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43화 (43/313)

[43]

행복한 밤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며 일행들과 어울려 작은 수다를 즐겼다. 먹을 거라곤 노인이 대학을 빠져 나올 때 급하게 훔쳐온 냄새나는 수제육포와 쉼터 앞 펌프기 에서 가져온 물이 전부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부족한 음식에도 작은 행복을 느꼈다. 어색한 이들은 인사를 나누고 친해지며 서로가 작은 촛불 앞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웃음꽃을 피웠다.

노인은 내가 어떻게 빠져 나왔는지 궁금해 하는 눈치였지만 난 얌전히 내 말을 듣고 있는 아이들과 채연이를 위해 말하지 않았다. 노인도 내 의도를 알았는지 자세한 내용은 물어보지 않았다. 채연이는 내 품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시간적 여유가 생기자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앞으로 좋던 싫던 같은 길을 걸어가야 할 공동운명체다. 끈끈한 유대감으로 묶여있던 사람들은 다시 한 번 그 끈끈함을 점검했고 그것이 없던 사람들은 새로운 유대감을 형성했다.

그리고 가장 보기 좋았던 건 내 품에서 떠나지 않던 채연이가 어느새 일행들 사이로 들어가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까르르 웃는 모습이었다. 사람은 절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난 조용히 웃음을 지어보였다.

곧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다. 일행은 모두 잠들었고 노인은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며 보초를 서고 있었다. 난 그 옆에서 조용히 앉아 잠들어 있는 인원을 하나둘 세보았다. 그리고 남아있는 식량을 점검했다.

* * * * * * *

[이 아래로는 그가 남긴 자세한 내용들이 적혀있다.]

1. 본인

2. 채연이

3. 강수련

3. 노인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다.)

4. 노인의 손녀 (본명 '김시은' 다음에 부르거나 이름을 표기할 때 꼭 본명을 넣어야겠다.)

5. 대학에서 구출한 여자아이 (본명은 오혜연. 중학교 1학년이라 한다. 아이들을 잘 보살펴 주고 있다.)

6. 어린 아이 3명 (남자아이 1명과 여자아이 2명이다. 오혜연도 대학에서 처음 만난 아이들이라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들로 보인다. 남자아이 이름은 ‘김신욱’. 여자아이 두 명은 정신적 충격이 컸는지 말을 잘 하지 못했다. 나중에 천천히 물어봐야겠다.)

7. 산에서 구출한 여고생 (본명 이연경. 내일 아침 일찍 근처에 있는 소율 여상에 데려다줄 생각이다.)

8. 산에서 구출한 여고생의 동생 (본명 이준호.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인다.)

* * * * * * *

내가 지니고 있던 식량은 모두 소비했다. 노인에게 물어보니 노인도 부랴부랴 챙기느라 육포가 전부인 모양. 물 펌프가 있기에 식수 걱정은 덜었지만 내일 당장 두 끼를 먹으면 모든 식량이 동난다.

보초를 서는 노인에게 예전에 발견한 대형마트를 이야기 했더니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쇠는 내가 소유하고 있다. 주위에 그놈들이 있는 이상 다른 생존자는 방범창이나 대형 자물쇠를 손상시키지 못한다.

든든한 식량 창고를 하나 가진 기분이었다. 다만 거리도 상당히 멀었고 그 많은 식량을 이곳까지 끌고 오는 것도 큰 문제다. 노인에게 물어봤더니 조금씩 가져오는 건 어떠냐는 말을 해왔다. 나도 동의하며 당장 볼일을 보고 출발하기로 했다.

그리고 노인에게 바리게이트 건설을 어찌 했는지 물어보니 노인이 조심히 쉼터 안쪽 창고를 가리켰다. 처음 쉼터를 발견했을 때 문이 잠겨있어서 열지 못했던 창고다. 노인은 그곳에 공구 상자와 톱이나 망치 같은 자재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것이 왜 그곳에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주위에 널려있는 목재 구조물들을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그때 당장 열어보지 않을걸 후회 하면서도 지금이라도 발견해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연경과 이준호를 소율 여상에 데려다 줘야 한다고 말했을 때 노인은 작은 거부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저곳에서 채연이를 재우고 우리말을 엿듣고 있던 강수련도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이연경 덕분에 이곳에 올 수 있었다고 말하자 강수련과 노인은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난 그 기세를 놓치지 않고 3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임을 강조했다. 그러자 결국 강수련과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나에게 같이 가자고 말했고 난 괜찮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금방 갔다가 빠르게 돌아올 계획이다. 돌아오자마자 식량수급 계획을 짜야한다. 그런데 노인은 내가 단번에 거절하자 조금 섭섭한 눈치였다.

[이 아래로는 글씨를 쓰다만 흔적이 존재한다. 그리고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아침이 되자 내가 가장 먼저 일어났다. 알람시계를 맞춘 것도 아닌데 내가 일어나자마자 일행들은 전부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아이들과 여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담요를 정리하고 쉼터를 정리했다. 모두가 제 할 일을 찾아 부지런히 아침을 맞이한다.

노인은 물을 떠온다며 잠시 나갔고 강수련은 육포를 배분하며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난 맛없는 육포를 억지로 씹으며 이연경과 이준호를 바라봤다. 그래도 밤사이에 긴장이 많이 풀렸는지 이연경은 편안해진 눈으로 육포를 씹고 있었고 이준호는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있었다. 내가 아침에 출발하자고 말하니 이연경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리고 잠시 뒤 노인이 들어와 나에게 시원한 물을 내밀었다. 난 그 물을 받아들고 단숨에 원샷했다. 얼음장 같이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흐르자 몽롱했던 정신이 바르게 돌아온다. 내가 물을 마시고 있는 사이에 노인은 창고로 들어가더니 익숙한 가방을 꺼내왔다.

