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28화 (28/313)

[28]

사람 말소리가 들렸다. 잔뜩 예민해진 감각이 반쯤 잠든 정신을 깨운다. 나는 황급하게 눈을 비비고, 바닥에 놓아둔 총을 잡았다. 그리고 눈을 껌뻑이며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신문지 사이로 빛이 들어오는 게 해가 뜬 모양이었다.

앞을 바라보자 노인도 나처럼 소리를 들었는지 눈을 날카롭게 뜨고, 엽총을 잡고 있었다. 노인과 나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말도 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반쯤 일으켜 신문지를 살짝 옆으로 치우고 밖을 살펴봤다.

곧이어 소리의 주범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노인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이자 노인은 엽총을 꽉 부여잡고 이쪽으로 기어와서 내 옆에 붙어 밖을 살펴봤다. 이곳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인도에서 사람으로 보이는 이들 3명이 서 있었다.

난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 복장을 살피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그들이 입은 옷이 무엇인지 알아냈고, 이내 심장이 빠르게 뜀을 느꼈다. 하얀색 의사 가운을 입은 남성과 같은 복장의 여자 한 명. 그리고 총을 들고 있는 군복의 남자. 쉼터에 찾아 왔던 그들이랑 복장이 같았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저 의사가운을 입은 여자는 기억에 남는 얼굴이다. 분명히 그 쉼터에 군인들과 찾아왔었던 여자다. 내가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총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이를 꽉 물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시야가 좁아진다. 무언가 속에서 끓어올라 오는데 그걸 어찌할지 몰라서 자신을 주체하지 못했다.

나는 이렇게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 그들은 아무렇지 않다. 군인은 담배를 물며 시시덕 웃고 있었고, 의사 가운을 입은 남성은 계속 여자에게 말을 걸며 치근거리고 있었다. 마치 이 창문을 벽 삼아서 일상과 비극이 나눠진 기분이었다.

비극의 주민인 나는 일상의 주민 앞에 증오와 분노를 느낀다. 채연이를 뺏어간 그놈들이 웃고 있을 때, 난 피눈물을 흘린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노리쇠를 당겼다. 마치 나는 준비 되었다고, 저들을 모두 죽여 버리자고 속삭이는 소리가 귀를 울려왔다. 총알이 새기는 차가운 노크 음. 마치 악마처럼 달콤하게 나를 끌어당긴다.

‘진정해.’

나를 막은 건 역시나 노인이었다. 내 어깨를 붙잡고 그놈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상태에서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자 노인은 다 이해한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나도 자네랑 같은 생각이야. 하지만 확실하게 해야지.’

노인은 그렇게 읊조리고 서늘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리고 뒤를 가리키며 나에게 중얼거렸다.

‘저들이 이동할 때를 기다려.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할 거야.’

그리고 그는 반대쪽 문으로 기어가 소리가 들리지 않게 조심히 차 문을 열고 바닥에 엎드렸다. 나도 노인을 따라 천천히 기어 노인을 따라 옆쪽에 엎드렸다.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노인은 그들이 향하려고 생각되는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차 밑에 숨어 있어. 그리고 저번처럼 종아리를 찔러 버리는 거야. 군인이 가장 먼저고. 절대 총은 쏘지 마.’

노인은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총을 품에 안고 소리가 들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기어갔다. 그들이 뱉어내는 웃음소리가 귀를 울린다. 난 그 웃음소리에 이빨을 꽉 물었고, 조금 떨어진 차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차 밑에 기어들어 가자 정면에 인도가 보였다. 그리고 옆을 바라보자 저 멀리 나와 반대 방향에 있는 차 밑으로 들어가는 노인이 보였다. 노인은 나를 바라보며 자기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댄다. 나는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고르게 쉰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저놈들의 목에 대검을 꽂아 넣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당장 채연이를 내놓으라고, 총이라도 발사하고 싶었다. 하지만 난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기회를 위해 바퀴벌레처럼 엎드렸다. 인내, 그리고 또 인내. 나는 분노를 참고, 또 참았다.

그리고 대략 30분이 흘렀다. 추운 날씨에 굳어 버린 몸을 움직이고 싶었지만 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불어오는 칼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그리고 그들이 웃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난 손을 부들부들 떨며 인내했다.

그리고 드디어 웃음소리가 멈추고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인이 예상한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들을 정확하게 이곳을 지나갈 것이다. 드디어 때가 왔다! 나는 심장이 격하게 뜀을 느꼈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그 순간을 나는 정면으로 목도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뒷바퀴 너머로 그들의 발이 보인다. 군인이 선두. 그 뒤로 여자와 남자가 같이 걷고 있다. 나는 총검을 천천히 앞으로 내밀며 눈을 부릅뜬다.

