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어둠속에 모습을 숨긴다. 한기가 몸을 쓸고 지나가고 기분 또한 이상하게 착 가라앉았다. 그간에 경험이 나를 안심시킨다. 급박한 상황임에도 심장은 천천히 뛰고 이성이 날카롭게 비려진다. 총을 꼭 부여잡고 천천히 들어올린다.
여자와 아이는 점점 지쳐 가는지 뛰는 속도가 느려진다. 그 뒤를 옳다구나 빠르게 따라오는 남자 두 명을 두 눈 가득 담았다.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나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는다. 난 완전히 어둠과 동화되어 관전자마냥 그 모습을 살핀다.
어지러운 후레쉬 불빛이 눈앞을 어지럽게 춤춘다. 잔뜩 예민해진 신경, 그리고 청각으로 여자와 아이가 내뱉는 거친 숨결이 들려온다.
'준호야 빨리! 빨리!'
여학생은 숨을 거칠게 내뱉으면서도 점점 속도가 느려지는 남자아이를 재촉한다. 하지만 남자아이는 잔뜩 차오르는 숨 때문에 대답조차 하지 못했고 뛰는 속도 또한 점점 느려진다. 한계가 온 것이다.
이 둘은 내가 숨어있는 곳을 지나친다. 하지만 선두로 뛰어가던 여학생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그러자 여학생의 손을 잡고 뛰어가던 남자아이도 같이 바닥에 쓰러진다. 짧은 비명과 함께 절망스러운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 뒤를 놓치지 않고 빠르게 뛰어오는 남자 두 명.
'이 시발 년이 도망가고 지랄이야!'
바짝 따라오던 남성 한명이 그렇게 외치며 걸음을 늦춘다.
아직이다, 아직이야.
난 바닥에 엎드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시선을 돌리자 여학생과 남자아이는 도망가기를 포기했는지 겁에 질린 얼굴로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남자아이는 누나 품에 안겨 떨고 있었고 오직 여학생만이 추격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형님 확 죽여 버리죠.'
선두로 쫓아오던 남자 뒤에서 짜증과 살의로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그 목소리를 들은 남성은 바닥에 침을 찍 뱉으며 대답했다.
'이 시발……. 요즘 수확량도 줄어드는 마당에…….'
수확량? 이 둘을 말하는 것일까? 그는 고민하는지 얼굴을 잔뜩 찡그린다. 하지만 이내 죽이기로 결론 내렸는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칼을 꺼내 들었다. 칼을 꺼내드는 그 순간 남성의 팔에서 무언가 짤랑 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달빛을 받아 잠시 반짝인 금속제.
팔찌? 무기? 난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이 무엇일까 유심히 살폈다.
그 남자는 칼을 들고 입으로는 연신 욕설을 내뱉으며 그 둘에게 접근했다. 여학생은 심하게 몸을 떨며 남자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걸어온다. 그리고 난 끝까지 기다린다. 내 시야로 남성의 다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또 기다린다. 앞에 놈은 일단 보낸다. 난 숨을 멈추고 차가운 총을 내 몸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마치 주변과 동화되기라도 한 것처럼 숨을 멈춘다.
뚜벅 뚜벅
한 놈이 지나가고 그리고 다음 놈이 건들건들 거리는 걸음으로 내 앞을 지나간다. 난 눈알을 또르르 굴리다 멈춘다. 내 두 눈 한 가득 그놈을 담는다. 완벽한 옆면, 그리고 시선을 그놈 허벅지에 정확하게 멈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대검을 내지른다. 소음도, 기척도 없었다. 그렇기에 너무나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내 대검은 정확히 그놈 허벅지에 박혔다. 날을 얼마나 날카롭게 벼렸는지 칼날이 질긴 바지를 가로지르고 들어가자 살과 근육의 저항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돼지고기를 반으로 가른 기분. 너무나 쉬웠기에 너무나 나쁜 기분. 난 바로 총구를 돌려 상처를 후벼 파고 근육을 찢었다. 그리고 힘을 줘 총을 옆으로 빼냈고 잘린 대동맥은 피를 뿜어냈다.
'끄..끄아아아아악!!!!!!!!!'
