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죽은 걸 보는 건 처음이야.’
노인은 그답지 않게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떨리는 손으로 그놈 눈에 박힌 대검을 빼낸다. 대검을 뽑을 때 딸려온 그놈의 머리가 힘없이 보닛 위에 떨어진다. 노인은 어두운 낯빛으로 천천히 시체에 접근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사람이었나? 옷이 아주 낡았어.’
빠르고 정확한 관찰능력이었다. 내가 그날 느꼈던 의문을 노인도 빠르게 알아챈 모양이었다. 노인은 그놈 시체를 들어 올려 이곳저곳을 꼼꼼하게 살펴보더니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도 알고 있었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하나하나 다 설명해 줄 시간이 없었다. 난 가방을 고쳐 매고, 그놈 옷에 검은색 피가 묻은 대검을 닦았다. 그리고 노인에게 대답했다.
‘나중에 설명해 드릴게요. 일단 여기서 벗어나요.’
노인도 내 말에 동의하는지 천천히 일어나 엽총을 앞으로 잡았다. 그리고 개머리판에 묻어 있는 피를 그놈 옷에 닦아 내고,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노인을 잠시 바라보다 이내 차로 가득한 거리로 시선을 돌렸다.
이곳으로 접근하는 그놈들은 없었지만, 차로 빼곡한 도로는 간격이 몹시 좁았다. 그렇기에 걸어서 지나가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나는 막막함이 느껴져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차 밑으로 가야겠어요.’
그러자 노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총을 뒤로 메고 다시 엎드렸다. 그리고 차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노인도 몸을 납작 엎드리고 나를 따라 차 밑으로 들어갔다. 이제부턴 앞으로 나아갈 일만 남았다. 난 마음을 굳게 먹고 열심히 팔다리를 움직였다.
기는 행위는 빠르게 체력을 소모한다. 내가 옆으로 끌고 있는 무거운 가방은 내 팔 근육을 혹사하며, 들고 있는 총은 거치적거려 전진을 방해한다. 추운 날씨와 축축한 바닥은 조금만 기어도 체온을 낮춘다. 벌써 허벅지 근육이 땅겨오고, 바닥에 쓸리는 피부가 따갑다.
한참을 기다가 멈추고 또 기다가 멈추기를 반복한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을 발로 치우고 다시 전진. 간혹 심하게 밟혀서 찌그러진 차들이 보이는데 그런 차가 보일 때마다 노인에게 수신호를 보냈고,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옆쪽 차로 이동해 지나쳐갔다.
가는 길에 그놈들이 더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하지만 아까도 그랬듯 간혹 차 사이에 끼어서 가만히 있는 그놈들이 있었다. 중간에 포기를 한 건지 혹은 가만히 포기하고 있기를 선택한 건지, 간혹 보여 주는 변덕스러운 행동은 의문을 품게 했지만 이내 헛된 생각이라 치부하고 머리에서 지웠다.
가만히 서 있는 그런 놈들은 요령껏 피해 준다.
3시간쯤 기었을까? 눈앞에 회색의 맨발 하나가 보였다. 또 같은 놈을 발견했다는 생각에 노인에게 신호를 보내고, 거친 숨을 삼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옆으로 빠지려고 했지만, 우리 옆쪽에는 빈 곳이 존재하지 않았다.
직면하지 말았으면 하는 상황이 다가왔다. 노인도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천천히 기어와 내 귀에 속삭인다.
‘옆쪽 차는 바퀴가 다 빠졌어.’
노인은 낮고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차는 바퀴가 빠져 지붕과 본체가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다음 차로 넘어가려는 정면에는 그놈이 하나 있었고, 옆으로는 이동이 불가능하다. 사면초가, 최악의 상황이다.