세상이 이렇게 변하고, 나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무미건조했던 내 삶이 그놈들이 나타난 뒤로 모든 게 뒤집혔다. 물처럼 흐르던 삶은 격한 조류를 만나 뒤섞이기 시작했고, 이제는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운명이 내 삶에 피를 뿌린다.

니체는 이야기했다. 괴물과 싸우는 자.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난 어쩌면 괴물이 되어 버린 걸지도 모른다.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숨을 길게 후 내뱉는다. 군인의 다리가 정면에 보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대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나는 눈을 감지도, 외면하지도 않았다. 대검은 놈의 허벅지에 정확하게 박혔다. 얼마나 깊게 박았는지 칼날이 전부 들어갔다. 그리고 손끝에 무언가 딱딱한 걸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칼날이 대동맥을 건드렸는지 피가 내 얼굴에 강하게 튀겼다. 피는 좍 분수처럼 튀겨 바닥을 더럽혔고, 난 천천히 소매로 이마와 볼을 닦았다. 따뜻한 피가 주르륵 흘렀다. 군인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자신의 허벅지를 양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무너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상황파악이 힘든지 군인은 앓는 신음을 내며 고통을 호소했다. 그리고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헷갈리는지, 멍하니 피가 솟구치는 자신의 허벅지를 바라봤다. 그리고 쓰러진 상태에서 나와 눈이 마주쳤다.

고통과 두려움으로 물든 얼굴. 속에 꽁꽁 감추고 있던 분노가 폭발했다. 참고 있던 서러움과 증오. 그리고 놈을 향한 악의가 뒤섞여 쏟아진다. 나는 망설임 없이 차 밑에서 발을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군인을 덮치고 그 위에 올라탔다.

군인은 마치 악귀를 발견한 듯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난 망설임 없이 총을 부여잡고, 개머리판으로 군인 얼굴을 내려찍었다. 개머리판은 정확하게 군인의 턱에 박혀 튀어나오는 비명을 막는다.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개머리판을 타고 흐르는 감촉이 내 손을 짜르르 울린다.

난 한 번으로 끝내지 않았다. 군인이 움직임을 멈추기 전까지 일방적인 폭력을 멈추지 않았다. 곧이어 마지막으로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군인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난 그 광경을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난 거친 숨을 내쉬며 옆을 바라봤다. 여자는 다리가 풀린 듯 자리에 주저앉아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패닉 상태가 왔는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떨리는 몸과 눈물 고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줌 남아 있던 동정이 가신다. 네가 눈물을 흘릴 동안 난 피눈물을 삼켰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친 발에 고통이 느껴졌지만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은 죄책감과 분노에 그 고통 또 한 사그라진다.

히익 하는 비명과 함께 여자와 같이 있던 남성이 빠르게 도망간다. 그리고 남자가 반대쪽으로 도망가는 순간 차 밑에서 무언가 뾰족한 게 나오더니 남자는 이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그리고 자기 발목에 꽂혀 있는 쇠꼬챙이를 보며 비명을 지르려다가 노인이 내지르는 주먹에 입이 막힌다. 노인은 마치 한을 풀어내듯 남성 얼굴에 주먹을 연신 박아 넣었다. 격하게 떨리는 어깨와 여기까지 느껴지는 거친 숨은 노인이 굉장히 분노하고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있었다.

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총을 들었다. 그리고 대검에 묻어 있는 피를 소매로 닦아 냈다. 그리고 여자를 바라봤다.

여자는 오줌을 지렸는지 노란 웅덩이 위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몸으로 나를 바라본다.

‘데려갔던 아이랑 여자.’

난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고함을 지르지 않았음에도 잔뜩 갈라지고 쉰 목소리가 그 괴물 놈들이 내뱉는 괴음하고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싸늘한 칼바람이 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나는 멍하니 내 손을 내려다보며 실소했다. 그리고 이빨을 악물고 말을 씹어내듯 내뱉었다.

‘말해, 어디 있는지.’

* * *

‘전……. 전 몰라요…….’

여자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나에게서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주저앉은 상태에서 열심히 뒷걸음질 쳤다. 두려움과 공포로 가득한 얼굴은 내 기분을 더 더럽게 만들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허벅지를 관통하는 감촉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 때문일까? 총을 잡은 손은 아직도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소매로 볼에 묻은 피를 닦아 낸다. 비릿한 피비린내가 코끝을 알싸하게 자극한다.

