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우리는 해가 지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든 바리케이드에 보초가 있는 건 아니었다. 정문에서 떨어진 곳으로 향하자 한적하고 낮은 언덕들이 있었다. 역시나 그쪽도 버스나 나무들로 꼼꼼하게 막아 뒀지만, 항시 보초를 세울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허술해도 되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장시간 지켜본 결과 간혹 순찰하는 군인들을 제외하고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노인과 함께 바닥에 바짝 엎드려서 해가 완전히 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군인이 순찰을 다니는 시간 간격을 가늠해 보았고, 대략 30~40분이라는 긴 시간이었다.
해가 완전히 지고, 마지막 순찰자가 버스 근처를 지나가자 노인은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버스를 향해 걸어갔다. 나도 그 뒤를 긴장감 가득한 얼굴로 따라갔다.
노인은 처음에는 버스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나도 허술한 경계 때문에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나왔다. 역시 막혀 있는 모양이었다.
노인은 고민을 하는지 잠시 눈을 굴린다. 그리고 잠시 뒤 언덕에서 돌 하나를 가져오더니 나에게 천을 요구했다. 나는 챙겨온 천들이 있기에 가방에서 천을 꺼내 노인에게 내밀었다. 노인은 천을 받아들고 돌을 감싸더니 들어 올린다.
그리고 노인은 천으로 감싼 돌로 버스 창문 가장자리를 강하게 가격한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유리창은 금이 갔고, 한 번 더 가격하자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졌다. 꽤 큰 소음에 깜짝 놀랐지만, 아직 순찰자가 듣기에는 먼 거리인 듯 다른 반응은 없었다.
이제부터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나는 노인이 유리창을 깨자마자 빠르게 버스 옆으로 다가가 노인이 내 어깨를 밟고 올라갈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았다. 노인은 내 어깨를 밟고 단숨에 올라갔고, 버스 안에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난 발등에 느껴지는 고통을 꾹 참으며 길게 점프해서 노인 손을 잡은 뒤, 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버스 내부는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옅게 쌓여 있는 먼지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발자국을 남기며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창문을 통해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잠시 숨을 골랐다. 노인은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생각보다 경계가 느슨해. 하지만 순찰자가 여기를 지나가면 흔적을 발견하게 될 거야. 30분 내로 해결을 보고 오게.’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이내 천천히 일어나 반대쪽 버스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노인은 단숨에 유리창을 넘어 바닥에 착지하고 발이 아픈 나를 위해 어깨를 빌려준다. 난 그 어깨를 밟고 빠르게 바닥으로 내려왔다.
우리는 한곳에 세워진 신서울대학교 내부지도로 천천히 걸어갔다. 노인은 손가락으로 지금 위치를 그으며 나에게 말했다.
‘법과대 건물은 여기서 상당히 가까워. 하지만 문제는 수의과 건물은 이곳에서 반대쪽 끝이야.’
노인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충분한 경고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제가 늦으면 먼저 가세요.’
노인은 대답하지 않고 옅은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한쪽으로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멀어지는 노인을 보고 다시 내부지도를 확인했다. 그리고 방향을 잡고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잠시 노인과 떨어져 다시 혼자가 될 시간이다.
차가운 칼바람에 귀 부분의 상처가 짜릿하게 아려온다. 사실 어제부터 볼 옆까지 감각이 사라졌다. 간혹 바늘로 콕콕 찌르는 고통이나 쥐가 걸린 듯 찌릿하게 아려올 뿐 그것들이 지나면 통각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붕대를 풀어 상처를 열어볼 엄두조차 안 난다. 악화하고 있는 게 뻔했지만 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 상황에선 이것조차 어리광으로 보였으니까. 일부로 길이 아닌 곳을 골라 뛰었다. 최대한 나무나 건물 그림자에 숨어서 이동했다. 그림자가 날 숨겨줄 것이다.
학교 내부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대학 내부의 거리도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이들도 밤에는 그놈들이 민감해진다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나에게는 희소식이었다. 나는 안심하며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건물들 창문은 다 무언가로 가렸는지 빛 하나 새어 나오지 않았다. 간혹 보이는 순찰자들은 나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놈들을 피해 가는 것에 이골이 났는데, 사람이라고 어렵겠는가? 나는 어둠 속에 숨어 순찰자들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혹은 어둠 속에서 그들도 모르게 지나갔다.
