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그리고 순간 한쪽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그 빛은 등대처럼 밝았고 표류하던 내 시선을 이끌었다. 그리고 이 칙칙한 어둠을 몰아내듯 성스러웠다.
그 빛은 내 눈앞을 지나 나에게 맹렬하게 다가오는 그놈 얼굴로 향했다.
그리고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그놈은 빛과 마주하자 고통스러운 괴음을 내뱉으며 황급하게 공격을 멈췄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리며 몸을 심하게 비틀었다. 마치 생물에게 염산이라도 뿌린 듯 몸을 꼬기 시작한 그놈은 너무나 소름끼치는 괴음을 내뱉으며 뒷걸음질 쳤다.
난 살며시 눈을 뜨다 너무나 눈이 부셔 다시 반쯤 감았다. 그리고 빛이 터져 나오는 방향을 향해 힘겹게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강수련이 큰 손전등을 들고 꿋꿋하게 서있었다. 언제 창고에서 나왔는지 얼굴은 겁에 질려 있었고 팔 다리는 형편없이 떨렸다. 하지만 손전등과 노인의 꼬챙이를 든 모습은 처음 채연이를 지켰던 암사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무 의미 없이 손전등을 비췄는데 그놈이 빛을 무서워하기 시작하자 강수련은 당황했다. 하지만 빠른 판단을 하던 그녀답게 입술을 꽉 깨물고 손전등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그놈은 더욱더 고통스러워하며 뒷걸음질 쳤다.
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머릿속에 있던 모든 로직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다 한순간 한곳으로 모여 뒤엉킨다.
그리고 기억의 단편이 사방에서 날아와 로직과 뭉치고 엉켜 장면을 회상하게 한다. 그놈이 왜 건물 안에서 우리를 지켜봤는지. 그리고 왜 낮에는 우리를 따라오지 않았는지. 그리고 하필 밤에 우리를 습격했는지!
모든 퍼즐이 뭉치자 머리는 한 가지 결과를 도출했다.
이놈은 빛을 싫어한다.
내가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그놈은 고통어린 괴음을 내뱉다 자신이 들어온 창문을 통해 도망친다. 그놈의 울음소리가 쉼터에서 천천히 멀어지기 시작한다.
* * * * * * * *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해가 밝자 기절했던 노인은 정신을 차렸다. 충격으로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나 하는 걱정에 노인의 온몸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하늘이 도왔는지 멍과 타박상을 빼고는 큰 상처가 없었다. 나도 온몸이 녹초가 된 것을 제외하고는 큰 이상은 없었다.
창고에 숨어있던 일행들도 역시 소리를 듣고 잠을 설치다 막판에는 두려움에 떨었던 모양이다. 아이들은 아직도 불안해하는 증세를 보였고 채연이는 내 다리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김시은(노인의 손녀)이 말하길 채연이가 창고 문을 열고 나가려는걸 수차례 막았다고 말했다. 난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며 무슨 일이 있어도 강수련하고 김시은 품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채연이에게 당부했다.
그러자 채연이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시치미를 떼며 내 다리에 매달렸다. 내가 무어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을 텐데……. 가끔 이렇게 모른 척 시치미를 뗀다. 하지만 아이 눈가에 묻어있는 눈물을 보자 더 나무랄 수 없었다.
그리고 강수련에게 처음으로 화를 냈다. 왜 창고에서 나왔냐고, 당신이 나오면 채연이는 어쩌냐고 그러자 강수련은 울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서러움과 슬픔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죽을까봐 그랬어요…….’
난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울고 있는 강수련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있자 다리 밑에서는 채연이가 그리고 저 앞에서는 노인이 나를 탓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그놈에게 죽었거나 혹은 총을 발사해 모두가 죽었을지도 모른다. 결정적인 순간에서 결정적인 도움을 준 그녀. 항상 도움을 주기만 하다가 도움을 받으니 복잡한 감정이 느껴진다. 하지만 절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고마워요.’