앞으로 갈 길은 지금 그놈이 있는 이 길밖에 없다. 난 손톱을 물어뜯었다. 이 차선 도로에 양쪽은 아주 높은 소음 방지용 벽들이 쳐져 있다. 말 그대로 차 위와 차 아래가 아니면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것이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극한 스트레스가 시야를 천천히 좁힌다. 결국, 이놈을 죽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둘 다 이곳에서 죽는 것이다. 빨리 이 길을 벗어나야 한다. 난 노인을 바라보며 조용히 귀에 속삭였다.
‘죽여야 합니다.’
노인은 혹시나 그놈이 듣기라도 할까 봐 걱정되었는지 대답 없이 고개만을 끄덕였다.
난 그런 노인을 데리고 뒤의 차로 다시 기어갔다. 그리고 그놈이 들리지 않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정면 승부로는 그놈을 이기지 못한다. 하지만 여태 봤듯이 그놈들은 생각보다 단순한 공격패턴을 보여 줬고, 시야도 좁았다.
아까처럼 한 명이 시선을 끌면, 다른 한 명이 치명타를 주고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
총을 쏘는 건 자살행위와 같았고, 소음이 생기지 않는 개머리판이나 대검을 써야 했다. 난 차 밑에서 그놈 시선을 끌겠다고 노인에게 말했다. 그러면 노인은 뒤쪽 트렁크로 올라가 시선이 나에게로 향한 그놈을 처리하면 되는 것이다.
노인은 쉽게 동의했다. 단순했지만 이 방법 말고는 생각나는 것도 없었다. 서로를 보며 고개를 굳게 끄덕였고, 나는 다시 앞차로. 그리고 노인은 조심히 굴러 차 밖으로 나갔다. 정해진 신호는 없었고, 그놈의 시선이 내게로 끌리면 공격하라고 말했다.
난 입을 꾹 다물고 눈앞에 회색 발을 바라봤다. 핏기 한 점 없는 피부는 마치 시체 같았고, 여전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괴음은 내 정신을 괴롭혔다.
뒤를 바라보자 노인이 좁은 차 사이에서 몸을 숙이고 한쪽 발을 트렁크에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엽총을 방망이처럼 굳게 잡고 금방이라도 뛰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심호흡했다. 단 한 순간 실수가 죽음으로 이어진다. 뇌는 그런 생각에 자동으로 반응하는지 짙은 아드레날린을 분비시켰고, 난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느끼며 좁아지는 시야에 집중한다.
그리고 총을 꽉 잡고, 대검을 앞으로 내밀어 그놈 종아리를 향해 강하게 질렀다.
정확하게 조준한 대검은 그놈 종아리를 파고 들어갔다. 마치 두부를 가르는 감촉에 나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찌른 총을 반 바퀴 굴려 대검이 장딴지 내부를 휘젓게 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이었고, 그놈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빠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지 마치 덫에 걸린 초식 동물처럼 발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노인은 출발한 듯 차 위에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놈은 이내 분노로 물든 긴 괴음을 내뱉으며 갑자기 목을 바짝 엎드렸다. 시선이 나에게 쏠린 것이다.
그놈과 나는 눈이 마주쳤다. 그놈의 눈은 순간 붉게 변했다. 그리고 마치 스크림처럼 입을 쫙 벌리며 나에게 비명과 같은 고함을 질렀다. 초식 동물에게 물린 육식 동물의 분노. 그놈은 순식간에 차 밑으로 기어들어 왔다.
너무나 빠른 속도였다. 생각지도 못한 속도에 나를 깜짝 놀라 빼낸 대검을 다시 앞으로 내질렀다. 그놈은 마치 방어를 하듯 손으로 대검을 막았고, 대검은 그놈 손에 박혀 관통되었다. 그리고 그놈은 본능처럼 대검을 꽉 잡았고, 자기 쪽으로 강하게 당겼다.
