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사다리를 미끄러지듯 타고 내려왔다. 굉장히 급박한 순간이었다. 내가 내려오는 동시에 노인도 뒤따라 내려왔다. 노인이 들고 있는 총구 입구에선 작은 연기가 솔 솔 올라오고 있었다. 그때가 돼서야 나는 사람을 쐈다는 걸 실감했다. 알싸한 화약 냄새가 코끝을 타고 예민한 신경을 천천히 자극한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꽉 부여잡고 노인을 바라봤다. 노인은 빠르게 뛸 준비를 하는지 엽총과 가방을 어깨 뒤로 넘겼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자 내 뺨을 양손으로 강하게 쳤다. 짝하는 소리와 함께 뺨과 상처 난 귀에서 강한 고통이 몰려왔다.
나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고, 격한 고통에 정신은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난 노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총을 꽉 잡았다. 그리고 바닥을 박차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밤새 길을 지켜봤다. 머릿속에 휴게소와 주차장이 그려지고 내가 뛰어야 할 방향이 정해진다. 내가 뛰기 시작하자 노인도 나를 빠르게 뒤따라온다.
그와 동시에 옥상에선 여자들이 지르는 비명이 들린다. 그리고 무언가 둔탁한 게 박살 나고 깨지는 소리도 들렸다. 그놈들이 지르는 괴음이 날카롭게 내 고막을 찌르고 들어갔다.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난 가까스로 참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휴게소 건물 근처를 벗어나자 내가 지나왔던 주차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몰려오는 그놈들이 보인다. 어디서 그렇게 많이 몰려왔는지 빼곡한 차 위를 미친 듯이 뛰어가며 휴게소로 향하고 있었다.
넘어지고 떨어져도 서로를 밟고 넘으며,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맹목적인 적의와 미친 듯한 굶주림이 만든 괴물의 파도가 또 눈 앞에 펼쳐진다. 차 유리는 깨지고, 형태는 찌그러진다.
그려지는 지옥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몰려오는 공포가 내 바로 옆에서 터지기라도 한 듯 귀에선 짙은 이명이 들려온다. 공포가 내 몸을 잠식한다. 나는 허둥지둥 살길을 찾기 위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출구로 가야 한다. 출구로 가야 한다! 내 몸을 움직이는 건 오직 살고자 하는 본능이었다. 나는 끊임없이 나에게 되새기듯 중얼거렸다. 저 멀리 차로 빼곡한 출구가 보인다. 마치 나에게 오라고 손짓하듯 큰 간판에는 ‘출구’ 라 적혀 있었다.
나는 방향을 틀어 그곳으로 미친 듯이 뛰어갔다. 온몸에 소름이 쭈뼛 돋고, 뒷머리는 당겨온다. 눈은 뻑뻑하고, 숨이 막혀 연신 입안에 침이 흘러내린다. 다리는 힘이 풀린 건지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중요한 건 난 지금 뛰고 있다는 것이다.
출구가 적혀 있는 간판 밑에 도착했다. 뒤를 돌아보자 휴게소로 몰려온 그놈들로 빼곡했다. 저쪽에선 그놈들이 주차장 담을 넘어 휴게소로 향하고 있었고, 입구도 똑같은 상황이었다. 사방에서 그놈들이 몰려온다!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불길함이 내 머리를 가득 채우고, 공포가 내 피부를 사정없이 핥는다. 소리가 들린다, 그놈들의 소리가 들린다. 난 더듬더듬 허공에 손을 뻗으며 노인을 찾았다. 몇 번 허공에 헛손질을 하고 나서야 노인이 손에 잡혔다.
양해를 구할 시간도 없었다. 그동안 겪었던 경험들이 당장 숨으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난 노인의 옷을 꽉 잡고 차 밑으로 끌어넣었다. 그리고 나도 그 밑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밝던 시야는 한순간에 어두워진다. 공포 영화 같던 장면은 순식간에 차 밑으로 바뀌었다.
나는 거친 숨을 내뱉다가 이내 손으로 입을 꽉 막았다. 머리에선 빨리 쓴 날숨을 내뱉고, 달콤한 들숨을 삼키라 말한다. 하지만 생존본능은 그런 욕구를 집어삼켰다. 나는 입을 손으로 꽉 막고 떨리는 시야로 노인을 바라봤다.
노인도 나를 따라 입을 꾹 다물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얼굴을 바닥으로 향하게 한다. 그리고 들려왔다. 저 멀리서 그놈들이 만드는 파도의 소리가. 차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차 지붕을 사정없이 밟고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려온다.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바닥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놈들이 점점 가까워진다. 맨발로 콘크리트 바닥을 밟는 소리가 들리고 그놈들이 내뱉는 이상한 괴음이 들려온다. 피부가 짜릿하게 울리고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그들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저기다.’, ‘먹자’, ‘죽이자’, ‘찢자’.
파도는 끝내 우리가 있는 차를 덮쳤다. 차가 사정없이 흔들린다. 비명을 참기 위해 소매를 꽉 물었다. 우리는 차 밑에서 그놈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10초가 10시간처럼 느껴졌다. 두려운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시야를 앞이나 옆으로 돌리지 못했다. 두려움 앞에 본능은 차갑게 굴복했다. 나는 눈을 감지도 못하고 멍하니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만을 보았다. 그러면서 피부와 귀로는 주위를 느끼며 최대한 많은 정보를 긁어모았다.
