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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살아있다-36화 (36/313)

[36]

그놈들이 금방이라도 내 뒤를 덮칠 것 같았지만 뒤를 돌아볼 찰나의 순간도 없었다. 추운 날씨에 땀이 비 오듯 내린다. 난 뛰면서도 소매로 눈물과 땀을 닦아냈다. 정신이 흐려지니 시야도 좁아진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입에서는 연신 꺽 꺽 소리가 나온다.

어느새 우리가 걸어왔던 길은 지나와 있었다. 정문에서 상당히 멀어졌음을 자각하자 안심과 후회가 섞인 복잡한 감정이 거친 숨과 함께 올라왔다. 돌아갈 거야. 돌아갈 수 있어. 난 입으로 읊조렸다. 그 읊조림은 숨과 함께 침처럼 뭉개지며 흘러내렸다.

이제는 그놈들 발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린다.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놈들이 뻗는 손과 이빨이 눈앞에 훤하다. 갈림길이 지나고 신서울대학교가 천천히 멀어진다. 큰길이 지나가고 좁은 골목들이 나타난다.

난 아무 생각 없이 그곳으로 뛰어간다. 좁은 골목은 양쪽에 주차된 차들로 가득했다. 한사람만이 지나갈 수 있는 간격에 나는 황급하게 몸을 옆으로 돌리고 게걸음으로 전진했다.

나를 따라오던 그놈들은 갑자기 좁아진 간격에 자기들끼리 충돌하고 밟으며 그 간격을 꾸역꾸역 따라오고 있었다. 몸이 뭉개지고 서로를 밟으면서도 손과 눈은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놈들이 내뱉는 괴음이 귀를 자극한다.

마치 육편의 파도가 저럴까? 이제는 해일처럼 서로를 밀고 밟으며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차들은 박살이 나고 그 위는 시체의 파도가 차지한다. 극한까지 몰고 오는 두려움에 나는 크게 고함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뛰었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표지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난 망설이지 않고 그쪽으로 뛰어갔다.

관악산 야외 수목원. 물론 당시에는 정신이 없어 표지판 글자를 읽고 판단할 겨를도 없었다. 막다른길인지 혹은 더 위험한길인지, 난 겁도 없이 그곳을 향해 정신없이 뛰어갔다. 좁은 골목을 빠져 나가자 넓은 길이 나타났다.

오른쪽에는 나무가 가득했고 왼쪽에는 작은 내천이 흐르고 있었다. 난 침을 꿀꺽 삼키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심장이 터질듯이 뛰었고 잔뜩 예민해진 신경은 계속해서 내 머릿속에 두려움을 자극했다.

뒤를 살짝 돌아보자 회색 파도가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산자를 삼키는 죽은 자, 모든 것을 쓸어 담는 죽음의 파도가 이곳을 향해 휩쓸려온다. 서로를 밟고 밀면서도 그놈들의 붉은 눈빛은 온전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발부터 머리끝 까지 소름이 끼치는 게 느껴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다시 앞을 바라봤다. 가공할 속도다. 이제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길이 좁아지는 착각에 빠진다. 이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길이 불타오른다. 아니, 그런 신기루가 보인다. 공포는 청각을 마비시키고 지옥의 이명만이 길게 울린다. 발밑이 뜨겁고 난 숨이 천천히 막혀 옴을 느낀다.

금방이라도 발밑이 꺼질 듯한 위험한 사선을 뛰고 있었다. 다리 근육이 울려오고 몸에 힘이 점점 사라진다. 저 파도가 나를 금방이라도 덮칠 것 같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댄다.

바로 뒤다! 바로 뒤에 있다. 파도가 바로 뒤까지 따라왔다. 그놈들이 땅을 밟고 서로가 뒤엉키며 내는 둔탁한 소리가 미친 듯이 울린다. 그리고 그들이 내뱉는 괴음이 바로 뒤에서 들려온다.

시야가 흔들린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과 콧물이 형편없이 볼을 타고 바닥에 떨어진다. 생각이 사라진다. 의식도 저만치 날아간다. 아니야, 아니야. 생각을 해라. 살아야 하는 생각을 해라. 난 나에게 계속해서 되새겼다. 지옥을 빠져나가야 한다.

시선을 옆으로 돌린다. 좁아진 시야로 물이 흐르는 개천이 보였다. 이곳은 어디지 라는 생각보다 먼저 발을 틀었다. 내 몸은 옆으로 기울어지고 난 본능적으로 바닥을 박찼다. 그리고 개천을 향해 몸을 던진다.

