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일어나.’
짧지만 강한 한마디가 수면에서 나를 끌어 올렸다. 오랜만에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눈을 뜨자 짐을 챙기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모닥불을 꺼져가는지 작은 불씨만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텐트 밖으로 조금씩 옅은 여명이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비비고, 얼굴에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 묵묵히 짐을 챙기는 노인에게 말했다.
‘해가 완전히 뜨면 이동하죠.’
노인은 대답하지 않고 묵묵하게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나는 의문을 느꼈지만, 괜히 큰소리를 내기 싫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쌓였던 피로와 긴장감이 잠을 통해 녹아내렸는지 지독한 갈증과 허기를 느꼈다.
가방에서 생수를 꺼내 급하게 마시고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가방에 한가득 쌓여 있는 비스킷을 꺼내 입으로 가져가 씹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짐을 싸고 있는 노인 곁에 툭 던져놓았다. 노인은 그것을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묵묵히 짐을 싸기 시작했다. 조금 어두운 텐트는 침묵으로 뒤덮였다.
그들이 있는 곳은 신서울대학교가 맞았다. 내 예상대로 멀리 떨어진 지역은 아니었다. 어젯밤 노인이 말하길 자신은 손녀가 없어진 날 다수의 사람이 남긴 흔적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 흔적을 따라 이동하기를 이틀, 죽을 고비를 넘기며 신서울대학교에 도착했고, 손녀를 되찾기 위해 침입하려 했으나 총을 든 보초들 때문에 접근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어떤 방법이 없을까 한참을 거기서 서성이던 노인은 밤이 되자 활동을 시작한 그놈들을 피해 도망쳤고, 이 휴게소에 도착해 고립되어 버렸다고 설명했다.
또 노인이 말하길 옥상에 있는 저들은 사건 당일 서울을 빠져나가려다 휴게소에 고립되었던 사람들이라고 했다. 처음은 옥상이 아닌 휴게소 내부에서 문을 단단하게 막고 있었고, 생존자들도 상당수 존재했다고 말했다.
그 말에 난 궁금증이 들어 물었다.
‘근데 왜 옥상으로 온 거죠?’
노인은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절대 휴게소 문을 열지 말라고 했다. 난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우리는 어제 거래를 했다. 노인은 그들이 어디 있는지 나에게 알려 줬고, 난 노인이 그곳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서로가 원하는 목적을 위해 같이 행동하고 돕는다. 무척이나 호의적인 거래 내용이었다.
아마 우리는 서로에게 작은 연민과 동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소중한 것을 지키고 싶어 했고, 그것을 찾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이 두 명. 그동안 느껴왔던 죄책감과 고독. 그리고 외로움이 아리듯 심장을 찔러 왔다. 아마 노인도 같았으리라.
내 긴 상념을 깨운 건 단호한 노인의 목소리였다.
‘그만 출발하지.’
딱딱하고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난 그 속에서 저번과 다른 감정을 느꼈다. 난 노인이 내미는 총을 받아들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텐트는 챙겨가지 않는지 노인은 생각보다 작은 가방을 들고 텐트 문을 열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얼굴을 훅 치고 들어온다. 마치 찬물로 세수를 하듯 정신이 맑아진다. 저 멀리 건물들 사이로 옅은 여명이 밝아오는 게 보였다. 건조한 출정식이다.
우리는 텐트를 나와 걸음을 옮겨 내가 옥상으로 올라왔던 사다리로 향했다. 그곳으로 향하던 순간 해가 아직 들어오지 못한 그림자 사이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나는 화들짝 놀라 총을 겨눴다. 하지만 노인은 내 총구를 잡았고,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나는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노인을 바라봤지만, 노인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곳을 한참을 들여다봤고, 그림자 속에서 서서히 빠져나오는 한 여성을 발견했다. 옥상에서 거주하는 사람 중 하나로 보이는 여성은 꼬질꼬질한 행색을 한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여성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히익 하고 작은 비명을 지르더니 이내 나를 협박했던 사내가 들어간 텐트로 내 달렸다. 그리고 그녀가 작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가요!’
