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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살아있다-33화 (33/313)

[33]

강수련은 힘없이 내 손에 이끌려 창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창밖으로 나오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몸을 비틀거렸다. 난 서둘러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는 거친 숨을 내쉬면서 계속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이제는 가벼워진 가방을 앞으로 돌려 매고 강수련에게 등을 내밀며 업히라고 말했다. 그녀는 처음에 자기 발로 걷겠다고 말했지만 난 아무런 대꾸 없이 등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는 훌쩍이며 내 등에 업혔다.

가늘어진 팔과 손을 보니 입안이 더욱더 씁쓸해진다. 그녀는 너무나 가벼웠다. 나는 가방에서 물 한 병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고 천천히 마시라 당부했다. 비스킷도 주고 싶었지만 오랫동안 굶은 그녀에게 갑작스러운 음식은 독이다.

나는 그녀를 업고 천천히 몸을 움직여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조심스럽게 복도를 지나 내가 들어왔던 문 밖으로 향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벽에 숨어 건물 양쪽을 살펴봤지만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다만 저 멀리서 총성과 폭음 그리고 비명이 들려오고 있다는 것만 빼고.

시끄럽게 울리는 무전 내용으로 급박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놈들이 몰려오는 게 분명했다. 그 생각에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최대한 빨리 도랑으로 향해 일행들과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아픈 발과 귀를 애써 참으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난 내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듯 걸음을 멈췄다. 익숙한 목소리다. 분명히 들어본 적 있는 여성의 목소리다.

잔뜩 경직되어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돌린다. 고개를 돌리자 방범창 사이로 손을 내밀고 나를 바라보는 이혜인이 보였다. 나는 숨이 천천히 막혀옴을 느꼈다. 그녀도 이 법과대 건물에 갇혀 있었다.

'죄송해요 아저씨 살려주세요. 저도 데려가주세요.'

그녀는 닿지 않는 나에게 연신 손을 뻗으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양손은 끈으로 묶여 있었다. 나는 몸에 힘이 빠짐을 느꼈다. 증오? 허탈함? 공허? 알 수 없는 감정이 내 몸을 덮쳐왔다.

그녀의 몰골은 강수련과 다르지 않았다. 머리는 밀려 있었고 얼굴에는 상처와 멍이 가득했다. 목소리가 아니었으면 난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으리라. 그녀의 얼굴을 보자 분명히 화가 났다. 그녀가 너무나도 미웠으니까.

그런데 화를 내야하나? 어떻게? 내가 사람을 죽인걸 왜 말했어 라고 소리라도 쳐볼까? 난 그녀에게 혐오감을 느꼈었다. 하지만 그만큼 난 스스로에게도 혐오감을 느꼈었다.

나는 그저 저런 몰골로 변한 그녀에게 허탈함만을 느꼈다. 모든 게 공허했다. 복수도, 증오도 그리고 미움마저도.

내가 그녀에게 복수를 하기도전에 이혜인은 이미 지옥 속에 빠져있었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어 물었다.

'……진수는?'

그러자 이혜인은 필사적으로 손을 뻗으며 외쳤다.

'진수를 찾아주세요 진수도 같이 데려가주세요! 여기서 꺼내줘요 제발!'

그녀의 눈은 정상이 아니었다. 입에서는 연신 침을 흘리고 동공이 풀린 눈으로 나에게 손을 뻗어왔다. 내가 입을 열려는 순간 등에서 거친 숨만을 내쉬던 강수련이 나에게 말했다.

'죽었어요.'

담담하지만 그 속에 담긴 복잡한 감정이 내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야!!!!!! 아니라고!!!!!!!!!!!!!!'

그러자 나에게 손을 뻗던 이혜인은 자기 머리를 쥐어 잡으며 거친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방범창에 연신 머리를 박으며 욕이 섞인 고함을 내지른다. 그 고함 속에 강수련은 담담한 목소리로 나에게 속삭였다.

'그놈들이 나랑 이혜인을 겁탈하려 했어요.'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혜인이 지르는 비명과 총성이 하모니가 되어 내 머리를 어지럽힌다. 속이 역겨운 시궁창으로 물드는 착각에 빠진다.