결국 가장 진솔한 감사인사를 했다. 그녀에게 고마웠다. 내 목숨을 살려줘서 고맙고 채연이를 포함한 일행들을 지켜줘서 고맙다. 내 감사인사를 듣자 훌쩍이던 그녀는 더 서럽게 울기 시작한다. 그걸 보고만 있던 노인이 혀를 쯔쯔 차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여자 좀 그만 울려라 이놈아.’
노인은 능청스럽게 말하며 한쪽에서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항변하고 싶었지만 내 바지를 당기는 채연이와 계속해서 우는 강수련을 달래느라 그러지 못했다. 폭풍이 한차례 지나간 자리에서 우리는 이상하게 작은 일상을 느꼈다.
그리고 작은 회의가 열렸다. 잠시 자리에 앉아 시작한 회의는 1분도 걸리지 않고 끝나버렸다. 회의 내용과 결론은 간단했다.
쉼터를 떠난다.
쉼터는 안전했고 식수도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인적이 드문 산속이라 소음에도 자유로웠다. 하지만 그 이점이 그것의 등장으로 모두 무산이 되었다. 난 독기가 어린 그것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절대 우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망설임 없이 쉼터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유난히 불안해하던 아이들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여성 두 명도 적극 찬성했다. 그것이 다시 올지도 모른다는 소리에 노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미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우리는 과연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하지만 그 문제도 너무나 간단하게 정해져 버렸다. 목적지는 내가 열쇠를 가지고 있는 대형마트. 비록 도시 한가운데지만 물자도 풍부하고 잠금장치도 우수했다. 그놈들을 좀 주의할 필요가 있었지만 나중에 거처를 옮긴다는 가정 하에 당장 생각나는 장소는 이곳밖에 없었다.
우리는 마치 군집 생명체처럼 단시간에 의견을 모으고 결과를 도출했다. 아이들과 여성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노인도 빠르게 무기와 장비들을 챙겼다. 식량은 남아있는 게 없으니 챙길 건 없었다. 그래도 일단은 마시고 남은 페트병부터 담요까지 전부 챙겼다.
일행들이 바쁘게 움직일 동안 난 잠시 로비에 가만히 서서 쉼터 안을 멍하니 둘러봤다. 이상하리만큼 정이 들었던 쉼터. 난 회상을 하듯 멍하니 쉼터 내부를 바라보며 바쁘게 움직이는 일행들을 지켜봤다.
그 장면은 어느새 바뀌어 과거를 회상하게 한다. 처음 일행들과 이곳에 들어왔을 때, 나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던 이혜인. 그리고 처량한 모습으로 화장실로 걸어가는 내 모습. 마지막은 로비 앞에서 나를 끌어안는 채연이.
영화처럼 지나가던 회상이 누군가 나를 툭 치자 전부 사라지고 난장판이 된 로비로 바뀐다. 난 멍하니 뒤를 바라보자 노인이 내 어깨위에 손을 올리고 있었고 그 뒤로는 짐들을 챙긴 일행들이 전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이 말했다.
‘가야지?’
그리고 나는 대답했다.
‘네, 가야죠.’
* * * * * * *
‘죄송해요.’
일행들 전부가 쉼터를 나온 순간 이연경이 우리에게 말했다. 아침이 밝아오고 정신을 차린 뒤 내내 얼굴이 어두웠던 그녀였다. 대충 이유를 알기에 우리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실성한 사람처럼 흐릿한 눈동자, 그리고 세상 모든 걸 잃어버린 것 같은 얼굴로 그녀는 우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그 한마디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하지만 난 그녀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우리를 습격한 그것은 재해와 같았다. 알고 있어도 막지 못하고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재해. 그녀가 그것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도 그곳으로 가는 것에 동의한 상태였다. 이 일은 그저 거래 과정에서 일어난 변수와 같았다. 난 그녀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싫었다.
하지만 이연경 그녀는 그렇지 않은 듯 필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끌어안고 있던 동생을 앞으로 내밀었다. 애절한 몸짓은 원한다면 바로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저, 정말 죄송해요……. 염치 없는 거 아는데……. 제발 준호만……. 제 동생만 데려가주시면 안 될까요?’
