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침묵보다 조용했던 어둠이 깨진다. 난 거친 숨을 내뱉으며 한참을 허공을 바라봤다. 격발음과 함께 찾아온 반동은 순식간에 침묵을 가져간다. 그리고 총성은 타협없이 삶을 가져갔다.
그 대가는 그저 작은 떨림. 이 잔잔한 떨림을 손안 가득 느끼며 뒤를 돌아봤다. 아이들은 깜짝 놀란 듯 죽은 남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채연이는 내 바지를 꼭 잡고 다리에 안겨있었다. 난 침을 삼키고 다시 아이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시야를 돌려 입을 벌리고 멍하니 있는 여자애를 보며 말했다.
'난 채연이랑 여길 탈출할 거야.'
여자애는 입을 헤 벌린 상태로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입을 꾹 다문다. 그리고 무언가 간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다리 쪽에선 무언가 나를 꼭 잡는 게 느껴졌다. 그곳을 내려다보자 채연이는 나를 빤히 올려다보는 게 마치 '알죠?'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없다. 설득한 시간도 없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애들은 알아서 챙기고 따라와.'
여자애는 내 말을 듣자마자 작은 울음을 터트렸다. 울음이 많은 아이였다. 여자애가 울음을 터트리자마자 아이들도 무엇이 그렇게 서러운지 따라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 감정을 깨기 싫었지만 지금은 울 상황이 아니다.
그렇기에 엄한 얼굴로 뚝 그치라고 말했다.
애들이 울음을 삼키며 나를 똘망똘망한 눈으로 쳐다본다. 나는 총을 꽉 부여잡고 천천히 일어났다. 채연이를 안으려고 했지만 채연이는 나도 뛸 수 있어요! 라고 말하고 싶은건지 다부진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나는 채연이 머리를 쓰다듬는걸 잊지 않았다. 그리고 반쯤 뛰는 걸음으로 재빠르게 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 뒤를 도도도 하고 따라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채연이는 내 손을 꼭 잡고 열심히 따라온다.
수의과 건물은 금방이었다. 건물에 도착하자마자 건물에 찰싹 붙어 주위를 둘러봤다. 뒤를 살짝 바라보자 아이들은 내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었다. 여자애가 잘 챙기는지 낙오자는 없었다.
나는 벽에 찰싹 붙어 맞은편에 보이는 체육관 건물을 바라봤다. 내가 그 사내를 죽였던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시끄럽게 울리는 무전기를 들고 있었고 군복을 입은 남성들이 빠르게 뛰어다니는 것도 보였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곳으로 지나가는 건 무리다.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민하는 순간 옆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어디로 가는 거죠?'
고개를 돌리자 그 여자애가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급박한 상황에 조금 짜증이 났다. 그리고 네가 알면 뭐할 거냐는 생각이 들어 조금 귀찮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운동장 근처 바리게이트'
그리고 다시 그놈들 동향을 살펴봤다. 그러자 여자애는 다시 내 어깨를 톡톡 치며 말했다.
'제가 다른 길을 알아요.'
나는 여자애 말속에서 다른 돌파구를 찾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괜한 불신에 입술을 꽉 깨물며 물었다.
'확실해?'
그러자 여자애는 다부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해요.'
나는 아이를 한참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여자애는 옆쪽 건물 뒤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뒷길이 있어요.'
난 아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다. 결국 다른 방안이 없다는 생각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뒷길을 향해 자세를 숙이고 빠르게 걸어갔다. 내가 뒷길에 들어서자 여자애는 방향을 가리키며 나를 안내했다.
건물 뒤편에는 산과 근접한 작은 길들이 있었다. 우리는 장애물이 없는 그곳을 빠르게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 간혹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큰길은 어느새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군인들이 보였다.
좁고 어두웠지만 분명히 안전한길은 맞았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고 간혹 빛이 새어나오는 창문만 조심하면 된다. 혹시 발소리가 들릴까봐 빠르게 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발소리를 주의하며 빠르게 걸으니 큰길에서 이동하는 속도정도는 나왔다.
내가 왔던 길과는 반대 방향이었지만 여자아이는 이 길이 분명하다 거듭 말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나는 아이의 말을 믿기로 했다. 그리고 아이가 이끄는 방향으로 하염없이 걸어갔다. 한 10분을 걸었을까? 갑자기 들려오는 총성에 우린 순간 정지했다. 아이들은 작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고 나도 화들짝 놀라 몸을 숙였다.
그리고는 이내 총소리가 길게 울리기 시작했다. 이곳을 향해 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근접거리에서 쏘는 총성이 분명했다. 그리고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근처에 법과대 건물이 있어?'
여자아이는 겁이 잔뜩 먹은 얼굴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초조함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다 아까 죽인 남자에게서 뺏은 무전기가 생각나 황급하게 주머니에서 무전기를 꺼냈다.
그리고 전원을 켜고 줄여뒀던 볼륨을 조심스레 키운다. 무전기는 잠시 잡음을 내뱉더니 이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호가 약한 듯 발음이 뭉개지고 잡음이 들려와 확실한 내용은 듣지 못했다.
시간이 잠깐 지나자 그 잡음 속에서도 남자들이 내뱉는 고함과 욕설이 섞여 들려왔다. 급박한 상황이 분명했다. 그리고 들려오는 총성은 더욱 더 커지고 많이 울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 나는 침을 삼키고 총을 꽉 부여잡았다. 그리고 황급하게 주위를 둘러보고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근처에 법과대 건물이 있다. 그리고 그쪽 방향에서 총성이 울리고 있다.
