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쉿.’
내가 손을 들어 올리며 자세를 숙이자 뒤를 따라오던 일행들도 나를 따라 자리에 쭈그려 앉는다. 그리고 벽 쪽에 몸을 숨기며 자연스럽게 서로 몸을 밀착하고 둥글게 뭉친다. 잠시 뒤 맨 뒤에 서있던 노인이 나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 귀에 속삭인다.
‘왜 그래?’
난 노인에게 이쪽을 보라는 듯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그쪽에는 맑은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그놈들이 있었다.
일행은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무사히 도시를 통과했다. 그놈들이 보이면 빙 둘러 돌아가거나 혹은 숨어서 회피했다. 그놈들과의 충돌을 최대한 피해 결과, 아무런 손해와 접촉 없이 웰빙마트 근처까지 접근했다.
하지만 목적지까지 거의 도착한 지금, 우리는 꽤 곤란스러운 상황과 직면했다.
내가 발견한 그놈들 숫자는 2마리. 원래대로라면 피해서 가거나 무시했을 테지만 그놈들이 서있는 위치가 상당히 절묘하다. 너무나 정확하게 웰빙마트 앞에 서있는 그놈들은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서고 있었다.
그놈들은 해가 떠있는 시간이면 움직임이 수동적으로 변한다. 말 그대로 해가 지지 않는 이상 하루 종일 저곳에 서 있는 것이다. 저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밤을 기다리기에는 위험요소가 너무나 많았다.
일단 일행들을 이끌고 근처에 있는 개인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둥글게 모여 작은 목소리로 회의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소리를 이용해 유인하거나 혹은 다른 문을 찾아보자 하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다른 변수 때문에 모두 묵살되었다.
선택의 폭은 매우 좁았다.
주위에 위험요소를 두면 안 된다는 게 최종적인 결론이었다.
결국 저놈들과 싸워야한다는 결론이 나오자 아이들은 겁에 질려 고개를 숙였고 여자들도 조금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패닉에 빠진다거나 우발적인 행동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그들은 점점 이런 상황에 적응해가면서 나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들은 일단 짐들을 주차장에 모두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는 총과 대검을 정비하며 저 두 놈을 처리할 준비를 했다. 심장이 조금 떨리고 긴장으로 몸이 달아올랐다. 내가 대검을 착검하고 탄창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사이 노인이 내 곁으로 다가왔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내가 가지.’
우리들의 치명적인 단점중 하나는 전투인원이 적다는 것이다. 특정 지형이 비전투 인원을 보호해주지 않는 이상 전투인원 한명은 나머지는 비전투 일행을 지켜야했다. 신서울대에서 도망쳐 나왔을 때도 그랬고 추가인원이 없는 이상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난 당연히 내가 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노인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노인은 신서울대에서 내가 좀비를 유인할 때 나를 바라봤던 눈빛과 똑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너무나 비장하고 아련했기에 난 괜히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순간 뒤에서 강수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총 주세요. 제가 지키고 있을게요.’
노인과 나는 동시에 강수련을 바라봤다. 순간 내 머리에 드는 생각은 짧은 부정이었다. 여자는 싸우지 못한다, 여자는 보호받아야 한다. 나에게 그런 고정관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은 목숨이 걸린 일이다. 단순한 치기로 결정할 사안이 아니었다.
난 재빠르게 거절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강수련 때문에 그 거절을 내뱉지 못했다.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비장했고 굳세 보였다. 그 눈과 마주친 나는 기억 속에서 처음 만났던 그녀의 모습을 지웠다.
‘언제까지 보호만 받을 수는 없어요. 시은양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요.’
강수련은 그렇게 말하며 뚜벅뚜벅 걸어와 노인의 스포츠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총 한 자루를 빼내고 어설픈 동작으로 탄창과 대검을 챙겼다. 그동안 내가 착검을 하는 모습을 지켜봤는지 옅게 떨리는 손으로 내 동작을 따라하고 있었다.
하지만 떨리는 손 때문에 대검은 계속해서 미끄러지고 착검을 실패한다. 손이 계속 떨리자 그것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고 결국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린다.
하지만 순간 노인이 그녀에게 다가가 떨리는 손을 꽉 잡아준다. 그리고 총을 받아들고 대검과 탄창을 능숙하게 끼워 넣는다. 노인은 잠시 총을 들고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총을 그녀에게 건네준다.
그녀는 멍하니 노인을 바라봤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총을 손을 내밀어 받아 들었다.
‘창을 찌른다고 생각해.’
그렇게 말한 노인은 그녀에게 조곤조곤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했다. 총을 발사하는 방법부터 조정간을 움직이는 방법까지. 그리고 만약 위기 상황에서 그녀가 해야 하는 행동까지 하나하나 세세하게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그녀는 멍하니 그것을 듣다 이내 진지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숙지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건 이 근방에 저 두 마리를 제외하고는 괴물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저 두 놈을 처리하고 오는 사이에 일행들이 그놈들에게 습격을 받을 확률은 몹시 적었다. 노인은 그 점을 강요하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만약 정말 위험하다 싶으면 방아쇠를 꾹 눌러 총을 발사해버리라고 노인은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훨씬 안정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묵직한 총을 양손으로 꾹 잡았다.
난 그 광경을 말없이 바라봤다. 노인은 흐뭇한 웃음을 머금더니 나를 지나쳐 골목 코너로 걸어갔다. 내가 시선을 그녀에게 던지자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봤다. ‘할 수 있어요.’ 그녀는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난 그 이후로 사족을 달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새 강인하게 변한 그녀를 믿고 있었다.