그리고 그 가방을 열자 전에 보았던 탄창들과 총들이 보였다. 다른 일행들은 총을 발견하자 조금 움찔했다.

노인은 피가 묻은 탄피를 손으로 골라내면서 그 속에서 탄창 두개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난 담담히 그 탄창을 받으며 하나는 내 옆구리 벨트에 끼워 넣고 다른 하나는 내 총에 장전했다. 묵직한 무게가 내 손안에 느껴지자 조금 안심됨을 느꼈다.

불과 한 달이 지나지 않았는데 사람을 단번에 죽이는 이 철뭉치들이 너무나 익숙해져 버렸다. 노인이 나에게 당부했다.

'총을 절대로 쏘지 말게. 그래도 혹시 몰라서 주는 거야.'

난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한두 번 다닙니까?'

그러자 노인도 피식 웃었다. 그리고 노인은 가방에서 무언가를 더 찾더니 그것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대학교에서 사복을 입은 남자들이 들고 있던 민간용 무전기였다.

'멀쩡한 무전기를 교체해서 주파수를 맞춰놨어.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연락해.'

내가 조금 얼떨떨한 기색으로 그걸 받자 노인은 엄중히 경고하듯 나에게 말했다.

'자네는 홀몸이 아니야. 항상 조심해.'

노인이 그렇게 말하자 왠지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모든 일행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걱정과 애정이 담긴 눈길. 너무나 오랜만에 받아보는 느낌에 나는 괜히 고개를 숙여 무전기를 바라봤다.

그리고 소중하게 그것을 갈무리해 주머니에 넣는다. 총을 들 때보다 이 무전기를 들 때가 더 든든했다. 작은 연결고리가 이 쉼터에 걸린 듯한 느낌에 나는 살며시 새어나오는 웃음을 감췄다.

내가 총을 들고 일어나자 이연경은 기다렸다는 듯 동생을 챙기며 일어났다. 일행들도 전부 일어나 나를 배웅하듯 문 앞에 서있었다. 채연이는 불안한지 계속해서 울먹이며 나를 바라봤고 그런 채연이를 한번 꼭 안아주고 강수련에게 내밀었다.

가까운 거리야. 오늘내로 도착할거야. 그렇게 말하자 채연이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를 놔주며 강수련에게 안겼다. 그리고 울먹이며 나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보였다.

노인이 문을 열었고 난 일행들과 인사를 나누며 밖으로 나섰다. 노인은 거듭 '무슨 일이 있거든 꼭 연락하게.' 라 말하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가깝고 위험하지 않는 거리임을 알기에 노인은 기색을 감췄다.

난 밧줄을 잡고 이연경과 이준호를 데리고 쉼터를 벗어났다. 길을 걸으며 뒤를 바라보자 노인은 나를 바라보며 내가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고 이내 더 걸음을 옮기자 쉼터가 완전히 시야에서 벗어났다.

난 총을 꾹 부여잡았다. 그리고 숨을 훅 내쉬며 무뎌진 신경을 날카롭게 갈았다. 죽음은 항상 옆에 있었다. 그리고 죽음은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 가장 먼저 찾아왔다. 회색의 정글은 그 법칙을 단 한순간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것을 알기에 난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사방을 경계했다. 행복하고 따뜻했던 순간이 마치 아지랑이처럼 머리에서 사르륵 지워진다. 난 이연경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이연경이 걷는 내내 말하길 소율 여상은 지리적으로 최고의 쉘터라 했다. 정문은 좁고 길로 올라오는 경사가 높고 길었다. 그리고 정문을 제외한 다른 길은 모두 산이나 높은 담으로 막혀있었고 산과 건물 사이에는 낭떠러지가 깊게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정문을 완전히 막고 사다리나 밧줄을 통해 출입하면 쉘터는 굉장히 안전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말하는 어투로 보아하니 우리가 지니고 있는 총을 보고난 뒤 우리 일행이 자신이 있는 쉘터로 향했으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난 그 낌새를 알면서도 냉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며 깊은 팩트로 대답했다.

'그렇게 안전한곳에 부랑자는 어떻게 들어온 거지?'

그러자 이연경은 말을 더듬더니 이내 풀이 죽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얌전히 내 앞에서 걸어갔다. 비아냥거리려는 의도는 아니었는데 풀이 죽은 모습을 보니 조금 미안했다. 하지만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준호는 연신 내 눈치를 보며 누나의 손을 잡고 따라 걸었다.

그리고 곧 산 아래로 학교가 보이기 시작했다.

산 아래로는 급격한 낭떠러지였다. 그리고 낭떠러지를 경계로 바로 앞에는 학교 옥상과 창문이 보였다. 직선거리는 멀지 않은 거리다. 하지만 정면에 낭떠러지가 있는 이상 직선경로를 통해 학교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했다.

어찌할 생각인지 잠시 이연경을 바라봤다. 이연경은 능숙하게 걸음을 옮겨 나에게 따라오라는 듯 손짓했다. 굉장히 은밀하고 조심스러운 발걸음이었다. 나는 천천히 주위를 경계하며 그녀를 따라 걸어갔다.

그녀가 산을 타고 낭떠러지 옆으로 걷기 시작하다 이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한 지점에 멈춰서 낙엽과 나뭇가지를 조심히 치우기 시작했다. 그녀가 치운 지점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과 진로를 막고 있는 낮은 문 하나가 있었다.

문은 녹슬어 있었고 녹슨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하지만 크기가 큰 문은 아니라 그녀는 그 문을 능숙하게 넘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니, 내려가려했다.

난 남매가 문을 넘기 전에 조용히 불러 세웠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