누구나 추측이 가능한 상황이다. 노인 쪽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나는 초조함에 연신 입술을 깨물고 눈알을 굴렸다. 아이들은 영문이 모르겠단 얼굴로 나를 바라봤고 채연이는 내 다리에 꼭 붙는다.
.
나는 충돌하는 이성과 본능 앞에 마음이 너무나 무거워 고개를 떨어뜨렸다. 고개를 떨어뜨리자 채연이가 내 다리에 딱 붙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힘든 상황에서도 채연이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 히 웃어 보인다. 그저 나와 같이 있다는 게 즐거운 모양이었다.
뒤를 돌아보자 여자아이는 아이들을 달래고 있었고 아이들은 서로를 의존하며 모여 있었다. 추운 날씨에 피부를 비비고 서로를 위로했다. 이제 초등학생이 될법한 아이가 자기보다 더 작은 아이를 끌어안고 조심히 달래고 있었다.
그 아이들을 보자 무언가 정의할 수 없는 감정들이 새어나왔다. 그 감정은 내 본능을 천천히 채찍질하며 다그치고 있었다. 스스로가 굉장히 한심하다 느껴진다. 총에서 손을 때자 손 안에 흥건한 땀이 새어나온다.
그 땀을 바지에 닦으며 난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천천히 바닥에 쪼그려 앉아 채연이와 눈을 마주쳤다.
'채연아, 여기에 올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이 있어. 그리고 내가 채연이를 구해야 한다고…… 알려준 사람도 있고. ‘
난 설득을 하려 했지만 채연이는 내 말을 듣자마자 내 품에 얼굴을 묻고 꼭 끌어안았다.
따뜻한 온기가 내 몸에 전해진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올려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는 그 작은 온기를 서로와 나눴다. 반가움, 기쁨, 슬픔, 그리움을 남기고 채연이는 천천히 내 몸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다부진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왜 가만히 있어요? 가요!
채연이는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다른 말을 더 하지 않았음에도 채연이는 내게 다녀와도 좋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저 멀리서 우리 눈치를 보던 여자아이가 천천히 이곳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채연이를 품속에 안으며 나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이 길이 있는지도 몰라요. 저기 도랑에 숨어 있으면 우리를 발견 못 할 테니까……. 그러니까…….'
여자아이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한참을 우물쭈물 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채연이는 조심스럽게 나에게 약지손가락을 내밀었다.
나는 멍하니 내 앞에 내밀어진 약지 손가락을 바라봤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약지 손가락을 올려 꼭 잡았다. 나도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손가락 사이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져 내 몸에 천천히 퍼진다. 우리는 서로에게 온기가 가득한 자물쇠를 걸었다.
다시는 떨어지지 말자는 맹세.
'다녀올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채연이는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그리고 분명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응!'
채연이가 말을 하자 여자아이는 깜짝 놀란 눈으로 채연이를 내려다봤다. 나도 오랜만에 들어보는 채연이의 음성에 살짝 놀라면서도 긴장감이 사르르 풀리는걸 느꼈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여자아이는 아이들과 채연이를 이끌고 옆쪽에 도랑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곳에 아이들을 숨긴다. 그림자와 어둠 때문에 그곳에 도랑이 있는지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작게 안심하고 마지막으로 도랑에 들어가는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친다.
'걱정하지 마세요.'
여자아이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자아이가 사라지고 길은 침묵에 휩싸인다. 나는 총을 잡고 탄창 집을 빼낸다. 그리고 총알을 확인하고 다시 껴 넣는다.
노리쇠를 당기자 총알이 차갑게 노크한다. 그 싸늘한 소리에 나도 모르게 총을 꽉 부여잡는다. 여전히 총성은 들린다. 총성 중간마다 둔탁하게 들려오는 총소리는 노인이 쏘는 엽총이 분명했다.
나는 총구를 앞에다 조준하고 조심스럽게 법과대 건물로 뛰어간다. 식은땀이 흐르고 목은 연신 말라온다. 총성은 내 예민한 신경을 갉아먹고 공포를 끄집어낸다.
총구에서 나오는 반짝임과 화약 냄새 그리고 날카로운 총성이 들린다. 뛰어가는 내내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멍청한 놈! 그냥 가버리면 되는 거 아니야? 노인 쪽으로 시선이 쏠리니까 네가 더 도망가기 쉽잖아.
그래 너는 항상 바보 같은 선택만 하는구나. 넌 착각하고 있는 거야. 다시 단칸방으로 돌아가! 아, 아. 아! 연신 들려오는 속삭임에 나는 고함을 내뱉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절대 아니야!
법과대 건물 옆으로 뛰어가자 건물 옆쪽에서 연신 총을 발사하는 군인들이 보였다. 그들의 총구는 법과대 건물 정문을 향하고 있었다. 문으로 시선을 돌리자 노인이 힘겹게 엽총으로 응수하며 몸을 피하고 있었다.
콘크리트는 총알에 걸레짝이 되었고 총알은 더욱 매서워진다. 그러자 노인이 응수하는 횟수가 점점 줄어든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총을 들었다. 그리고 연신 총을 발사하는 군인들 머리를 조준간 사이에 넣었다. 손이 떨린다, 아니 몸이 떨린다. 그 떨림에 조준간도 사정없이 떨린다.
이제는 도망가기 싫어 이제는 피해가고 싶지 않아. 항상 도망치면서 살았어! 그 좁은 방안에서 나 혼자 도망치면서 살았어.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방아쇠를 당겨 겁쟁아! 다시는 잃지 않는 거야
눈을 꼭 감고 뜨자 숨이 턱 하고 막힌다. 이제 조준간은 흔들리지 않았다. 난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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