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아침 해가 뜨자마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강풍을 동반한 눈은 마치 눈보라처럼 내려 우리를 삼켰다. 시야는 좁아지고 이동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난 아이들 앞에 앞장서 눈과 바람을 막으며 여학생이 안내한 방향으로 꾸준하게 전진했다.
체온유지가 필요하다. 나는 가방과 외투로 몸을 가려 눈이 피부에 닿지 않게 주의했고 여학생과 아이도 큰옷으로 온몸을 가렸다. 눈보라가 불어오는 산속은 너무나 음침했다. 아침 해가 떴음에도 온도는 올라가지 않았고 매서운 칼바람은 시베리아를 연상하게 했다.
눈들은 쌓이고 쌓여 30분이 지나자 발목까지 쌓였다. 처음에 길을 안내하던 여학생은 눈이 쌓인 산길이 힘든지 연신 거친 숨을 내쉬었다. 아이는 어느새 여학생에게 업혀있었다. 하지만 내 눈치를 살피는지 쉬고 가자는 이야기는 절대 꺼내지 않았다. 난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등산로에 접어들길 기다렸다.
드디어 등산로가 보였다. 여학생의 말이 맞았다는 걸 확인한 순간 난 안도를 느끼며 등산로를 걸었다. 그리고 좀 더 걸음을 옮기다 등산로 옆에 운동기구와 정자가 보이자 그쪽으로 향했다. 눈을 막을 수 있는 지붕이 있는 정자와 그 근처는 고요했다.
내가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가 정자위에 앉자 여학생은 환한 얼굴로 다가와 옆에 앉았다. 거친 숨을 내뱉으며 아이를 정자위에 내려놓고 소매로 땀을 닦았다.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내가 아무 말 없이 자기를 바라보자 여학생은 살짝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열어 말했다.
'자주 왔던 곳이에요……. 아마 한 시간만 더 걸으면 도착할 것 같아요.'
난 얌전히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그리고 천천히 주변을 살펴 주위를 경계했다. 갈증이 느껴졌고 허기가 몰려왔지만 물이 없는지라 침만을 연신 삼키며 갈증을 해소했다. 눈을 먹을까? 고민했지만 체온유지를 위해 조금 참기로 했다.
그렇게 10분을 쉬었을까. 나는 말없이 일어났고 그걸 본 여학생도 아이를 깨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우리는 등산로를 따라 걸었다. 눈 때문에 신발은 젖고 얼기를 반복했다. 점점 바람은 매서워지기 시작했고 눈 때문에 시야도 흐려졌다. 난 연신 얼굴에 달라붙는 눈을 치우며 걸음을 재촉했다.
뒤에서 비틀비틀 따라오는 여학생이 보였지만 힘들다고 속도를 늦추거나 쉬어갈 겨를이 없었다. 가뜩이나 짧은 해, 밤이 되면 곤란하다. 우린 최대한 빠르게 도착해야 했다. 뒤에서 아이가 거칠게 기침하는 소리와 발소리로 그 둘이 따라오고 있다는 것만 확인했다.
바람소리와 나무 흔들리는 소리가 음산하게 울린다. 그리고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뒤를 돌아봤다. 뒤를 돌아보자 여학생은 나와 눈이 마주쳤고 여학생은 무슨 일이냐는 듯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순간 다시 말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낸 소리도 아니고 이 둘이 낸 소리도 아니다. 난 신경이 바짝 서는 게 느껴졌다. 나는 본능처럼 이 둘을 부여잡고 등산로 옆으로 뛰었다.
난 내던지듯 그 둘을 바닥에 눕히고 나도 바짝 몸을 숙였다. 바람소리 사이로 분명히 사람 말소리가 들려왔다. 옆에 여학생과 아이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흠칫 놀라며 몸을 바짝 숙였다. 아이는 손으로 자기 입을 꾹 막았고 여학생은 눈에 보일정도로 떨기 시작했다.
난 천천히 낙엽과 눈으로 그 둘을 덮고 나도 몸을 숨겼다. 총을 꽉 부여잡고 대검 상태를 체크. 그리고 난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난 긴장감에 침을 삼키며 입술을 물었다. 이제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온다.
