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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살아있다-34화 (34/313)

[34]

눈을 뜨자 나를 내려다보는 노인이 보였다. 노인은 아무 말 없이 물병을 내 입에 기울여준다. 나 또한 아무 말 없이 입을 벌렸고 들어오는 물을 천천히 받아 마신다. 물이 들어오자 잔뜩 말라있던 입속은 환호를 지르며 한 방울이라도 더 먹기 위해 발버둥 친다.

나는 황급하게 손을 뻗어 물병을 잡고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막혀있던 숨을 거칠게 내쉬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마른세수를 했다. 나는 버스안 한가운데 누워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모든 창문은 천들로 막혀 있었고 일행들은 전부 바닥에 눕거나 의자위에 누워 잠에 빠져 있었다.

채연이와 강수련은 서로를 꼭 안고 잠에 들어있었다. 난 그 모습을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마음속에 막혔던 무언가가 훅 하고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귀는 내가 다시 소독했네.'

노인은 가만히 앉아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손을 들어 상처 주위를 더듬거렸다. 그곳을 묶고 있던 더러운 천은 사라졌고 낡았지만 깨끗한 천이 상처부위를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은은하게 느껴지는 고통과 따가움은 아픔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그리고 다쳤던 발을 바라보자 나무로 만든 부목과 함께 천이 감싸져 있었다. 나는 이 모든 조치를 노인이 해준걸 깨닫고 노인에게 천천히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노인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나는 침을 몇 번 삼키고 주위를 둘러보며 노인에게 물었다.

'이곳이 어딥니까?'

그러자 노인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네가 기절하고 몸을 숨길 곳이 필요했어.'

노인은 나에게 잠시 오라고 손짓했고 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노인에게 다가갔다.

노인은 살며시 주저앉아 창문 한쪽을 가린 천을 살짝 들어 올리며 나에게 보여줬다. 밤이 지난 듯 옅은 여명이 올라오고 있었다. 끝없이 울리던 총성과 비명은 들리지 않았고 신서울대 곳곳에서 검은 연기와 불들이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건물들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괴음을 지르는 그놈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난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했는데 그 총성 한발이 그놈들을 이곳으로 인도한 것이다. 밤사이 이곳은 지옥으로 변했다.

'신서울대 근처를 막았던 바리게이트 버스중 하나야.'

노인은 내 옆에서 그렇게 속삭였다. 노인의 말에 나는 그제야 이 버스의 정체가 기억이 났다.

'안전한 겁니까?'

나는 침을 삼키며 그렇게 물었고 노인은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아침 해가 뜨면 바로 탈출해야지. 자네가 쓰러져서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온 거야.'

난 어젯밤 상황을 묻고 싶었지만 이내 묻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노인은 창밖을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천으로 다시 가리고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리고 나에게 물었다.

'인원이 많아.'

나는 다시 한숨을 쉬며 노인에게 대답했다.

'그러게요.'

나, 그리고 노인과 손녀, 채연이와 강수련, 그리고 여자애를 포함한 아이들 4명. 나와 노인을 제외하고는 비전투 인원이 대부분이다. 난 잠시 눈을 감으며 생각에 빠졌다. 무거운 짐을 짊어진 기분이었다.

한참 생각에 빠져 눈을 감고 아침이 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한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눈을 뜨자 채연이와 같이 있던 여자아이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인가 하고 아이를 바라봤고 한참 가방을 싸던 노인도 그 아이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 아이는 갑자기 바닥에 앉아 무릎을 꿇고 우리에게 빌었다.

'제발 저희도 데려가주세요……. 뭐든지 할게요…….'

아마 아이는 잠을 자지 않고 노인과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이다. 무릎을 꿇고 우리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두 눈에는 눈물을 머금는다. 애절한 목소리에는 살고 싶다 그리고 아이들을 살리고 싶다는 처절함이 느껴졌다.

나는 살며시 노인의 눈치를 살폈다. 이 아이도 알고 있을 것이다. 종말이 찾아온 세상에서 아이라는 이유로 보호받을 권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강제적인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저렇게 빌고 또 비는 것이다.

사실 나는 마음속 한 구석에 이들을 데리고 가자는 작은 다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그렇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자 괜한 불안감이 들었다. 학교에서 대답을 듣기는 했지만 사람 마음이란 모르는 것이다. 이것은 충동적인 동정으로 결정한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노인이 따로 행동하자 하면 어쩌지? 하는 그런 애 같은 불안감. 그 불안감에 나는 연신 시선을 노인 쪽으로 돌렸다.