난 채연이에게 볼 뽀뽀를 받고 노인에게 향했다.
* * * * * * *
‘개미들을 본적이 있나?’
코너에서 얼굴만 내밀고 그놈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노인이 내 귀에 읊조렸다. 난 뜬금없이 무슨 말이냐는 듯 노인을 바라봤다. 하지만 노인은 그놈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작은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지구상에는 사람보다 많은 개미들이 있어. 그 조그마한 것들이 사람처럼 무리를 이루고 세상이 망한 지금도 살아가고 있지.’
난 처음에는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이냐는 말을 하려다가 너무나 진지해 보이는 노인의 얼굴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언제든지 싸울 수 있도록 총을 꽉 부여잡으며 천천히 몸을 달구며 전의를 새겼다.
‘개미들 중에는 큰 전투개미도 있고 작은 일개미도 있지. 그리고 위대한 여왕개미도 있을 거야. 마치 사람 같지 않아?’
그렇게 말한 노인은 엽총을 뒤로 매고 천천히 쇠꼬챙이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마치 몸을 달구듯 크게 숨을 들이켜고 내쉰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돌린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노인은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 개미들이 사람하고 다른 점이 있다면 동족을 필요라는 이유로 나누지 않는다는 것이지.’
개미들은 그렇다. 각자의 역할이 있으면서도 힘이 없다는 이유로 박해하거나 버리지 않는다. 그저 그게 맞다는 듯 모두 무리에 속해 톱니바퀴처럼 자연스럽게 굴러간다. 그리고 외부의 침입이 생긴다면 누구든 간에 나서서 무리를 지킨다.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필요가 없기에 버린다. 종말을 맞이한 인간들이 한 행동이었다. 쓸모가 없기에 채연이를 버리고 가자던 그들, 그리고 강자라는 이유로 많은 이들을 죽이고 학대했던 그놈들. 그들은 한낱 개미보다 못한 자들이었다.
‘우리는 마치 개미 같아서 좋다.’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웃어보였다. 그리고 코너에 얼굴을 내밀고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저 마트 앞에서 멍하니 서있던 그놈들은 실이 연결된 목각인형처럼 목과 어깨를 꺾으며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휘적휘적 이쪽을 향해 뛰어온다.
달리기 시작한 그놈들은 점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맹렬한 기세로 뛰어오는 그놈들을 보고 있는데 생각보다 무섭지 않았다. 마치 내 뒤를 누군가 밀어주듯 속도 든든했고 등 뒤로 는 굉장히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 그때쯤 내 떨림은 멈췄을 것이다.
노인은 야구방망이처럼 엽총을 들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 변치 말자고.’
빠악!
노인은 마치 그동안 한과 서러움을 풀겠다는 듯 맹렬하게 달려 코너로 들어오는 그놈의 대가리를 개머리판으로 날려버렸다. 뛰어오는 속도와 빠른 스윙에 홈런을 친 듯 그놈은 시원하게 날아가며 뒤로 자빠진다.
그리고 머리는 곤죽이 되어 더러운 뇌수를 흘렸고 온몸은 떨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뒤 따라오던 나머지 한 놈은 노인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요란한 괴음을 내뱉는다. 그놈의 어깨 너머로 노인이 작게 하하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웃음이 나옵니까?
하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리고 재빠르게 총을 들어 그놈 뒷목에 대검을 찔러 넣는다. 그리고 공격을 받아 움찔거리는 그놈이 반응을 하기도전에 대검을 빼내고 개머리판으로 뒤통수를 내려찍었다.
무언가 부서지는 감촉과 함께 그놈은 몸을 떨더니 이내 앞으로 꼬꾸라진다. 그리고 나는 확인 사살을 하듯 대검을 내지르며 그놈 머리통을 관통해 박살을 내버린다. 마치 익숙한 행동을 하듯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1분 만에 상황은 종료되었다. 예전과는 다르게 더 이상 떨림도 없었고 두려움도 없었다. 우리는 잠시 시체를 바라보다 이내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돌려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주차장에 도착하자 주위를 경계하던 강수련이 깜짝 놀라며 이쪽을 바라본다. 그리고 총구를 이쪽으로 향하는데 노인과 나는 덩달아 깜짝 놀라며 양손을 머리위로 올렸다. 하지만 강수련이 우리임을 확인했는지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총구를 내렸다.
그리고 다가오는 우리를 보며 그녀는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쏠 뻔했잖아요.’
그러자 노인은 짐을 챙기며 나에게 말했다.
‘다음부터 쟤한테 총 주지 마.’
소리 내서 웃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우리는 걸음을 옮겨 마트로 향했다.
마트는 내가 마지막으로 봤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난 소중하게 간직해온 열쇠를 주머니에서 꺼내 큰 자물쇠를 열었다. 그리고 방범창을 소리가 들리지 않게 신중을 가해서 열었다. 딱 사람 하나가 기어갈 수 있을 만큼만 열고 노인에게 조용히 눈짓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능숙하게 바닥을 기어 마트 안으로 들어간다. 내가 주위를 둘러보며 경계하는 사이 노인은 방범창 사이로 손을 내밀어 아무 이상이 없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난 고개를 끄덕이고 일행들을 하나씩 안으로 들여보냈다.
일행들이 모두 들어가자 난 잠시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재빠르게 기어서 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 보이는 건 일행들이었다. 일행들은 전부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안으로 들어와 방범창을 완전히 닫고 자물쇠로 잠그자 뒤에서는 일행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나도 저절로 한숨이 나와 숨을 깊게 내쉬었다.
드디어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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