피곤한지 하품을 길게 해 보이고 어디서 꺼내왔는지 모를 껌을 입안에 넣었다. 그리고 마치 나에게 잠이라도 깨라는 듯 껌 하나를 건넸다. 난 그 껌을 받아들고 입안에 욱여넣었다.

‘보초를 서야해. 완전히 안전한곳은 아니니까.’

난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동의했다. 방범창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방범창은 그놈들 한 무리만 몰려와도 쉽게 뚫린다. 그리고 혹시 모를 생존자들의 습격도 경계해야 했다. 누가 뭐라 해도 이곳은 식량이 쌓여있는 물품 창고니까.

그리고 노인은 나한테 손목시계를 달라는 말을 해오며 엽총과 담요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디서 챙겨왔는지 모를 간이 텐트와 거대한 손전등을 양손에 들고 나에게 말했다.

‘올라가자고.’

난 고개를 끄덕이며 총을 챙기고 노인을 따라 올라갔다.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은 화장실 바로 옆에 있었다. 노인이 문을 열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고 나도 그 뒤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해는 황혼에 걸려 있었고 세상은 어둑어둑하게 변하고 있었다.

옥상은 다른 건물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다만 옥상 오른쪽에 몇 평 되지 않는 작은 건물이 있었는데 그곳을 열어보니 공구들과 페인트 통들이 있었다. 아마 간이창고로 이용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이곳을 초소로 사용하기로 했다.

노인은 간이창고 안에서 공구와 페인트 통을 꺼내고 텐트를 설치했다. 그리고 담요를 깔고 핫팩들을 충분히 흔들어 주위에 놓았다. 이정도면 추운 밤을 무사히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철인이 아닌 이상 보초는 교대로 서야했다. 한명이 옥상을 돌며 주위를 살펴보면 다른 한명은 이곳에서 잠을 청한다. 교대 거리도 가까워지고 서로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이점이 있다. 노인은 만족한 듯 웃으며 텐트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장유유서 알지?’

‘먼저 보초 하실래요?’

‘아니 먼저 잔다고.’

노인은 그렇게 말하곤 담요를 덮어썼다. 얄미웠지만 뭐라 할 수는 없었다. 난 괜히 틱틱거리며 담요와 총, 그리고 손전등을 챙겼다. 그리고 초소 밖으로 나와 어두워진 옥상을 돌며 주위를 살펴봤다.

그리고 천천히 한곳에 앉아 마트 정면을 지켜보며 망을 봤다.

길을 바라보자 그놈들은 낮과 다르게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둠속에 붉은 안광은 마치 반딧불이 처럼 밝게 빛났다. 그놈들은 무엇을 그리 찾는지 정신없이 사방을 걸어 다니며 목적지 없는 여행을 시작했다.

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대략 한 시간이 지났다. 난 단물이 다 빠진 껌을 쩍쩍 씹으며 졸린 눈을 비볐다.

그리고 순간 들려오는 작은 소음에 눈을 크게 뜬다.

타탁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다시 들려오는 둔탁한 소리에 깜짝 놀라며 총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위는 어둠뿐 이였고 별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가 또 들려왔다. 난 잔뜩 자세를 낮추고 총을 장전했다. 그리고 노인을 부르기 위해 천천히 초소로 접근하는 그 순간 내 머리에 톡 하고 작은 돌멩이가 날아와 부딪혔다.

소리의 주범은 이 작은 돌멩이였다.

난 멍청한 얼굴로 작은 돌멩이를 손으로 잡았다. 하지만 순간 눈앞에 아까보다 조금 큰 돌멩이가 훙 날아와 바닥에 떨어졌다. 난 빠르게 바닥에 포복했다. 그리고 다시 사방을 둘러보며 주위를 경계했다.

그리고 떨어진 돌멩이를 보는데, 그곳에는 무언가 하얀 것이 묶여 있었다. 유심히 살펴보니 그것은 작은 종이 쪼가리였다.

난 조심히 손을 뻗어 그 돌멩이를 잡았고 묶여있는 종이를 빼내 펼쳐보았다. 그리고 은은하게 비춰오는 달빛을 이용해 그 글자를 읽었다.

[이야기 좀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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