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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살아있다-38화 (38/313)

[38]

고인 바닥에 내 몸은 형편없이 떨어졌다. 난 입으로 들어오는 흙과 물을 내뱉으며 거친 숨을 연신 내쉬었다.

드디어 하수구에서 빠져 나왔다. 떨리는 다리와 저려오는 팔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난 손전등으로 주위를 열심히 밝혔다. 빛을 밝히는 건 위험한 행위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주위에는 나무가 울창했고 경사진 지형을 보아 산이 분명했다. 산으로 들어가는 초입인가? 흐릿한 눈을 비비며 생각을 해보려고 했지만 이내 생각하길 포기했다. 짧은 해는 완전히 져버렸고 싸늘한 칼바람이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발목까지 오는 물이다. 난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틀비틀 바위를 타고 올라갔다. 잔뜩 물에 젖은 옷은 내 몸을 무겁게 짓눌렀고 추운 날씨는 내 체온을 서서히 떨어트린다. 심장이 느리게 뛰고 눈앞이 흐릿하다.

난 기어가듯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어두운 사방을 손전등으로 비추며 둘러봤다. 그러다 계곡과 경사 사이에 생긴 공간을 발견했고 고민 없이 그곳을 향해 기어 들어갔다. 바위가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자 난 천천히 내 옆에 가방을 내려놓고 총도 내려놨다.

가방이 젖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는데 많이 젖어있었다. 난 물에 젖은 외투를 벗고 내 몸을 연신 손바닥으로 비볐다. 이러다 얼어 죽겠다는 생각이 들자 난 재빠르게 기어 나와 경사를 타고 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추며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들을 모았다. 불을 피워야한다. 그 생각만이 내 머리에 가득 차 있었다. 주위가 산이라 나뭇가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난 품속에 나뭇가지를 한 아름 안고 다시 가방을 벗어두었던 은신처로 향했다.

손전등을 잠시 한쪽에 내려놓고 나뭇가지를 한곳에 모았다. 그리고 가방을 조심히 열어 일기장을 꺼냈다. 그리고 끝장을 몇 개 찢어낸다. 내 소중한 일기장, 마음이 찢어지지만 불쏘시개가 필요했다.

그리고 떨리는 손을 애써 움직이며 촛불을 가져올 때 챙겨온 라이터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종이에다 불을 붙였다. 순간 불이 화르륵 타올랐고 난 황급하게 그 종이를 나뭇가지 사이에 넣었다.

조금 물기가 있었는지 불은 단번에 타오르지 못하고 연기만 흘러 나왔다. 하지만 계속해서 불쏘시개를 추가하자 이내 불이 화르륵 타올랐다. 난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불앞에 다가갔다. 따뜻한 온기를 만나자 저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난 불앞에 연신 손을 비비며 얼어붙은 체온을 녹였다. 작은 모닥불 덕분에 근방이 조금 밝아졌고 나는 켜두었던 손전등을 꺼버렸다. 그리고 가장먼저 옷들을 벗기 시작했다. 겨울 산속에서 젖은 옷을 입고 있는 건 자살행위와 같다.

난 옷을 말리기 위해 한편에 벗어두고 나무들을 추가해 화력을 높게 유지했다. 그리고 가방과 나뭇잎이 붙은 나뭇가지들을 이용해 좁은 입구를 막아두었다. 어설픈 바리게이트지만 적어도 빛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은 막아줄 것이다.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얼어붙은 몸과 옷을 녹이며 타오르는 불꽃을 멍하니 바라봤다. 심한 공복감이 몰려왔다. 나는 가방 쪽으로 기어가 가방을 열었고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물 반통을 찾았다. 계곡물이라도 마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남은 물 반통을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마셨다. 그리고 혹시 먹을게 남아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방을 뒤지며 먹을 것을 찾았다. 그러다 가방 맨 밑에 있던 비스킷을 발견하고 속으로 기쁨의 소리를 질렀다.

비스킷은 물에 젖어 있었다. 누가 먹다 남겼는지 포장지가 뜯겨있는 비스킷. 내 가방에 남은 식량은 그게 전부였다. 난 황급하게 그걸 꺼내들었고 다시 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물에 젖은 비스킷을 불앞에 놓고 천천히 물기를 말렸다.

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남은 물을 전부 마셨다.

채연이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리고 다른 일행들 얼굴도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무사히 도착했을까? 이곳은 어디일까? 이제 어디로 향해야 할까? 난 깊은 한숨을 내쉬며 거친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몹시 슬프고 힘들었다. 하지만 울지 말아야지 언제까지 애처럼 울 거야? 하고 스스로 되새기니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마음을 다부지게 잡으며 추위 때문에 흘러나오는 콧물을 킁 삼켰다. 항상 그리운 얼굴들을 기억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평온하다.

손을 뻗어 비스킷을 잡았다. 아직도 축축했지만 난 그것을 입에 쑤셔 넣었다. 양도 적고 물에 젖어 맛도 역했다. 그럼에도 난 입을 꾹 막고 억지로 삼켰다. 밤을 이곳에서 버텨야한다. 그리고 해가 뜨자마자 이곳을 나가 이곳이 어디인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일행들과 만나기로 한곳은 강수련이 안내했을 터, 난 그곳으로 가야한다.

물기가 조금 남은 바지와 윗옷을 하나둘 챙겨 입었다. 그리고 양말을 신고 아직 축축한 신발을 불 옆에 놓았다. 두꺼운 외투는 마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난 최대한 몸을 웅크려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모닥불은 밤새 유지되어야 한다. 불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 난 천천히 화력을 줄였다. 그리고 바위에 몸을 기대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깊은 잠에 빠지면 안 된다. 옅은 잠을 자면서 수시로 장작도 넣어주고 주위를 경계해야 했다.