난 그 소리를 듣자마자 기분이 차갑게 가라앉는 걸 느꼈다. 그리고 왜 노인이 이런 새벽에 출발하자고 한 것인지 깨달았다. 나는 칙칙한 불쾌감을 느꼈고, 천천히 조정간을 움직여 안전장치를 풀었다. 그리고 노인을 보자 노인은 이상하게도 작은 실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냥 빨리 내려갈까요? 하고 노인에게 말하려던 순간 뒤에서 많은 걸음 소리가 들렸다. 어찌나 급하게 나왔는지 다들 눈곱이 끼어 있었고, 머리는 까치집을 이루고 있었다. 졸린 기운이 가득해 보이는 게 혹시 우리가 밤에 떠날까 봐 밤새워 지켰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떠나지 않자 여자 한 명을 여기다 박아둔 것 같은데, 그 의도가 너무나 뻔해 감정이 차갑게 식었다. 그 남자는 어제 들고 있던 쇠파이프를 들고 있었고, 다른 남자들도 어디서 구했는지 조잡한 무기들을 들고 있었다.
여자들은 여전히 눈치를 보며 그 뒤에 숨어 있었는데, 여기서 망을 보던 한 여성은 나랑 눈치 마주치자 독기가 서린 눈으로 나와 내 가방을 노려봤다. 내가 천천히 총을 들어 올리자 그들은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피식 웃으며 서서히 접근했고, 이렇게 말했다.
‘쏠 수 있으면 쏴!’
그들은 배짱이라도 부리는 건지 내가 총을 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영감탱이 어디 가려고?’
가장 선두에서 쇠파이프를 들고 있는 남성이 비죽거리는 입을 열고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은 여전히 실소를 머금고 나처럼 총구를 들어 올렸다.
‘쏘시게? 쏴 보라니까!!’
그들은 능숙하게 우리를 도발하며 서서히 접근했다.
‘그 가방만 내놓으면 나가게 해 줄게.’
이번에는 쇠파이프를 든 남자 옆에서 조잡한 창을 들고 있는 한 중년의 남성이 말했다. 가방을 내놓으면? 그다음에는? 총? 옷? 아니면 나머지 목숨? 나는 담담한 얼굴로 천천히 장전을 시작했다.
총알이 문을 열어달라며 총구의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차갑게 울린다. 손에 착 들어오는 그립감. 간단하게 삶을 앗아가는 그 묵직한 무게가 손안 가득 느껴진다. 총구를 들어 올리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려둔다.
내가 장전을 하자 나에게 가방을 내놓으라 말했던 중년 남성은 당황한 얼굴로 걸음을 멈췄다. 그 뒤를 따라오던 여자들도 작은 비명을 지르며 남자들 뒤로 숨는다.
쇠파이프를 든 남성이 당혹스러운 기색을 숨기며 나에게 외쳤다.
‘어이 형씨! 잘 모르겠지만 여기서 총 쏘면 다 죽자는 거야.’
난 대답하지 않았다. 항상 상황은 나를 막아 왔다.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를 망설이게 했다. 그리고 그 망설임은 나에게 독처럼 다가왔다. 내가 죽인 군인도 그 한순간 망설임으로 머리가 터져 죽었다.
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조준간 사이로 잔뜩 겁먹은 남성의 얼굴이 들어온다. 노인도 이번에는 내 총구를 잡지 않았다. 그저 그때 보여 줬던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을 겨누고 있었다.
그들은 겁먹지 않은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일이 수틀림을 느꼈는지 더는 다가오지 않았다. 쏜다, 안 쏜다. 확실치 않음에 그들은 차마 몸을 던지지 못했다. 우리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사다리까지 거리는 40m가 넘지 않는다. 우리는 뒷걸음질 치며 그사이를 천천히 좁혀갔다. 내가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치자 그들은 차마 접근하지 못하는지 간격은 서서히 멀어졌다.
거리를 20m를 남겼을 때다. 쇠파이프를 든 남성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뜨거운 숨을 훅 내뱉었다. 그리고 발작하듯 입에 거품을 물고 노인을 향해 소리쳤다.
‘좀 나눠 먹자고! 그게 그렇게 힘들어?! 이기적인 새끼들아!’
이제는 괴물로 변해 버린 사람의 외침. 뺏으려 했음에도 그것을 정당화하고, 끝까지 사람으로 남고 싶어 하는 이기적인 외침. 나는 불쾌함을 느끼면서도 작은 연민을 느꼈다. 인간은 이토록 변하기 쉬운 동물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옆에서 노인의 씁쓸한 말이 고막을 타고 들려왔다.
‘자네는 그럼 그들한테 왜 그랬나?’
목소리에는 짙은 회한과 후회가 남아 있었다. 그 목소리가 차가운 내 마음에 작은 돌멩이를 던졌고. 그 여파는 서서히 퍼졌는지 쇠파이프를 든 남성은 부들부들 떨었다.