낮은 남자의 목소리. 그리고 여자의 목소리. 사람이 분명했다. 하지만 난 긴장을 풀지 않았다. 이 지옥에선 괴물의 경계는 조금씩 흐릿해지고 있었으니까.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드디어 그 목소리의 주범이 시야에 들어왔다.
허름하고 잔뜩 더러워진 복장을 한 한 무리가 등산로를 지나간다. 난 빠르게 숫자를 체크했다.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는 중년 남성 한명과 중년 여성 한명 그리고 그 뒤를 따라가는 아이 두 명과 허리가 굽은 노인 한명.
간간이 들려오는 이름과 엄마, 아빠 호칭으로 이들이 가족인걸 알아챘다. 하지만 난 긴장을 풀지 않았다. 내 마음속에 남아있는 불신은 이들과 접촉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다. 난 여학생과 아이를 바라보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한다.
겁이 잔뜩 먹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학생은 떨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시간이 지나자 이 들이 우리 앞을 지나가기 시작했다.
'여보 정말 괜찮을까요?'
'시끄럽게 하지 말고 빨리 따라와.'
중년 남성은 잔뜩 날이 서있었다. 그 모습을 불안하게 쳐다보던 여성은 아이들과 노인을 챙기며 그 뒤를 바쁘게 따라갔다. 그리고 그 순간, 뒤를 따라오던 아이중 하나가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빠! 여기 발자국…….'
나는 순간 아차 싶었다. 눈이 내린 탓에 우리가 등산로 옆으로 걸어온 발자국이 눈 위에 남았던 모양이다. 아이가 발자국을 발견하자마자 중년남성은 움찔하며 멈췄다. 그 뒤를 따라오던 여성은 깜짝 놀라며 아이들과 노인을 데리고 남성 뒤에 숨었다.
중년남성은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한참을 발자국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시야를 돌려 그 발자국을 따라갔다. 그리고 매고 있던 가방에서 날붙이 하나를 살며시 꺼내 들며 자신도 두려운지 침을 꿀꺽 삼켰다.
싸구려 식칼. 그걸 발견한 순간 나도 남자를 따라 침을 삼키며 총을 양손으로 꾹 잡았다.
제발 그냥 지나가라. 제발 그냥 가라……. 난 속으로 끊임없이 읊조렸지만 중년남성은 천천히 발자국을 따라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옆을 바라보자 여학생과 아이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자기 입을 막은 체 떨고 있었다.
저들이 우리를 발견한 순간 호의를 가지고 있을지 적의를 가지고 있을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서로가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뻔했다. 그간 겪었던 모든 일들이 나에게 불신을 선사한 기분이었다.
그렇기에 난 빠른 결단을 내려야했다.
중년남성이 땅만을 바라보고 걷고 있을 때 난 총을 잡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신속하게 총을 남성에게 겨눴다.
순간 남성의 가족 쪽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그 비명은 나를 발견하고 지르는 비명이었다. 가족들이 비명을 지르자 땅만을 바라보고 걷던 남성은 헉 하며 고개를 들었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들고 있는 총을 발견했는지 남성은 천천히 뒷걸음질 치다가 엉덩방아를 찍었다. 그 순간 떨고 있던 부인이 작은 비명을 지르며 남성에게 다가왔고 난 본능적으로 조준간을 남자의 부인에게 옮겼다.
조준간을 마주하자 여자는 헉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서 굳었다. 눈을 또르르 굴려 그 가족과 부부를 바라봤다. 모두 하나같이 두려움에 찌든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이 몹시 더러웠다.
그냥 가기를 빌고 빌었건만, 결국 이 상황에 치닫고 말았다. 난 이를 씹으며 억지로 목소리를 긁었다 그리고 날카롭고 낮은 음성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당장 꺼져.'
그 목소리에 그들은 흠칫 떨며 두려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중년 남성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내가 다시 그를 겨누자 천천히 들고 있던 식칼을 내려놨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혹시 군인이십니까?'
그러자 남성 뒤에 숨어있던 부인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 우리 좀 도와주세요…….'
'아니야.'
난 입술을 깨물며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무언의 경고로 총을 바짝 들어 겨눴다. 그러자 남성은 움찔했고 여성은 작은 비명을 질렀다.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남성은 우물쭈물 하다가 입을 열어 다시 나에게 물었다.
'그럼 총은 어떻게…….'