'그리고 진수가 그걸 막으려고 했죠.'

'그러다 죽었어요. 그들은 총알이 아깝다고 말하면서…… 진수를 칼로 찔렀어요.'

담담하게 말하던 강수련은 이내 한이 어린 울음을 터트리며 내 등에 얼굴을 묻었다. 등에선 따뜻한 눈물이 느껴졌다. 이혜인도 실성한 눈으로 눈물을 흘리며 방범창을 잡고 주저앉았다. 그녀는 입을 헤 벌리며 침을 흘렸고 이내 비명을 멈췄다.

속에선 마음이 진창이 되어 떨어져 나간다. 속이 썩어 들어간다. 나는 참담함을 느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이혜인에게 말했다. 난 내 마음속에 마지막 퍼즐을 맞춰야 했다.

'그때 나한테 꼭 죽여야 했냐고 그날 물어봤지.'

내 말에 이혜인은 멍한 눈으로 날 올려다봤다. 난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리고 토악질을 하듯 격하게 올라오는 숨을 참고 말했다. 그리고 손으로 방범창을 잡으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내가 죽인 군인, 총알을 가지고 있었어.'

속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난 죄를 가지고 있었다. 내 죄책감을 항상 짓누르던 죄. 불편한 진실을 그녀에게 말해준다. 나와 그녀는 진실 앞에 그제야 마주한다.

'총알이 있었는데 안 쏜 거야. 나를 죽일 생각은 없어나 봐.'

시야가 흐려진다. 눈물이 터져 눈앞을 가린다. 숨이 꺽 꺽 막혀 나는 힘겹게 숨을 내뱉었다. 지독한 자기혐오가 나를 덮친다. 아무리 변명 해봐도 나는 계속 제자리를 걷고 있었다.

'근데 나는 죽였어. 엄마가 보고 싶다고 너무 무섭다고 맨날 편지를 쓰던 애를 돌로 찍어서 죽인거야.'

이혜인은 벌렸던 입을 다물고 초점이 없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친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시궁창으로 변한 내 모습이 비친다. 누구의 잘못인가? 나는 세상에 대한 원망을 억누르며 끝내 속에 있던 바닥을 끄집어낸다.

그리고 그동안 쌓아둔 감정을 그녀에게 내뱉듯 고함을 지른다.

'안 죽여도 됐던 거야!! ‘

‘근데!! 왜!’

나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방범창을 두 손으로 꼭 잡고 오열했다. 목이 쉬어 이제는 울음조차 자연스럽게 나오지 못했다. 난 그동안 쌓아둔 한을 내뱉으며 이혜인과 눈을 마주쳤다.

등에서는 강수련이 연신 내 잘못이 아니라고 속삭이며 내 몸을 끌어안았다.

숨에선 공허와 허탈함이 샘솟듯 나왔다. 난 그 숨을 훅 내뱉으며 방범창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누구를 향해 말해야 할지 모를 원망을 담아 천천히 읊조렸다.

'네 말이 맞는데, 그게 맞는 건데……. 그럼 우린 왜 이렇게 돼버린 거야? ‘

누구의 잘못인가? 누가 맞는 것인가? 우리는 과연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가? 피 묻은 손을 들고 끝없는 자기혐오에 빠져 자멸하는 마지막 인간. 누군가 그것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종말은 너무나 급하게 찾아와 단 한가지만을 가지고 떠났다. 우리는 많은걸 빼앗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많은 것을 빼앗겼다. 그것은 인간성. 사람이 짐승이 되고 괴물이 된다. 그놈들은 우리를 죽인 것이 아니라 단지 숫자를 늘려갔을 뿐이다.

세상은 이제 변하지 않는다. 그 속에서 난 과거의 인간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

난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이 거친 삶을 씹어내듯 삼키며 말했다.

‘오늘로 마지막이야.’

난 총에서 대검을 빼내 방범창 사이로 던졌다. 그리고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지금 그녀에게서 내 과거를 봤다. 난 겁쟁이처럼 숨었었다. 그리고 비겁하게 모든 잘못을 창밖 세상으로 돌렸었다. 후에 모든 걸 잃고서야 내 행동을 후회했었다.