‘당연히 모른다고 말하겠지.’

옆을 바라보자 어느새 이쪽으로 다가온 노인이 차가운 목소리로 여자에게 말했다. 노인이 피로 묻은 꼬챙이를 바닥에 땡그랑 던지자 여성의 눈이 사정없이 떨린다. 얼마나 많이 때렸는지 노인의 주먹은 상처투성이였고, 주먹에선 남자가 흘린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노인은 자기 옷에 피를 닦아 내며 다시 꼬챙이를 주워들었다. 노인이 상대했던 남자 쪽을 바라보자 온몸이 피떡이 되어 옅게 경련하고 있었다.

‘죽였습니까?’

나는 작게 물었다.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쇠꼬챙이를 들고 천천히 여자에게 접근하며 읊조리듯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죽일지도 몰라.’

여자는 작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려 발버둥 쳤다. 난 그 모습을 담담하게 바라봤다. 채연이를 구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그리고 노인도 나와 똑같은 생각일 것이다. 아마 노인이 하지 않았다면 내가 했을 것이다.

난 저 여자 입에서 빨리 우리가 원하는 정보가 나오길 빌었다. 노인은 도망가려는 여성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그리고 꼬챙이를 눈앞에 내밀며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말해, 데려간 애들은 다 어디 있어?’

꼬챙이에 묻은 살점과 피를 보며 여자의 눈은 사정없이 떨렸다.

‘잘못이 없어요……. 전 잘못이 없어요…….’

여자는 마치 트라우마가 걸린 듯 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노인은 인상을 찡그렸고, 이내 표정은 악귀 같은 분노로 물들었다. 그리고 노인은 거침없이 손을 들어 꼬챙이 손잡이로 여자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여자가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울렸다. 노인은 평소 그답지 않게 격하게 흥분해 있었다.

‘잘못이 없다고? 그런데 그 착한 애한테 왜 그랬어? 아무것도 모르는 애한테 왜 그랬냐고! 너희들이 뭔데! 뭔데!! 뭔데!!!!’

여자의 머리는 피로 물들었고, 나는 빠르게 뛰어가 노인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천을 꺼내 여자의 입속에 쑤셔 박았다. 죽이면 곤란했다, 그리고 더는 큰 소리가 들려도 곤란했다. 어찌나 힘이 센지 팔을 잡았음에도 난 노인에게 끌려가듯 매달렸다. 하지만 이내 노인도 힘이 빠지는 듯 나랑 같이 바닥에 넘어졌다.

나는 빠르게 노인 손에서 꼬챙이를 뺏었다. 노인은 애처럼 처절하게 울고 있었다. 철벽같던 얼굴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냉철한 눈매는 슬픔의 눈물 속에 잠겼다. 노인은 꺼이꺼이 울면서 그렇게 애절한 한을 내뱉고 있었다.

고통스러웠으리라.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그 속에 숨겨진 고통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난 입술을 꽉 깨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노인에게 뺏어 든 꼬챙이를 꽉 부여잡고 여자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입안에 천을 빼내며 여자의 몸을 꽉 잡았다.

‘살려 주세요……. 제발…….’

여자는 천이 입에서 빠지자마자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목숨을 구걸했다. 나는 다른 말도, 애꿎은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냥 쉬고 비틀어진 목소리로 단 한 가지만을 그녀에게 요구했다. 그리고 꼬챙이를 들어 올리며 내 각오를 되새겼다.

‘마지막 기회야. 잡아간 아이들이랑 여자들은 다 어디에 있는지 말해.’

그리고 꼬챙이를 여자 턱 아래쪽으로 가져다 댄다. 연약한 피부 위에 꼬챙이가 올라가자 피가 작은 실선처럼 또르르 흘렀다. 여자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격하게 떨리는 눈과 몸으로 연신 살려 달라 빌었다.

그리고 내가 다시 대답하라고 고함을 지르자 이내 손을 싹 싹 빌면서 눈물을 흘렸다.

‘여자들은 다 법과대 건물에 갇혀 있어요……. 그리고 애들은…….’

여자는 대답을 망설이고 있었다. 눈은 떨리며 연신 내 눈치를 보고 있었고, 난 무언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기에 불안감이 들었고, 그 순간 욱하고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대답해!’

나는 잔뜩 쉬어 나오지 않은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내 여자를 협박했다. 여자는 달달 떨리는 손을 연신 비비며 말했다.