내가 찌른 남성의 시선은 허벅지에 있는 상처부위로 향했고 이내 나와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완벽한 무력화. 그간 겪었던 비윤리적인 경험이 너무나 많은 것을 남겼다.
피는 분수처럼 솟고 남성은 황급하게 상처부위를 막는다. 하지만 솟아오르는 피를 막지는 못한다. 패닉이라도 온 듯 나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그놈을 차가운 눈으로 마주봤다. 난 아주 천천히 총을 끌어당겨 대검을 회수했다.
어린 양떼들을 사냥했을 때는 좋았을 것이다. 다칠 염려도 없고 너무나 손쉽게 고기를 취했을 테니까. 그렇기에 놈은 스스로가 늑대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진 존재. 하지만 놈은 늑대가 아니다.
포식자가 역전된다.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낄 때 자신들을 늑대라고 생각하던 이리떼는 순한 양들이 되어버린다.
놈은 아무 반항도 하지 못했다. 내가 다시 풀숲으로 몸을 숨기자 그놈은 귀신이라도 본 마냥 하얗게 질려서는 연신 이쪽을 향해 손가락질한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뒤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다른 동료가 지르는 비명을 들었는지 선두에 있던 남성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짜증이 잔뜩 묻어나는 얼굴로 남매를 향해 으르렁 거린다. 그러다 이내 남성을 향해 걸어오며 묻는다.
'뭐하냐? 이 새끼, 또 어리버리타네.‘
'여기…… 여기!!'
칼에 찔린 남성은 동료가 이쪽으로 오자 안심했는지 내가 있는 곳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또 다른 남성은 풀숲에 숨은 나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이쪽을 힐끗 쳐다보다 다시 그 남성을 바라본다.
그리고 횃불을 들고 넘어진 남자 쪽으로 향하는 순간 남성의 얼굴이 굳어지고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한다.
‘어? 피? 피!!'
남성은 허벅지에서 분수처럼 나오는 피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말을 더듬는다. 그리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다시 피를 흘리는 남성에게 접근한다.
'지혈! 지혈을 해야 되나? 이 시발, 가……갑자기 이게 뭐야.‘
갑자기 동료가 피를 흘리자 남성은 패닉에 빠진 듯 말을 더듬으며 상황판단을 하지 못했다. 너무나 쉽게 사람을 죽인다고 말했던 이들은 자신들의 피를 보자마자 떨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미 늦었다. 피는 이미 바닥을 흠뻑 적신다. 피를 흘리는 남성은 과다출혈 증세를 보이며 몸을 떤다. 그리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건지 내가 있는 쪽에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형님! 여기 있어요……. 형님! 여기에……. 귀신……. 악마…….'
그러자 다른 남성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말을 더듬었다.
'뭐가 있다고?'
나는 그때가 돼서야 가슴속에 뭉쳐있던 숨을 훅 내뱉었다. 피 비린내가 코끝을 자극하고 이제는 무뎌진 죄책감과 어두운 찌꺼기가 숨을 통해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거침없이 총구를 위로 들어올린다.
남성은 칼을 들고 이쪽을 경계하며 서서히 접근했다. 그리고 몸을 내 쪽으로 향하고 이곳을 살필 때쯤 난 빠르게 몸을 일으키며 대검을 내질렀다. 목표는 팔과 몸체를 이어주는 어깨. 푹 하는 소리와 함께 남성이 내뱉는 아주 짧은 비명이 헉 하고 들려온다.
그리고 얇은 핏방울이 분무기처럼 내 얼굴을 적신다.
남성과 눈이 마주친다. 내 몸이 찌르르 울린다. 기분이 더럽다. 하지만 무심하게 대검을 뒤로 빼낸다. 피가 줄줄 흐르고 남성은 본능처럼 상처부위를 손으로 부여잡는다. 그리고 난 재빠르게 개머리판을 휘둘러 남자의 턱 아래를 강타했다.
헛된 숨과 침이 끓는 소리가 들린다. 남성은 나에게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이내 눈알을 뒤집고 그대로 넘어진다. 그리고 옅은 경련. 남자는 한순간 무력화가 되어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옆에서 옅은 신음소리가 들린다. 그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허벅지를 부여잡고 바들바들 떠는 남성이 시야에 들어온다. 얼굴이 창백하고 몸은 딱딱하게 굳었는지 그는 도망치지도 못하고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쪽으로 천천히 다가가 개머리판으로 얼굴을 갈겼다.