정면의 길은 차가 다니는 큰길이었다. 이 큰길을 걷다가 종합체육관으로 빠졌고, 체육관 앞에 나오는 것이 수의과 건물이었다. 난 그곳에 도착하기 위해서 잔뜩 예민해진 감각으로 조심스럽게 걷다가 검문소 하나를 발견했다.
원래 내부로 진입하는 차들을 확인하는 검문소였지만, 지금은 이놈들의 놀이터로 변했는지 사람들이 옹기종기 작은 모닥불 앞에 모여 있었다. 간혹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순찰을 하였던 군인들이 검문소로 돌아오고, 또 검문소에서 순찰을 나가는 군인들이 보였다.
나는 그 작은 불빛에도 내 모습이 들킬까 봐 잔뜩 경계하며 걸었다. 길옆의 나무들에 찰싹 붙어 필사적으로 어둠 속에 모습을 숨긴다. 심장이 빠르게 뛰지만 내 걸음걸이는 조용하고, 은밀했다. 그곳을 지나자 오른쪽에 큰 운동장이 보였고, 운동장은 그 쓰임새를 진작 잃었는지 무언가가 잔뜩 쌓여 있었다.
턱을 타고 땀이 주르륵 흐른다. 잠시 앉아 거친 숨을 내쉬었다. 노인은 잘 도착했을까? 혹시 채연이는 다른 곳으로 끌려가지 않았을까? 괜한 상념에 빠지자 나는 애써 고개를 흔들어 떨쳐낸다. 지금은 생각할 때가 아니다.
운동장이 보이는 길을 지나가자 이제야 대학 내부 깊숙한 곳으로 들어왔는지 많은 건물들이 보였다. 가끔 들려오는 소리나 비명. 그리고 웃음소리가 귓속에 아른거린다. 하지만 그 비명과 웃음소리도 이 깊은 어둠 속에 묻혀 천천히 흩어진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나는 어디쯤 도착한 거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갈림길에 들어섰다. 대각 방향으로는 테니스장이 보이고 갈림길 왼쪽으론 큰 건물이 보인다. 난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번쩍 뜬다.
종합체육관!
드디어 도착했다. 저기 체육관 앞 건물이 내가 찾던 수의과 건물이다.
채연아 기다려, 채연아 조금만 기다려. 나는 입속으로 끊임없이 읊조리며, 총을 부여잡고 뛰었다. 무거운 가방이 달랑달랑 흔들려 내 몸을 붙잡고, 피곤과 고통이 바람처럼 불어와 내 앞길을 막는다. 하지만 나는 발을 박차고 뛰고 또 뛰었다.
하지만 이내 숨을 흡 삼키고 들려오는 소리에 본능처럼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빠르게 체육관 건물의 그림자로 숨어들었다. 그러자 체육관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작은 빛이 새어 나왔다. 나는 숨을 흡 들이키고 자세를 더욱 낮췄다.
사람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흥에 겨운 듯 노래를 흥얼흥얼하는 소리. 이내 터벅터벅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내 시야에 사람 하나가 들어왔다. 군인이 아닌 사복을 입고 있었고, 술에 취했는지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화단을 향해 걸어오는 남자.
나는 마치 그림자라도 된 듯 벽 옆에 찰싹 붙어서 그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남자가 내 옆을 지나가자 지독한 술 냄새와 구린내가 풍겨왔다. 그 남자는 무엇이 그렇게 흥에 겨운지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화단으로 다가갔고, 이내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내갈기기 시작했다.
나는 거칠게 뛰는 심장을 애써 잡으며 속으로 읊조렸다. 나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자. 그렇게 한참을 숨을 참고 기다리고 있는데, 순간 치익 거리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한쪽 주머니에서 사람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조장님 어디십니까?’
치익.
남자는 거 하게 트림을 하고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자기 한쪽 주머니에서 무전기로 보이는 그것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술기운 가득한 소리로 대답한다.
‘오줌 싼다. 새끼야 왜~?’
무전기는 칙 소리와 함께 잡음이 울려왔다. 그리고 아까 그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로운 물건 없냐고 하는데요?’
그러자 남자는 욕을 읊조리며 바닥에 가래침을 뱉었다. 그리고 좀 커진 언성으로 대답했다.