강한 완력에 나는 끌려갔고, 결국 총을 놓았다. 그놈은 고통인지 분노인지 모를 괴음을 다시 내뱉으며 나에게 큰 입을 딱딱 벌리며 기어왔다. 저 차 앞에선 잔뜩 당황한 노인이 차 밑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의 잘못이 아니었다. 생각한 속도보다 훨씬 빠른 이놈이 변수였다. 몇 놈 죽여 봤다고 그놈을 우습게 본 게 패착이었다. 노인은 황급하게 차 밑으로 들어왔지만, 한정된 공간에서 개머리판을 휘두를 수 없었다.
그놈은 손톱으로 아스팔트를 긁으며 나에게 기어왔다. 나는 소름과 두려움에 재빠르게 누워 뒤로 기었다. 그리고 발로는 연신 그놈 얼굴을 걷어찼다. 그놈은 아프지도 않은지 연신 입을 나에게 벌리고 침을 흘리며 괴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손톱이 부러진 것도 모르는지 연신 바닥을 긁으며 나에게 접근했다.
무서운 악의였다. 나를 너무나 물어뜯고 싶은지 연신 이빨을 딱딱거리는 모습은 나를 더 필사적으로 도망가게 했다. 노인이 엽총을 그놈에게 겨누는 게 보였다. 난 반사적으로 외쳤다.
‘쏘지 마요!’
총을 쏘는 순간 여기서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양자택일 같은 상황에서 난 최대한 열심히 그놈 얼굴을 발로 찼다. 양쪽 타이어를 손으로 꽉 잡고 힘을 주어 발로 차니, 꽤 강한 힘이 실린 타격이 되어 그놈을 잠시 주춤하게 했다.
총을 겨누던 노인은 내 외침을 듣고 낭패 어린 얼굴을 해 보이다 이내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난 다급하게 외쳤다.
‘칼!’
노인에게 칼이 있든 없든 중요하지 않았다. 난 그저 이 좁은 공간에서 공격이 가능한 수단은 칼밖에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노인은 순식간에 차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더니 다시 차 위로 올라갔는지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난 그놈 얼굴을 연신 발로 밟으며 최대한 이쪽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도 그놈은 그 지독한 집착으로 조금씩 나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내 발이 그놈 손에 잡혔을 때였다. 내 발을 통째로 씹기라도 하려는지 입을 크게 벌리고 내 신발을 씹었다.
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노인은 다급하게 내 손을 잡았고 차 밑에서 빼내려고 하는지 강하게 당겼다. 하지만 그놈이 잡고 있는 내 발 때문에 나는 빠져나가지 못했고, 연신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나 차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다시 강하게 외쳤다.
‘칼!!!!!!’
그러자 노인은 다시 다급한 얼굴로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내 손에 쥐여 준다. 내 손에 무언가가 쥐어지자마자 그놈은 내가 방심하고 있는 걸 아는지 강하게 바닥을 기며 내 위로 올라왔다.
목덜미를 물려는지 정확하게 내 목으로 입을 벌리는 그놈을 보고, 난 반사적으로 손을 크게 휘둘렀다. 그리고 노인이 준 그것을 그놈 관자놀이에 찔러 넣었다. 그것은 너무나 쉽게 뼈를 부수고 뇌로 들어갔다.
그놈은 내 목덜미를 물려는 그 자세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고, 힘없이 내 몸 위로 떨어졌다. 난 그놈이 죽었음에도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 칼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몸이 굳어서 움직여지지 않는다.
정신없이 몸을 떨고 있는데, 노인이 나를 끌어낸 건지 시야가 뒤바뀐다. 난 차 밑에서 끌려 나왔고, 노인은 잔뜩 지친 얼굴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진정되지 않는 심장을 부여잡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황급하게 신발을 벗었다. 다행히 질긴 신발과 양말 때문에 이빨은 들어가지 못했는지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통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손에는 노인이 준 꼬챙이가 들려 있었고 더러운 오물이 묻어 있었다. 나는 한참을 그렇게 죽은 시체를 바라봤다.
기분이 묘했다. 벌써 두 번째였지만 절대 익숙해질 기분은 아니었다. 난 흥분과 격한 안도가 섞인 숨을 훅 내뱉으며 양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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