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슈퍼에서 챙겨온 손전등이 있었다. 나는 가방에서 손전등을 꺼내 손에 꼭 쥐고 최대한 입구에서 멀어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차가운 겨울 날씨에 팔이 반쯤 잠기는 물은 너무나 차가웠다.
추위 때문에 몸이 덜덜 떨리고 피부가 싸늘하게 식어간다. 난 황급하게 손전등을 들어 스위치를 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하수구 내부는 빛으로 밝아졌다.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은 내 정신을 더욱더 괴롭혔다.
총을 부여잡고 천천히 포복 전진을 시작한다. 하수구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고 사람하나가 기어갈 간격은 충분 했다. 난 빠른 이동을 위해 손전등을 입에 물고 끝이 없어 보이는 여정을 시작했다.
물에 닿는 부위는 서서히 감각이 사라졌다. 이런걸 저체온증이라 하는 걸까? 몸이 떨리고 생각이 점점 짧아진다. 내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자동으로 재생되는 비디오 화면을 보는 것인지 헷갈렸다.
그저 앞으로 뻗어지는 내 손을 보고 아 내가 움직이고 있구나 하고 자각할 뿐이다. 지친 체력은 온기를 빠르게 앗아갔다. 아득하니 멀어지는 정신, 뿌옇게 시야를 가리는 안개. 어쩌면 이렇게 잠들어버릴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나아가던 시야가 멈췄다. 아마 팔과 다리가 멈췄나보다. 난 작은 신음을 내뱉으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손전등이 내 입에서 떨어져 바닥에 형편없이 떨어진다. 그러자 하수구 내부는 어둠으로 물든다.
나는 건조한 기침을 내뱉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춥다, 차갑다, 외롭다. 지치고 피곤하다. 끔찍한 한기와 어둠이 내 몸을 조금씩 잠식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고통스러운 한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몸이 허공에 붕 뜬 것 같다. 사라지는 고통과 두려움. 그냥 졸려온다.
나는 잠에 빠진 걸까? 몸이 서서히 수면 속으로 가라앉는다. 익숙한 감각이다. 내 세계가 종말한 이후로 항상 이랬으니까. 모든 어둠과 한기가 내 코와 입을 타고 폐부를 가득 채운다.
숨이 막히고 몸은 무기력해진다. 시야가 서서히 어두워진다.
* * * * * *
“이 새끼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네! 정신 차려 인마!”
난 숨을 크게 들이쉰다. 마치 죽었다 깨어난 기분이었다. 사방이 불에 타오르고 있었다. 지옥에 떨어진 걸까?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고개를 연신 흔들었다. 산소통과 방한복의 무게가 내 몸을 강하게 짓누른다.
그러자 내 머리통으로 다시 한 번 손이 날아온다. 난 깜짝 놀라서 황급하게 앞을 바라봤다. 그러자 시야에 너무나 그리운 얼굴이 들어온다.
“정신 차리라고!”
“형님?”
“그래, 새끼야! 호스나 제대로 잡아!”
그 소리에 나는 본능적으로 손에 들고있는 소방호스를 꾹 잡았다. 그리고 치솟는 불길을 뚫고 있는 그의 든든한 등을 보며 한없이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마치 불과 맹렬하게 싸우는 전사와 같았다. 그가 물을 분사하자 지옥처럼 불타오르는 현장은 주춤거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마치 파도처럼 밀려오는 불꽃은 분사하는 물들이 우습다는 듯 우리를 서서히 밀어내기 시작한다. 검은 연기가 시야에 가득하고 사방이 불타오른다. 땀이 물처럼 쏟아지고 마치 몸이 불타오르듯 너무나 뜨겁다.
순간 무전기가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한다.
[나오셔야 합니다! 그러다 다 죽어요!]
“애 한명 못나왔어. 안전거리나 유지해.”
그리고 그는 마치 불길 속에 자신을 욱여넣듯 물을 넓게 분사하며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길은 접근자체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몸을 부풀리며 우리 앞길을 막았다. 멈춘 발걸음, 힘없는 어깨. 그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리고 그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먼저 나가.”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분명히 싫다고, 아니라고 외쳐야 하는데 숨구멍이 꽉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끝없이 전진하는데 내 발은 바닥에 붙어 움직이지 않는다. 내 손에서 소방 호스가 서서히 멀어진다.
나는 소리 없는 고함을 내지르며 최대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소방호스를 잡기위해 온갖 발광을 다 해봤지만 호스는 나를 조롱하듯 천천히 내 손에서 멀어진다. 그리고 이젠 모든게 허상으로 변해버린다. 그림자, 잡히지 않는 과거. 그의 얼굴이 흐릿해진다
그리고 공간이 격리된 듯 불타오르는 세상은 저 멀리 사라지기 시작한다. 저곳은 현장일까? 아니면 지옥일까? 나를 슬픈 눈으로 바라본 그는 소방 호스를 들고 공간 너머로 황급하게 뛰어간다.
그는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 * * * * *
'- - - - -'
무언가 시끄럽게 울린다. 어두운 심연 속으로 빠지려는 나를 어디서 나는지 모를 잡음이 붙잡는다. 나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뜬다.
편히 자려고 했는데 연신 울려오는 잡음이 여간 시끄러운 게 아니었다. 그 잡음을 없애보려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봤지만 빈 허공만 만져질 뿐이다.
이 소리가 무엇인지 잠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이 잡음이 무전기에서 나는 소리임을 기억해냈다. 신서울대학교에서 내가 죽였던 남성이 가지고 있던 무전기. 아직 가지고 있었던가? 시끄러우니까 빨리 꺼버리자.