눈을 한번 감고 뜨자 공중에 뜬 내 몸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고 뜨자 아까 내가 달리던 자리를 회색 파도가 쓸고 지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은 바닥에 형편없이 떨어진다. 그리고 몸에 강렬한 통증이 가해지는걸 느꼈다.

정신이 아찔해지고 의식이 사라질법한 강한 통증이 내 등을 타고 올라온다. 난 컥 소리를 내며 입을 벌렸다. 그리고 고통을 내뱉으며 눈을 깜빡인다. 골이 울리고 머리가 아프다. 난 인상을 쓰며 흐릿한 시야를 바로잡으려 노력했다.

최대한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거세게 흔들었다. 흐릿했던 시야가 천천히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저 앞은 내가 도망치던 길, 이곳은 그 옆에 개천. 자각이 되는 순간 난 아찔했던 정신이 다시 또렷하게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도망가자!

나는 돌아오지 않는 감각을 되찾기 위해 발버둥 쳤다. 얼굴 위로 물방울이 흩뿌려지는 게 느껴졌다. 난 일어나려 몸을 세우다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발목까지 오는 물이 튀기고 내 온몸을 적셨다.

바닥을 손으로 짚고 꺽 꺽 숨을 내뱉는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이 몸에 닿자 난 싸늘한 오한을 느꼈다. 그 차가움은 불처럼 타오르는 내 정신을 붙잡아준다. 잔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자 개천으로 몸을 날리는 그놈들이 보인다.

그놈들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놈들은 내 살코기를 씹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난 바닥에 토악질을 했다. 숨이 막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난 살기위해 본능처럼 기어갔다.

그리고 겨우 몸을 세우고 비틀비틀 뛰며 최대한 그놈들과 멀어지기 위해 노력했다. 난 힘겹게 팔 다리를 휘저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발을 움직일 때마다 물을 가르는 시끄러운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와 함께 무언가 둔탁한 물체가 물가에 떨어지는 소리도 늘어나기 시작한다. 마치 날치 무리가 수면위로 뛰어들듯 미칠 듯한 소음이 귀를 찌르르 울린다. 첨벙 첨벙 첨벙!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몰려오는 한기와 공포 때문에 몸이 사정없이 떨린다. 이빨과 이빨이 부딪히며 딱딱 울린다. 물은 족쇄처럼 내 몸에 달라붙어 나를 끌어당긴다.

그렇게 한참을 뛰었다. 죽음을 건 추격전은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저 멀리 냇가가 끝나는 지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냇가로 이어지는 다른 길은 없었다. 시야가 아득하니 멀어진다. 이제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단 생각에 입에선 연신 신음이 새어나왔다.

끅 끅 몰려오는 숨과 두려움을 삼키며 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올렸다. 손에는 나도 모르게 총이 잡혀있었다. 얼마나 강하게 잡았는지 손은 잔뜩 경직되고 피부는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난 한쪽 손으로 노리쇠를 당겼다. 묵직한 장전 음이 찌르르 손끝에 울렸다. 천천히 총을 들어 올려 총구를 앞으로 세우고 마지막 발버둥을 치기위해 눈을 크게 뜬다.

달려오는 그놈들을 바라보며 난 조준간을 옮겼다. 그러다 자연스레 시선이 바닥에 흐르는 물로 향했다. 난 멍하니 흐르는 물을 바라봤다. 평범하게 흐르는 물과 같은 삶이었다. 남들이 흐르는 방향으로 흐르고 남들이 막히는 벽에 막혔다.

왼쪽, 오른쪽, 내가 흐르고 싶어 흘렀던 삶은 절대 아니었다. 그러다 갑자기 내 삶은 거친 조류가 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밟고 위로 솟아오른다. 충돌하고 격하게 섞이는 그런 거친 조류.

난 흐르는 물을 멍하니 바라보며 위급한 순간에서도 작은 상념에 빠졌다. 풍선이 갑자기 터진 듯 긴장감도 공포도 두려움도 한순간에 모두 날아가 버린다. 이제야 머리가 차갑게 식는다.

난 총을 들어 올려 조준간을 그놈들 사이에 놓았다. 이상하게 조준간은 흔들리지 않았다. 방아쇠를 당긴다. 한 놈이 쓰러진다. 또 방아쇠를 당긴다. 또 한 놈이 쓰러진다.

탄피가 튀어나와 바닥에 떨어진다. 화약 연기가 총구에서 아지랑이처럼 솟아올라 천천히 흩어진다. 난 정신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마치 과녁을 맞히는 착각이 든다. 한발 한발 쏠 때마다 그놈들 머리가 터져 바닥에 쓰러진다.