하지만 피곤으로 절어버린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난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서서히 감기는 눈을 웅크린 품속에 박았다. 수마가 나를 잠식하자 귀에는 장작이 타는 소리와 내 고요한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난 그렇게 새벽이 올 때까지 깊은 잠에 빠졌다.

* * * * * * *

'꺄아아악!!!!!'

나를 깨운 건 저 멀리서 어렴풋이 들러오는 긴 비명이었다. 순간 눈이 번쩍 떠지고 정신이 빠르게 돌아온다. 황급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사방은 바위로 막혀있었고 내가 있는 곳은 여전히 은신처였다. 모닥불을 밤사이 꺼졌는지 몸은 한기로 인해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은신처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난 반쯤 마른 외투를 빠르게 걸치고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한쪽에 세워뒀던 총을 찾아 손에 쥐었다. 나는 능숙하게 탄창을 열어 방금 일어나 침침한 눈으로 총알을 확인했다. 하지만 하수구에서 모두 사용했는지 남은 총이은 없었다.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자 목에 메고 있던 탄띠도 어디론가 사라졌는지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총알을 모두 소비하고 하수구로 들어갈 때 탄띠는 없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난 탄띠 찾기를 중단하고 이내 빈 탄창을 총에 끼워 넣었다.

그사이 비명이 또 울렸다. 조급하고 두려움이 가득 찬 비명, 이곳에서 멀지 않은 거리였다. 난 자세를 최대한 숙이고 날카로운 대검을 앞으로 세웠다. 그리고 입구를 막아둔 낙엽과 가방을 치우고 밖을 바라봤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아 주위는 어두웠다. 하지만 손전등을 챙기지는 않았고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어둠은 나를 숨긴다. 어둠은 나를 지키고 방패가 된다. 이제 어둠은 내 친구처럼 친근했다.

비명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곳을 지나쳐 가는 게 분명하다. 혹은 목적지가 이곳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자가 비명을 지른다는 건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이다. 추격자가 생존자든 그놈들이든 구분을 할 필요가 없었다. 모두 내게 위협이 되는 존재다.

그러면 여자는?

누군가 나에게 말할 것이다. 너는 비명을 지르는 여성을 구할 의무도 책임도 없다고.

하지만 난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현실과 이성이 끊임없이 충돌한다. 하지만 난 이제 그딴 고민을 하며 시간을 소비하기 싫었다. 그날 형님이 외쳤던 말이 뇌리에 박혀든다. 어이, 곽동윤이!

난 몸을 일으키고 바위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리고 비명이 가까워지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경사를 살금살금 올라 나무 사이에 있는 낙엽 속에 몸을 숨겼다. 비명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빛 하나가 다급하게 움직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 빛은 손전등이 분명했다.

쫓기는 여성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 교복은 반쯤 찢겨 있었고 그 옆에 누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 비명 사이로 울음소리도 같이 들려왔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뛰고 있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같이 달려오는 어린아이가 보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채연이랑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자아이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지나자 그 뒤를 따라오는 남성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자와 달리 작은 횃불을 들고 있었다. 선두를 달려오는 한명과 그 뒤를 따라오는 한명. 모두 두 명이다.

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울면서 도망가는 여자와 아이. 그리고 횃불 사이사이로 보이는 추격자들의 웃음에서 난 시궁창을 핥은 기분을 느꼈다. 난 고개를 돌려 입안에 고인 침을 퉤 하고 뱉었다.

이미 미친 세상이다. 그리고 다 예상한 광경이다.

괴물의 경계는 이미 사라졌다. 인간성을 벗은 이들은 괴물과 다를 게 없었다. 난 지독하게 어두운 심연을 들여 봤고 이것이 내 스스로가 낸 결론이다. 이 둘을 추격하는 저들은 그 괴물 놈들과 다를 게 없다.

이들이 이대로 지나가도 상관없다. 안 들킬 자신도 있었고 그들은 내가 이곳에 있었는지 알지도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지나가고 나면 난 이렇게 숨어서 아침을 기다릴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싫었다.

나는 뜬금없지만 예전에 봤던 미국 드라마가 생각난다. 그렇게 대단한 장면도 아니었다. 그냥 주인공이 하기 싫은 봉사를 하며 투덜거리는 장면. 긴 꼬챙이로 바닥에 놓인 쓰레기들을 콕 콕 찍으며 쓰레기통으로 넣던 그 장면.

나는 그 자리에서 그 드라마 장면이 생각났다.

난 총을 살며시 옮겨 눈앞에 놓았다. 유난히 밝은 달빛에 대검이 날카롭게 빛난다. 난 그 날카로움을 눈 안 가득 담으며 마른 목구녕에 침을 밀어 넣었다. 항상 바른 일을 하며 웃어보이던 채연이가 생각났다.

나는 그것이 지금 같은 상황에선 나쁘다고 틀리다고 채연이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지우개로 지워지는 검은 종이마냥 나도 새하얗게 물들고 있었다.

아이와 여자를 쫓고 있는 그놈들의 모습에서 채연이를 납치했던 군인들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죽일 놈들, 몇 번이고 쳐 죽일 놈들. 난 저들이 그놈들과 같은 놈이 아닐까 하는 끝없는 자기합리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저들을 죽일 명분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참을 고민하다 마지막에 들어서는 모든 게 우스워졌다.

난 누구에게 변명을 할 것이며, 후에 누구에게 잘못을 따질 것인가.

나는 총을 들어올렸다.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린다. 당연한 행위라고 생각하지 말자. 스스로를 속이고 변명하지 말자. 지금의 난 한 마리 짐승처럼 하고 싶은 행위를 하는 것이다. 달이 짙고, 밤이 깊다. 이 어두운 밤은 내 죄책감마저 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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