노인은 처음에 얼굴을 굳히더니 이내 일어나 천천히 여자아이에게 다가갔다. 여자애는 갑자기 다가오는 노인을 보고 반사적으로 움츠리며 몸을 말았다. 그리고 손으로 몸을 막으며 잔뜩 겁을 먹었다. 그 행동 하나하나가 이전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난 씁쓸한 침을 삼키며 노인을 바라봤다. 노인은 천천히 여자아이 앞에 앉아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불쌍한 것, 얼마나 힘들었을꼬…….'

강인하고 굳센 노인은 어디 갔는지 내 눈앞에 보이는 노인은 어린 손녀를 대하는 평범한 할아버지로 변해 있었다. 연신 혀를 차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내 가방에서 비스킷을 꺼내 아이 손에 들려준다.

그리고 다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장하다 장해. 네가 저 아이들을 다 데리고 온 거지? 대단한일을 한거야.'

처음에는 움찔하던 아이도 노인이 하는 말에 서서히 울먹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울음을 터트렸다. 혹여나 큰 소리가 들릴까 손을 입으로 막으며 눈에서는 연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린다.

이 아이들 중에선 가장 크지만 그래도 아직 어린 여자아이다. 얼마나 큰 고초를 겪었을까. 그 서러움이 폭발한 듯 여자아이는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노인은 그 아이의 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우리랑 같이 가자꾸나. 이제 짐을 내려놓으렴.'

그 말에 아이는 눈물 때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조용히 고개만을 끄덕였다. 오랜만에 보는 정상적인 풍경이었다. 그렇다, 원래 인간은 이런 생물이다. 서로 돕고, 위하고 동정한다.

나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오랜만에 느끼는 평화를 만끽했다.

그러다 노인과 눈이 마주쳤고 괜한 어색함에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창밖을 살펴봤다. 해가 뜨기 시작하고 세상은 밝아진다. 그러자 내가 채연이를 데리고 무사히 탈출했다는 게 실감이 가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이 먼 여정처럼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얼굴 가득 들어오는 햇빛을 만끽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안전한 은신처 그리고 인원이 많아진 만큼 필요한 식량. 앞으로 다가올 추위. 그리고 여전히 두려운 그놈들과 다른 생존자 무리들.

당장 내일을 살 수 있다는 확신도 없었고 내 마음에는 종말이라는 짙은 찌꺼기가 남아있었다. 죽은 사람들이 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 여전히 나를 괴롭힌다. 그럼에도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두려움, 난 이제 그것과 직면하려 한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 * * * * * *

노인과 나는 일행들을 전부 깨웠다. 다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군말 없이 노인과 내 지시를 따른다. 채연이는 잠에서 일어나자마자 나에게 달려와 안겼고 또 울음을 터트렸다.

'당신이 쓰러진걸 보고 많이 놀랐어요.'

안색이 훨씬 좋아진 강수련이 채연이 뒤에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채연이에게 항상 걱정만 끼치는 것 같았다. 난 미안함을 느끼며 한참을 달래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다리에 꼭 붙은 채연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주위를 둘러보자 일행들은 전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묵직하게 짓누르는 책임감에 침을 한번 삼켰다. 노인은 천천히 다가와 나에게 무전기를 보여주며 말했다.

'무전내용은 새벽에 끊겼어. 살려달라는 내용이 마지막이야.'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눈을 감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인과응보일까? 인간 같지도 않던 무리는 인간이 아닌 무리에게 쓸려나갔다. 모두가 죽었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소중한 사람들을 모두 찾았다. 그리고 지옥에서 빠져 나왔다.

이제는 살 길을 찾을 차례다.

나는 감았던 눈을 뜨고 노인과 일행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입을 열어 말했다.

'산으로 들어가 원래 있던 곳으로 향할 생각입니다.'

도시 내부에서 적절한 은신처를 찾을 수도 있었다. 물자를 찾기도 쉬웠고 산속보단 비교적으로 온도도 높았다. 하지만 항상 주위를 돌아다니는 그놈들과 언제 적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생존자들은 위험한 요소 중에 하나다.