체념일까 아니면 그저 여태까지 겪어왔던 경험인가. 죽음 앞에서 나는 너무나 침착하게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많은 수가 쓰러졌음에도 더 많은 숫자가 그 뒤를 따라붙는다. 난 담담하게 빈 탄창을 빼내고 탄띠에서 마지막 탄창을 꺼내 들었다.

마지막 탄창을 들고 장전한 순간 그대로 동작을 멈추고 손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멍하니 이쪽으로 달려오는 그놈들들 바라봤다. 잡히면 고통스럽게 죽겠지?

난 천천히 총을 거꾸로 들어 총구를 내 턱 아래로 향했다. 방아쇠를 당기면 모든 게 끝난다. 고통 없이 단숨에 죽는 것이다.

눈을 감자 단편영화가 막을 내리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놈들이 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저 내 발아래를 졸졸 흐르는 물소리만이 들려온다. 눈을 살며시 뜨고 발아래를 바라본다.

그놈들이 흘린 검은색 피가 물에 섞여 이곳으로 천천히 흐른다. 맑은 물은 더러운 피로인해 시궁창으로 변해 버렸다.

검은색 피로 물든 물이 나를 지나쳐 내 뒤로 흐른다.

흐른다?

난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황급하게 뒤를 돌아봤다. 막힌 물길인줄 알았다. 아니 이곳은 막힌 물길이 아니었다. 분명히 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황급하게 뛰어가 풀로 가려진 막다른길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날카롭고 억센 풀 때문에 손이 베인 듯 아려왔지만 난 파헤침을 멈추지 않았다. 풀을 반쯤 치우자 그곳에는 큰 하수구 구멍 하나가 존재하고 있었다. 철근을 십자 모양으로 만들어 막아뒀지만 오랜 침수로 철근을 잔뜩 녹슬어 있었다.

나는 황급하게 뒤를 돌아봤다. 그놈들이 이곳까지 도착하는데 10초 내외. 나는 고함을 내지르며 발로 철근을 걷어찼다. 철근은 위태롭게 흔들리면서도 그 하수구 입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총을 들고 철근 가장자리로 조준했다.

한발 두발 다시 한발! 3발을 연달아 갈겼지만 애꿎은 콘크리트만 튀긴다. 난 그놈들이 첨벙첨벙 접근하는 소리가 들리자 이성을 유지할 수가 없었고 결국 고함을 내지르며 총을 난사했다.

얼굴에 돌조각이 튀기고 가루가 뿌옇게 눈앞을 가렸다. 그리고 팅 하는 소리와 함께 철근 한쪽이 반쯤 부서진 모습이 보였다. 난 지체 없이 발로 그곳을 걷어차 철근 한쪽을 뜯어낸다. 좁은 입구, 딱 한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간격이 생겼다.

난 거침없이 그쪽으로 몸을 던져 구겨 넣는다.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그 좁은 간격을 통과하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리고 그 좁은 간격을 반쯤 통과한 순간 무언가 내 발목을 잡는 게 느껴졌다.

난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내 발을 잡은 그놈을 걷어찼다. 그놈은 걷어차이면서도 이빨을 내게 드러내며 지독한 살의를 나타냈다.

난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어 강하게 그놈 얼굴을 걷어찼다. 그놈은 잠시 비틀거렸고 난 그 순간 빠르게 발을 빼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기어서 하수구 안쪽으로 기어갔다.

끈적끈적한 물때와 쓰레기들이 앞을 가리고 지독한 냄새를 풍겼지만 난 살기위해 그것을 무시하며 끝없이 어두운 하수구 안쪽을 기어갔다.

그리고 큰 괴음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그놈들이 그 좁은 입구를 통과하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난 황급하게 총을 꺼내 그쪽을 향해 조준하고 정신없이 난사했다.

제발 오지 마! 죽어!!!!

난 고함을 내지르며 탄창을 다 비울 때까지 방아쇠를 당겼다. 좁은 입구를 통과하려던 그놈들은 총을 맞고 움직임을 멈췄고 뒤에 있는 그놈들이 그것을 무식하게 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죽은 시체들은 좁은 입구를 틀어막았다.

철근과 시체가 엉킨다. 마치 배수구가 막히듯 하수구 입구는 막히고 말았다. 그 뒤에서는 나를 놓쳤다는 분노가 섞인 괴음이 울렸다.

적어도 수백 마리가 내뱉는 괴음이 내 피부를 짜르르 울렸다. 그놈들은 시체를 뒤로 뺄 생각을 못하는지 무식하게 시체를 밀기만 했다. 그놈들의 단순한 행동이 내 목숨을 살렸다. 이내 주위가 조용해진다.

하수구 입구가 막히자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총소리 때문에 귀가 먹먹하다. 그 어두운 하수구 안속은 내 숨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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