일행들 사이에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 침묵은 그녀의 뻔뻔함을 탓하거나 배척하는 그럼 침묵은 아니었다. 다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서 생긴 그런 침묵이었다. 노인은 한구석에서 헛기침을 한다. 난 입을 꾹 다물고 허공을 바라본다.
자연스럽게 그녀를 데려갈 생각이었다. 딱히 심성이 나빠 보이는 사람도 아니었고 아히이 같은 괴물이 돌아다니는 이곳에 그녀를 혼자 두고 갈 매정한 사람은 우리 일행 중에는 없었다.
살며시 시야를 옮겨 여자와 아이들을 보니 그들은 무언가 간절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연민? 동정? 아니면 동질감일까. 같이 갔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차마 나 때문에 그러자고 말하지는 못하는 눈치였다.
난 헛기침을 했다. 같이 가자고 말하는 게 원래 이렇게 어려웠나? 뭐라고 말해야하지? 따뜻하게 말해야하나? 한참을 우물쭈물 거리며 서 있는데 저 뒤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해? 드라마 찍어? 해지기전에 가야할거 아냐!’
노인 쪽을 보니 벌써 저 멀리 떨어진 노인이 우리를 바라보고 말하고 있었다. 그 순간 침묵이 깨지고 어색했던 분위기가 조금 완화되기 시작한다. 일행들은 언제 침묵하고 있었냐는 듯 다시 소곤소곤 떠들며 분주하게 움직여 일렬로 선다. 그리고 움직일 준비를 시작한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남매는 나와 눈이 마주친다. 난 괜히 헛기침을 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가요.’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눈이 부담스러워서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일행들 선두에 서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내가 뒤로 도는 순간 내 뒤에서는 여성들이 내뱉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남매가 훌쩍이는 소리도 들린다.
난 마치 그것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걸으며 노인의 뒤를 따라갔다. 다행이에요. 잘했어요. 이제 안심해요. 그 짧은 사이에 정이라도 들었는지 강수련과 김시은이 연신 남매에게 소곤거리며 내 뒤를 따라왔다.
우리의 앞길을 축복해주듯 하늘은 맑고 빛났다. 그리고 오랜만에 보는 햇살이 우리를 비추었다. 날씨는 여전히 추웠지만 따뜻하게 내려쬐는 햇살에 몸도 마음도 사르르 녹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기분도 오래가지 못했다.
산 중턱을 넘어 경사가 있는 등산로를 내려가기 시작하자 저 멀리 도시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일행들에게 주의를 줬다. 이제부터 절대 소리를 내지 말고 주변을 경계해야 한다. 앞서 걷던 노인은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와 후위를 담당했고 나는 선두에서 길을 이끌었다.
조금만 있으면 산 아래까지 도착한다. 그리고 내가 다니던 익숙한 길을 지나면 무난하게 웰빙마트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걷는 내내 많은 생각이 들었다. 최악의 적을 만나 무사히 살아남았고 일행들도 전부 무사하다. 처음과 비교하면 좋은 상황이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앞으로 우리의 미래가 밝은 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동안 생각하기를 피해왔던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했다.
대형마트를 거점으로 삼은 순간 식량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날 내가 확인했던 식품들은 굉장히 많았고 식품들을 제외한 생필품들도 다양하게 있었다. 적어도 쉼터 생활보다는 풍족하고 편안할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은?
식량을 구하고 추위를 피한다. 그것이 여태 해결해야할 가장 큰 과제였다. 하지만 그 과제는 대형마트에 정착한 순간 해결될 것이고 이제 그 다음 문제를 생각해볼 차례였다.
인간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
적어도 우리에겐 희망과 미래라는 등대가 필요했다. 참고 참다보면 언젠가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과 상황이 점점 더 좋아질 거라는 미래. 지금은 그것이 없었다. 안개 낀 길을 끊임없이 걷다보면 우리는 언젠가는 지치게 될 것이다.
머리가 복잡해서 한숨만 나왔다. 하지만 난 다시 정신을 차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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