일행 대부분이 비전투 인원이다. 부족한 물자를 걱정하고 낮은 온도에 추위를 떨지언정 주위에 위험요소를 둘 수는 없었다. 우린 겁 많은 벌레처럼 숨어들어야 한다.

노인은 묵묵히 듣다 대답했다.

'자네 의견을 따르겠네.'

노인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별다른 사족을 달지도 않았는데 들어봤자 뭐 하겠냐는 듯 빠른 동의를 보내왔다. 노인이 군말 없이 동의하자 노인 옆에 있던 손녀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채연이는 내 다리에 꼭 붙어 나를 올려다봤고 강수련 또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따라온 아이들은 바라보자 아이들은 또랑또랑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천히 시야를 넓혀 모두를 바라보자 모든 일행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 속에 완전한 동의, 우리의 목적지는 그렇게 정해졌다.

부족한 식량과 바닥을 드러낸 식수, 그리고 갈수록 떨어지는 온도. 이 인원을 데리고 산을 올라 쉼터로 향해야한다.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긴장감이 온몸을 강하게 짓누르지만 난 양손으로 볼을 짝짝 치며 전의를 가다듬었다. 할 수 있다.

'그럼 움직입시다.'

나는 마치 아무 일도 없을거라는 듯 담담하게 말했고 일행은 천천히 움직여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내가 챙겨온 가방을 열어 남은 비스킷 수량과 물들을 확인했다. 이 인원으로 아껴먹는다 해도 하루면 다 없어질 수량이다. 나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고 가방을 챙겨든다.

내가 쓰러진 사이 물건들을 챙겼는지 처음볼때 비교적 가벼운 옷차림이던 여성들과 아이들은 두꺼운 옷들을 입고 있었다. 남성용에 사이즈는 많이 커보였지만 이 추운 겨울 산을 오르기에 꼭 필요한 물품이었다.

여성과 아이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노인은 눈치를 살피더니 나에게 천천히 다가와 낡은 스포츠 가방을 내밀었다. 나는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노인은 아무 말 없이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급하게 챙겨왔는지 피가 묻은 총들과 탄창, 그리고 대검까지 다양하게 존재했다. 아마 법과대 건물 앞 교전장소에서 수거해온 모양인데 나는 노인의 빠른 판단에 감탄 하면서도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가라앉았다.

'일행들에겐 비밀로.'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 나에게 총을 건넸다. 내가 기절한 사이에 잊지 않고 챙겨온 모양이다. 난 익숙하게 총을 받아들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총구 끝에 대검이 날카롭게 빛난다.

모두 준비를 끝마치자 노인은 창문들을 가렸던 천들을 수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방에 모든 천들을 챙기고 한쪽 창문을 가리키며 손짓했다. 나는 그곳으로 빠르게 걸어가 제일 먼저 창문을 넘었고 밖에 발을 디뎠다.

나는 버스 아래로 내려오자마자 빠르게 주위를 경계했다. 신서울대 외곽에 존재한 바리게이트 버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자 상당히 익숙한 지형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이 길은 우리가 걸어왔었던 길이었다.

총을 꽉 잡고 열심히 주위를 둘러봤지만 그놈들은 아직도 학교 내부에 남아서 포식을 즐기고 있는지 근처에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버스 쪽으로 손짓하며 천천히 버스 아래로 접근했다.

나 다음으로 노인이 창문에서 빠져 나왔다. 노인은 익숙하게 창문을 넘었고 바닥에 내려오자마자 엽총을 들고 주위를 경계했다. 나는 내려오는 일행들을 도와주기 위해 버스 창문 쪽으로 접근해 손짓했다.

강수련은 창문에 붙어 채연이를 살며시 들어 올리더니 창문 밖으로 내밀었다. 나는 채연이를 아래서 받아들고 조심히 내려놓는다. 그리고 차례차례 아이들이 넘어오기 시작했고 잔뜩 겁을 먹은 여자아이도 내려온다.

다음은 노인의 손녀.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수련이 창문에서 넘어왔다. 일행들은 버스 옆에 딱 붙어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노인은 엽총을 천천히 내리고 내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일렬로 걷지. 자네가 선두 내가 후방.'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이 제안한 포지션이 지금 상황에선 가장 베스트다. 나는 캐어가 필요한 인원과 캐어가 가능한 인원을 추려 대형을 일렬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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