얼마나 많은 숫자가 우리 위를 지나가고 있는 걸까. 옥상에 그 사람들은 다 죽었을까? 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완전히 바닥에 얼굴을 박았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이 악몽에서 깨어나고 싶었다.
억겁의 시간 속에서 나는 공포라는 바닷속에 빠져들어 갔다. 몸의 감각은 천천히 사라지고, 마치 검은 수면 위에 둥둥 떠다니는 착각에 빠졌다. 검은 화면 위로 채연이의 얼굴이 떠다닌다. 지금, 너무나 보고 싶었다. 그리고 너무 살고 싶다.
* * *
‘다 지나갔어.’
허억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강하게 기침해 고인 숨을 내뱉는다. 마치 인공호흡을 받은 사람처럼 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하는 느낌을 받았다. 언제 흘린 건지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고, 콧물이 입술을 적신다. 나는 침을 연신 흘리며 계속 기침했다.
숨이 너무나 달콤했다. 그리고 주위는 어느새 조용해져 있었다. 어깨를 바라보자 늙은 손이 올려져 있었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노인이 보였다. 나에게 괜찮냐고 묻는 것 같아서 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차 밑에서 앞과 옆을 살펴보았다. 좁은 간격에 다른 차 밑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놈들이 내는 소리는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말을 더듬으며 노인에게 물었다.
‘얼마나 지났어요?’
그러자 노인은 대답했다.
‘소리가 들리지 않은 지 꽤 됐어.’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놈들이 모두 지나간 모양이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난 열심히 기어 차 옆으로 다가갔다. 차 문은 저 멀리 떨어져 있었고, 바닥은 온통 유리 조각으로 가득했다. 난 그것을 팔로 쓸어 옆으로 옮기고 조심스럽게 몸을 반쯤 일으켰다.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그리고 한정된 시야에 들어오는 그놈들도 없었다. 나는 완전히 몸을 일으키기 위해 땅을 손으로 짚었다. 그리고 다시 양옆을 살피며 몸을 완전히 핀다. 휴게소 쪽을 바라보자 지붕이 박살 난 차들이 보이고, 지옥으로 변한 휴게소 건물이 보였다.
이젠 비명도 들리지 않는다. 바글바글하는 그놈들이 곰팡이처럼 건물 주위에 달라붙고, 몰려들어 역겨운 광경은 연출한다. 저놈들이 다시 돌아가기 전에 우리는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난 작은 신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양옆을 살펴보니 좁은 간격에 도로 방음벽들만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천천히 몸을 돌려 뒤쪽을 바라봤는데, 그곳에선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누군가가 있었다.
침을 뚝 뚝 흘리며 잔뜩 붉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놈. 차 밑에서 보지 못한 사각지대에 있었는지 차 사이에 발을 거치고 서 있는 그놈은 나를 바라보며 침을 흘렸다. 그리고 입을 천천히 벌렸다. 피가 섞인 침은 뚝 떨어지고 이빨 사이로 살점들이 보였다. 무엇을 그렇게 물어뜯었는지 입 주위는 피로 가득했다.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사고를 정지했다. 그놈은 기쁜 괴음을 지르며 한순간에 차 사이에서 빠져나오더니 차 보닛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단숨에 다리를 박차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들고 있는 총을 들어 올렸다.
그놈은 마치 짐승처럼 이빨을 앞세우고 내 목을 물어뜯으려 했다. 운 좋게 총으로 그놈을 가로막았다. 총 몸체로 공격을 막자 그놈은 마치 총이 살점이라도 되는 듯 까드득까드득 사정없이 씹었다.
이빨로 총을 씹는 불쾌한 소리가 으드득 울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놈을 밀면서 이곳에서 빠져나가려 용을 쓴다. 하지만 그놈은 나를 놓지 않겠다는 듯 양손으로는 내 몸을 꽉 잡고, 이로는 연신 총을 씹었다.
압도적인 완력, 점점 힘이 빠지는 손. 그리고 옷에 떨어지는 그놈의 침. 나는 서서히 힘이 빠지는 손을 탓하며 비명을 삼켰다.
순간 무언가 날아와 그놈 머리를 퍽 하고 친다. 그놈이 총에서 입을 빼지 않자 다시 한 번 그놈 머리를 강하게 친다. 그제야 빠지는 이빨에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놈을 밀쳤다. 그리고 시선을 돌리자 차 위에서는 엽총을 들고 있는 노인이 보였다.
노인은 차가운 눈으로 엽총을 야구 방망이처럼 들고 있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개머리판을 휘둘러 그놈 머리를 가격했다. 파삭하고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놈을 발로 밀었다. 그놈이 중심을 잃고 차 보닛 위에 쿵 하고 떨어지더니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머리는 깨진 듯 골수가 흘러내리고, 무섭게 빛나던 눈은 빛을 잃고 흰자위를 보인다. 나는 숨을 내뱉으며 비틀거리듯 몸을 세웠다. 노인도 거침 숨을 내쉬며 엽총을 천천히 바닥에 내렸다.
나는 총을 들고 대검을 그놈 머리에 겨눴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총을 질러 그놈의 눈에 대검을 꽂아 넣었다. 놈의 움직임은 서서히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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