그 순간 난 남성의 눈에서 작은 욕망을 읽었다. 내가 군인이 아니라 한 순간부터 보이기 시작하던 욕망의 감정은 비록 작은 찌꺼기에 불과했지만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난 눈가를 찡그리다 이내 비틀어진 웃음을 지어보이고 불쾌함에 찌든 목소리로 말했다.
'알 필요가 있나?'
난 내가 말하고도 깜짝 놀랄 만큼 목소리에 적의를 섞었다. 남성은 음 하는 작은 신음을 내뱉으며 뒷걸음질 쳤고 여성은 더욱더 남성 뒤로 숨어들었다. 아이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눈을 내리 깔았다.
나는 원하는 결과를 얻었음에도 기쁘지 않았고 불쾌하기만 했다. 마치 어울리지 않는 더러운 가면을 쓴 기분이었다. 그리고 속으로 그들이 얌전히 물러나기를 기도했다. 난 그저 이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목적지로 향하고 싶었다.
'빨리 꺼져. 총소리 내기 싫으니까.'
나는 울렁거리며 울리는 가슴을 채찍질하며 더욱 가혹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그리고 언제든 찌를 수 있다는 듯 대검을 앞으로 내밀며 그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남성은 안도와 두려움이 섞인 얼굴로 빠르게 부인을 데리고 물러났고 이내 가족 곁으로 다가가 살며시 등산로 귀퉁이에서 걸음을 옮겼다.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혹시나 내가 해를 가할까 힐끔힐끔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남성과 여성은 연신 이쪽을 힐끔 쳐다보며 가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아이들도 두려움에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이내 재빠르게 부부를 향해 뛰어갔다.
난 서서히 총구를 내렸다. 그리고 순간 바로 앞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들겠구먼.'
나는 그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총을 들었다. 내 눈앞에는 이 가족들을 따라가던 노인이 있었고 그 노인은 나를 바라보며 빙긋 웃고 있었다.
'하, 할머니!'
노인이 내 근처에 있자 아이중 하나가 깜짝 놀라며 노인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 부부도 깜짝 놀라 이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쪽으로 달려오려는 본능과 이성이 교차한 듯 발을 동동 굴렀다.
'힘들지?'
내가 총을 겨눴음에도 노인은 굽은 허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총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표정. 인자함과 세월이 가득한 웃음과 마주한 나는 떨리는 총구를 반쯤 내렸다.
노인은 내가 총구를 치우자 이빨이 없는 입술을 오물거리고 마치 친한 손자를 바라보듯 나를 보며 말했다.
'이거 먹구혀.'
그렇게 말한 노인은 느린 동작으로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시선을 내려 그것을 바라보자 노인의 손 위에는 아직도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는 군고구마 하나가 놓여있었다.
내가 받지 않자 노인은 마치 손자에게 맛있는 간식을 주듯 내 손앞으로 천천히 내밀었다.
총구와 고구마가 마주한다.
나는 총구를 완전히 내렸다. 그리고 떨리는 손을 뻗어 노인이 내민 군고구마를 잡았다. 아직 따뜻했다. 그리고 맛있는 냄새가 비어버린 위장을 자극했다. 잘못 구웠는지 한부분이 타 버린 군고구마지만 지금 같은 세상에선 너무나 귀한 식량이었다.
내가 고구마를 받자 노인은 빙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사람을 너무 미워하지 말어.’
그리고 노인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허리를 숙이고 지팡이를 짚으며 가족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할머니가 오지 않아 전전긍긍 하던 가족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노인을 향해 뛰어왔다. 그리고 조심히 걷던 길을 걸어간다.
마치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난 한참을 정신을 빼놓고 멀어져가는 노인과 가족들을 바라봤다. 모든 죄를 안고 신 앞에 고해성사를 한 기분이었다. 부끄러움, 수치 그리고 슬픈 감정이 뒤섞여 내 속을 진창으로 만들었다.
서로를 챙기며 걸어가는 가족의 뒷모습은 종말이 오기전 일상과 같았다. 이제는 보지 못할 모습,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일상.
난 시대가 흐른 명화를 보듯 그 장면을 두 눈 가득 담았다.
그리고 그들이 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고개를 들어 회색 하늘을 바라봤다.
손안에 고구마는 아직도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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