‘애들은……. 애들은 일을 시켜요……. 몸이 작아서 괴물들이 잘 못 보니까 밖으로…….’

나는 듣자마자 여자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무슨 일을 시키는지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찰나의 순간, 나는 놈들이 행한 모든 것에 격렬한 분노를 느꼈다. 인간은 괴물들 사이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기를 선택했다.

약자를 잡아먹고, 이용하는 원초적인 시대. 나는 본능처럼 여자 목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힘을 가하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죽이고 싶었다. 순수한 살의. 극단적인 적의. 난 처음으로 그런 감정을 느꼈다.

여자의 표정은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하고, 거친 숨을 내뱉으며 연약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이내 얼굴이 붉어지고, 눈동자는 흰자를 내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를 얼마나 꽉 물었는지 입안에서 까득 하는 살벌한 소리가 울렸다.

그 순간 내 몸을 잡고 끌어당기는 완력에 나는 여자의 목에서 손을 놓고야 말았다.

‘후회할 짓 하지 마.’

나를 또다시 막은 건 노인이었다. 어느새 얼굴에 울음기는 사라지고, 평소의 잔뜩 굳고 냉철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내 어깨를 말없이 토닥이며 나를 바라봤다. 난 거침 숨을 내쉬면서도 멍하니 노인의 얼굴을 바라봤다.

깊은 눈이었다. 그 눈을 마주하자 난 힘이 쭉 빠져 손을 놓았다. 노인은 천천히 일어나더니 엽총을 잡고, 여자에게 겨눴다. 여자는 목을 잡고 캑캑 숨을 내뱉다가 노인이 총을 겨누자 잔뜩 겁먹고 당황한 얼굴로 애절하게 말했다.

‘다 말했어요……. 살려 주세요.’

노인은 아무 말 없이 여자를 겨누다가 이내 마지막으로 묻겠다고 말했다.

‘애들이 있는 정확한 위치를 말해.’

여자는 자신에게 겨눠진 총구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며, 황급하게 말했다.

‘남자애들은……. 남자애들은 도시로 내보내고, 여자애들은 산에서 땔감을 가져오게 해요……. 수의과 건물 뒤편에 산으로 가면 있어요…….’

난 속으로 격렬한 안도가 섞인 숨을 내뱉었다. 적어도 도시로 나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잔뜩 굳은 얼굴로 다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와 발은 격한 움직임에 아프다고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난 고통을 부여잡고, 입을 꽉 다물었다. 그리고 노인을 보며 말했다.

‘죽일 겁니까?’

내 말에 여자는 발작하듯 비명을 지르며 애원했다. 그러자 노인은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흔들었고, 엽총으로 서울대 반대 방향을 가리키며 여자에게 말했다.

‘꺼져.’

여자는 그 말을 듣자마자 왈칵 눈물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떨리는 눈으로 나와 노인의 눈치를 보더니 황급하게 반대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쩌면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 우리를 저놈들에게 보고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노인이 결정한 판단을 거부하지 않았다. 노인이 없었다면 난 정문에서 저들과 같은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신발도 신지 못하고 최대한 우리랑 멀어지려 뛰어가는 여자를 보며, 난 죽은 군인이 가지고 있던 총을 챙기고 부속품들을 뒤졌다.

발견한 탄창과 부속품들을 챙겼다. 노인에게 쓰라고 총을 내밀었지만,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엽총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해가 지면 움직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하늘을 바라봤다. 여태까지 어둠은 우리의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우리들을 도와줄 것이다. 아직도 해는 중천이다. 노인과 구체적인 계획을 짜고, 식사를 하기 위해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에게 당한 군인은 죽어 있었다. 그리고 노인이 상대한 남자도 숨을 거뒀다. 우리는 너무나 담담하게 시체를 끌어다가 숨겼다. 그리고 핏자국은 흙으로 지우고,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나와 노인은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길가를 걸었다. 그리고 우리가 밤을 지새우던 차로 들어가 다시 문을 잠갔다. 둘 다 한참을 아무 말이 없이 있다가 노인이 입을 열었다.

‘나는 법과대 건물로 가겠네. 아마 그곳에 손녀가 있을 거야. 자네는 수의과 건물로 향하게. 그리고 다시 만나자고.’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노인과 나는 이런 대화를 했다.

‘안 죽인 거 후회 안 하십니까?’

‘누구를?’

‘여자요.’

‘도망간 방향에 뭐가 있었는지 잊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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