소매로 입술을 닦으며 난 발 아래 고인 피 웅덩이를 밟고 지나간다. 피가 찐득하니 발아래 묻어나온다. 피가 내 발목을 잡고 시궁창 같은 심정을 끊임없이 채찍질한다.
이제 보니 이놈 손에 보이던 금속제는 팔찌가 아닌 가운데 줄이 끊긴 수갑이었다. 수갑 전체는 뜯어내지 못한 모양인데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난 마치 더러운 것을 떨쳐내듯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리고 여학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남자아이는 여학생 품속에서 울고 있었고 여학생은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맑고 큰 눈이 거울처럼 내 모습을 비춘다.
더러운 수염과 피로 물든 얼굴. 꼬질꼬질한 옷과 피가 묻은 총검. 괴물과 같은 모습. 악마와 같은 모습. 저 둘에겐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일까? 무서워할까?
난 손을 들어 여학생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이내 내 손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난 다시 은신처로 걸음을 옮겼다.
잘 도망갔으면 좋겠다. 어딜 도망가던 지옥이겠지만, 그래도 구해줬으니 잘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빨리 돌아가서 짐을 챙기고 다른 은신처를 찾아야겠다.
한걸음 한걸음이 너무나 무거웠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뒤에서 무언가 뛰는 소리가 들렸다.
도망갔을까? 짧은 상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순간 비명과 같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난 깜짝 놀라 뒤를 바라봤다. 남자아이는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고 여학생은 남자 품에서 꺼냈는지 싸구려 식칼을 들고 어깨가 찔린 남성의 몸을 내려찍고 있었다.
그놈들을 무력화만 시키는 것에만 집중했다. 더러운 기분을 느끼기 싫었고 내 몸은 본능적으로 생명을 취하는 것에 거부반응을 보였다.
그렇기에 내손으로 놈들의 숨을 완전히 끊지 않았다. 차라리 이대로 천천히 죽어가라 하고 생각만 했었는데 그 생각이 의미 없어졌다.
'죽어! 죽어!! 죽어!!!'
비명과 같은 고함, 그 고함 속에 슬픔과 증오가 진하게 묻어온다. 그 진하고 냄새나는 모든 것이 서로 끈끈하게 얽혀 나에게 들려왔다.
여학생은 손을 움직이며 누군가의 이름을 말했다. 희선이 다연이 하연아 완선아.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샘솟았고 잔뜩 쉰 목에선 울음이 흘러나왔다. 사무치는 한과 고통이 느껴졌다.
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그쪽으로 걸어가 울고 있는 남자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눈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품속에 남자아이를 안았다. 끝없이 울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이는 깜짝 놀라면서도 이내 내 품속에 안기며 서럽게 울었다.
난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이가 울음이 그치길 기다렸다. 그리고 소리 없이 여학생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남성의 시체는 이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비명은 고함이 되고 고함은 울음이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허탈한 웃음이 되었다.
여학생은 결국 히죽 웃으며 바닥에 식칼을 내려놓는다. 그 웃음은 결코 기뻐 보이지 않았다. 난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자 남자아이는 내 옆에 빠짝 달라붙어 내 바지를 두 손으로 꼭 잡았다. 여학생은 이쪽을 바라보더니 이내 비틀거리며 일어나 다가왔다.
'준호야 미안해……. 누나가 미안해…….'
그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해보였다.
준호라 불리는 아이는 파르르 떨더니 이내 내 바지를 놓고 그녀에게 뛰어갔다. 그리고 품속에 파고들어 울었고 그녀도 품안 가득 아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서러운 눈물을 흘렸다.
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고 기다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녀가 시선을 나에게 옮기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떨리는 눈망울은 나를 바라봤고 난 그 눈과 마주칠 수 없어서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러자 힘없고 잔뜩 쉰 목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고마워요 아저씨…….'
난 대답하지 못하고 그냥 말없이 서 있었다. 남매가 겪은 상처뿐인 전쟁은 오늘밤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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