‘그 시발새끼들은 그냥 좀 있는 거 쓰면 죽냐?’
그러자 무전기는 대답이 없었다. 아마 상대 쪽이 이 남성보다 낮은 직급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내 무전기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어린애는 없냐고 묻길래…….’
그 대답을 들은 남성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욕을 내뱉으며 무전기를 들고 말했다.
‘이번에 잡은 년들 데려가.’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무전기를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콧노래를 부르며 배뇨에 집중한다. 나는 조심스럽게 착검한 대검을 빼낸다. 그리고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대검 손잡이를 부실 듯 잡았다. 그 떨림은 두려움과 공포가 아닌 분노와 역겨움이었다.
죄를 저질렀다고 내가 그 사람을 죽일 권리는 없었다. 난 판사도 집행자도 아니다. 나를 지나치는 악인은 내 버려두고, 내 것을 헤치는 선인은 죽인다. 나만큼 비겁하고, 이기적인 사람도 없었다. 그렇기에 여태까지 사람을 죽여도 이렇게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런데도 사명감을 느꼈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눈부신 사명감이 아닌, 너무나 칙칙하고 더러운 시궁창 같은 사명감. 청소부가 쓰레기를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나 또한 이 남자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남자가 하는 말을 들었을 때, 순간 채연이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티 없이 맑은 웃음을 내보이는 얼굴. 세상이 이렇게 더러워도 그 아이만큼은 맑고 순수했다. 아마 이 세상 모든 아이가 그럴 것이다.
그런 흰 도화지를 더럽히는 것에 이 남자는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너무나 당연하게. 그리고 귀찮다는 듯 순순히 허락했다. 이 남자의 말 한마디가 너무나 역겨웠다. 그리고 남자가 말한 어린아이는 채연이가 됐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손이 미친 듯이 떨려왔다.
난 덜덜 떨리는 손으로 대검을 치켜들었다.
소리가 들려서는 안 된다. 난 재빠르게 뒤로 다가가 남자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읍!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발버둥 친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검을 움켜잡아 그 남자 목에 찔러 넣었다.
날카로운 대검은 단숨에 살을 찢고, 혈관을 관통해 파고든다. 남자가 발버둥 치는 게 느껴지자 나는 다시 칼을 빼내고, 다시 한 번 찔러 넣는다. 피가 분수처럼 터진다. 그 피는 화단에 튀기고, 내 손을 피범벅으로 만든다.
그리고 내 얼굴에 튀기자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남자는 고통스러운지 막힌 입으로 연신 읍읍 소리를 냈다. 그리고 내 손을 부여잡고, 다리로 바닥을 박차며 저항하려 애쓴다. 칼을 다시 한 번 빼내자 피가 분수처럼 튀어 허공을 수놓는다.
남자는 본능처럼 자기 목을 손으로 감싸더니 이내 천천히 허물어지듯 넘어진다. 남자는 기관지가 찢겼는지 헛된 숨만을 연신 헐떡이며 나를 바라본다. 남자의 눈이 흐릿해진다. 주마등을 보는지 작은 눈망울을 핏속에 떨어뜨린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가방에서 천을 꺼내 내 손을 닦았다. 그리고 피가 묻은 내 얼굴을 닦았다. 마지막으로 대검을 닦을 때, 나는 그 자리에서 구토했다. 나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소매로 연신 비비고 벽에 몸을 기댔다.
내 마음속 무언가가 부서지는 기분이 들었다. 손에서 느껴졌던 체온과 심장 박동은 착검으로 사람을 찔렀을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남자의 체온이 식어갈 때, 나도 스스로가 천천히 식어 감을 느꼈다.
어리광부릴 시간이 없다. 난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했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몸을 세웠다. 혹시 채연이와 만나면 아이가 놀랄까 봐 천으로 정신없이 남은 핏자국들을 지웠다. 닦아도, 닦아도 묻어 나오는 피는 내 몸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핏자국들을 멍하니 바라보다 따끔거리는 상처에 정신이 들어 다시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정면에 보이는 수의과 건물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시간이 촉박하다, 몸을 빨리 움직여야 한다.
멍한 정신과 빨리 움직이자는 육체가 서로 충돌해 몸을 잡아 끌어내린다. 그런 저항감에도 난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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