난 손을 다시 허공을 향해 뻗었다. 그러자 손에 딱딱한 물건이 잡혔다. 눈을 살며시 뜨자 내 손에는 무전기가 잡혀 있었다. 시끄럽게 울리던 무전기는 내가 잡자마자 쥐죽은 듯 조용해진다. 난 무전기를 꼭 잡고 눈을 감았다. 의식이 다시 수면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리고 무전기가 다시 울렸다.
'- - - -야!‘
나는 눈을 뜬다. 분명히 무전기에서 들려온 소리다. 난 의아함을 느껴 눈을 살며시 뜨고 무전기를 바라봤다. 무전기는 아까와 달리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마치 나를 잠에서 깨우려고 발악하는지 몹시 시끄럽고 거슬리는 소리였다.
그 잡음이 지나자 다시 한 번 무전기에서 익숙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지쳤냐?'
난 멍하니 무전기를 바라봤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러자 무전기는 뚝 끊겼다. 난 눈을 감고 대답을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무전기의 전원이 켜지더니 아주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야지 곽동윤이!'
나는 기다렸다는 듯 무전기에 입을 가져다대고 물었다.
'형님?‘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무전기의 잡음을 들으면 들을수록 흐릿했던 정신이 서서히 맑아지기 시작했다. 난 멍하니 깜빡이는 무전기의 화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또 다시 들려올까 하는 기대감에 귀를 기울였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잖아.'
무전기를 잡은 손에 힘이 가해진다. 난 무전기를 부셔질 듯 꾹 잡았다. 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난 수면 속에서 커다란 기침을 내뱉었다. 폐부에서 묵힌 숨을 내뱉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야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잠식하는 죽음에게 대항하기 시작했다. 거머리처럼 숨에 달라붙은 무기력을 계속해서 내뱉고 나를 속박하는 두려움을 연신 채찍질 한다. 헉 하고 숨을 들이켜자 가슴이 터질듯이 아파왔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쿵쾅하고 울려오는 심장소리는 마치 폭주한 기관차 옆을 지나는 듯 했다. 몸이 사정없이 울리고 귀가 먹먹하니 막혀온다. 그리고 눈이 찡하고 울려온다.
이내 눈에서는 따뜻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온다. 그 흘러나온 눈물은 더러운 눈가를 지나 볼 위에 주룩주룩 매달리다 바닥으로 떨어진다.
나는 무전기를 양손으로 꽉 잡았다. 내 몸속에 잔존하는 어두운 찌꺼기가 눈물을 타고 형편없이 빠져나온다.
내가 금방 간다고 약속했는데. 지금쯤 울면서 나를 찾고 있을 텐데. 채연이가 너무 보고 싶다. 채연이한테 빨리 가고 싶다. 이제 금방이다. 이제 코앞이다. 난 그렇게 내 마음속에 읊조림을 새겨 넣으며 눈물과 마음을 닦았다.
그러자 무전기는 금방이라도 꺼질듯 반짝이며 잡음을 내뱉었다. 그 모습은 곧 꺼지려는 촛불과 같아서 난 멍하니 그 무전기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화광반조, 나를 끌어당긴 무전기에서 마지막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는 오지 말고.'
무전기는 빛을 잃었고 내 시야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 멀리 등대가 보인다.
마치 불꽃이 점멸하듯 눈이 번쩍 뜨였다. 난 몸을 움찔거리며 긴 수면에서 빠져나왔다. 흐린 시야가 서서히 밝아오고 뇌에서는 신선한 산소를 거듭 요구했다. 난 입을 크게 벌리고 마치 산소가 없던 곳에서 돌아온 것처럼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목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 물이 고여 있는 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입에 고여 있는 물을 필사적으로 내뱉었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귀에는 옅은 이명과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난 주먹으로 가슴을 쾅 쾅 치며 필사적으로 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바닥에 긴 토악질을 내뱉었다. 많은 물들이 식도를 타고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눈앞에 떨어진 손전등을 잡았다. 손전등을 잡고 다시 앞을 밝히자 어두운 하수구 내부가 환하게 밝아져왔다. 난 아까 그 자세로 하수구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깊은 심연도 없었고 몸을 잠식하는 찌꺼기도 없었다.
다시 손전등을 입에 물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다시 기어가기 시작했다.
꽁꽁 얼어버린 듯 아무 감촉이 느껴지지 않던 피부는 다시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차가운 물 때문에 피부는 따끔거렸고 불어오는 칼바람에 머리를 지끈지끈 아파왔다. 하지만 바람이 분다는 건 저 앞에 나갈 길이 있다는 것이다. 난 희망을 가슴 한가득 담았다.
상처 부위에 들어간 물 때문에 상처부위는 고통을 넘어선 뜨거움마저 느껴졌고 질질 끌고 있는 발등은 칼로 쑤시듯 아파왔다. 그럼에도 난 멈추지 않고 기었다.
그리고 한순간 멈춰서 내 손에 잡혀있는 무전기를 바라봤다. 무전기는 조용했다. 난 무의식적으로 무전기를 흔들고 전원을 켰지만 무전기를 켜지지 않았다. 이내 손을 쫙 펴 손바닥 위에 무전기를 올려놓는다.
그리고 무전기를 손전등으로 비춰본다. 정신없이 도망 다니고 부딪히면서 망가진 건지 무전기는 뒤틀려 있었고 물로 흠뻑 젖어있었다. 켜지지 않는 게 당연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부터 망가져 있던 무전기.
난 한동안 무전기를 바라봤다.
그리고 미련 없이 뒤로 던지고 저 앞에 보이는 구멍을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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