하지만 난 이제 그 영원한 연결고리를 끊으려한다.

'줄을 끊고 도망가. ‘

‘그리고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

그래, 마치 없었던 사람처럼.

그리고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모든 것을 털어내는 것이다. 후회하던 과거도 마치 찌꺼기처럼 나를 옭아매던 죄책감도. 그리고 내 머리를 가득 채웠던 증오와 복수도! 여기서 모두 털어낸다.

이혜인은 초점 없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내밀어 바닥에 떨어진 대검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대검을 손에 쥐자마자 그녀의 초점 없는 눈이 똑바로 돌아온다. 그녀의 얼굴에는 많은 감정이 보였다.

부러움과 후회 그리고 죄책감.

이혜인은 나를 올려다보며 대검을 양손으로 꼭 잡는다.

그리고 허탈한 웃음을 머금고 나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그리고 그녀는 대검을 들어 자신의 목을 찔렀다. 피가 분수처럼 튀어 오른다. 그녀는 입에 피를 머금고 실이 끊긴 인형처럼 힘없이 바닥에 쓰러진다. 난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눈을 꼭 감았다.

그녀는 지옥에서 탈출했다.

이기적인 죽음,

그녀는 내 마음속에 큰 흉터를 남기고 그렇게 떠나갔다.

저 멀리서 노인이 내뱉는 외침이 들려온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노인과 채연이 일행들이 나를 향해 정신없이 뛰어오고 있었다.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이 들자 시야가 흐려졌다.

머리가 띵하다. 그리고 잠이 파도처럼 몰려온다. 의식은 저 멀리 날아가고 단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하다. 피곤하다, 지친다. 할일이 산더미다. 일행과 이곳을 탈출하고 안전한곳으로 향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 * * * * * *

난 불타오르는 도시위에 서있었고 이 세상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녹아내렸고 죽은 자만이 허공을 바라보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끈적끈적한 증오가 내 발밑에 달라붙어 내 몸을 잡아 누른다.

도시를 가득채운 불들이 하늘높이 치솟아 오르자 죽은 자들은 호응하며 비명이란 하모니를 뱉는다. 숨을 들이켜자 뜨거운 공기가 내 폐부를 가득 채운다. 내가 숨을 쉬자마자 죽은 자들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이 불타오르는 도시에서 산 자는 없었다. 인페르노! 끝없는 불꽃 그리고 지옥. 피로 적셔진 글자들이 내 눈앞을 수놓는다. 죽은 자들이 몸을 움직여 나에게로 기어온다. 도망치려 발을 움직여 봤지만 불과 시궁창이 내 발목을 잡았다. 난 지옥 속에 있었다.

그리고 내 팔을 잡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난 그것을 필사적으로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과 증오는 내 몸에서 떨어져나가고 시궁창을 아쉽다는 듯 저 멀리 흘러내린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이혜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짧게 잘렸던 머리는 어디 갔는지 처음 봤던 그 모습 그대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혜인은 입을 벌려 무언가 내게 속삭였다. 난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아 그녀에게 큰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내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저 빈 허공에 놓여있던 뜨거운 공기만이 내 입속으로 들어와 말문을 막았다. 이혜인은 나를 똑바로 일으켜 세웠고 다시 입을 벌려 말했다. 난 필사적으로 그 입모양을 읽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미안해요.'

그녀의 얼굴을 바뀌기 시작한다. 화장실에서 죽인 괴한, 그리고 쉼터에서 죽인 군인. 오피스텔에서 떨어져 죽은 여자와 기억 속에 남아있는 진수의 얼굴. 마지막으로 방범창 사이에서 본 이혜인의 자살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이 모든 게 지옥에서 불타 재가 되어 흩날린다.

그리고 내 몸은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진다.

불타오르는 도시가 천천히 멀어졌다. 수면 속에 천천히 가라앉듯 난 도시와 멀어지기 시작했다. 의식은 심연 속에 빠져 서서히 없어진다. 불타오르는 도시는 사라지고 우리들의 도시가 보인다. 미안해요, 다시는 오지 말아요. 그토록 밉던 그들과의 건조한 이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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