‘죽여! 저 새끼들 죽이라고!’
남성이 쇠파이프로 바닥을 내리치며 외쳤다. 일행들이 움직이지 않자 그는 망설이는 일행들을 발로 차며 독촉했다. 그리고 이내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던 남성들은 두 눈 가득 독기를 품고 우리에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오랜 굶주림과 갈증이 두려움마저 앗아간 것이다.
그리고 쇠파이프를 든 남성도 그 뒤를 따라 정확하게 나를 향해 달려온다. 시간이 다시 천천히 흐른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치고, 코끝을 통해 속 안 깊은 곳까지 들어온다. 시야가 좁아지고 나를 향해 뛰어오는 남성이 보인다.
그 모습이 군인을 향해 달려가던 내 모습과 서서히 겹친다. 악귀, 괴물. 구정물이 가득할 것 같은 더러운 감정. 나는 그 남성에게 역겨움을 느끼면서도 나를 끊임없이 비하했다. 그러면서도 내 조준간은 남성의 머리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 군인은 쏘지 못하던데, 너는?
누군가 내 심장에 작게 속삭인다. 그 사람은 저렇게 무서운 얼굴로 달려오던 너를 쏘지 않았는데, 너는 쏠 거야? 왜? 어째서? 살고 싶어서?
근데 그 군인도 살고 싶지 않았을까?
너는 왜 살아야 하는데?
진흙탕 같은 감정이 방아쇠 위에 내 손가락을 막는다. 죄책감과 자신을 향한 역겨움이 숨을 쉬지 못하게 목구멍을 틀어막는다. 마치 저 깊은 심해 속에 빠진 기분이었다. 앞으로 나아가려 해도 끊임없이 몰려오는 물살에 나는 움직이지 못한다.
이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착각에 빠진다. 서서히 총구를 내린다. 슬로 모션처럼 눈앞에 남성이 느리게 뛰어온다. 그리고 그는 비열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쏴야 한다. 죽여야 한다. 빨리 끝내고, 채연이를 구하러 가야 한다. 머리는 나에게 그렇게 외치지만 나를 쏘지 못했던 군인의 눈이 내 손가락을 밟는다.
‘자네는 아직도 망설이고 있군.’
노인이 옆에서 그렇게 말했다. 머리에 벼락이 친다. 끊임없이 떨리던 내 몸이 메두사를 마주한 듯 그 자리에서 꼼짝없이 굳어 버린다.
오른쪽 다리가 묵직하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익숙하고 너무나 그리운 감각. 고개를 떨어뜨리듯 아래를 내려다보자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채연이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너무나 그립던 얼굴,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던 얼굴. 채연이의 맑은 눈동자 속에 내 얼굴이 비친다. 채연아 밥은 먹었니? 잠자리는 따뜻하고? 혹시 이 아저씨가 보고 싶지는 않았니? 나는 너무 보고 싶어서 너를 찾아가고 있단다.
조금만 기다리렴, 아주 조금만 기다려. 그동안 울지 말고 꾹 참고 기다리고 있으렴. 언제나 그렇듯 아저씨가 먼저 찾아갈 테니까. 나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하며, 채연이 머리 위에 손을 올려둔다. 손안 가득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채연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신기루처럼 서서히 사라진다. 손에 잡히지 않는 아지랑이는 마치 환상처럼 서서히 흩어졌다. 나는 허공만 남은 그곳을 손안 가득 쥐어 보고, 다시 총구를 들어 올렸다.
검지를 움직여 조종간을 연사로 변경한다. 망설임 없이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리고 꾹 당겼다. 조준도 없었고, 성의도 없었다. 방아쇠를 꾹 당겨 달려오는 남성들 사이로 총을 흩뿌렸다. 달려오는 남성의 허벅지와 골반에서 피가 팍 터진다. 그리고 천둥 같은 총성이 허공을 가로지른다.
그 남성은 힘없이 쓰러졌고,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노인도 총을 발사했는지 묵직한 발사음이 왼쪽 귀를 울렸다. 힘없이 쓰러지는 남성의 머리가 슬러그 탄으로 인해 펑 터진다.
방금까지 우리에게 소리를 지르던 사람은 한순간에 고깃덩어리로 변해 버린다.
여자들이 지르는 비명이 밖에서 그놈들이 지르는 괴음과 섞여 하모니를 이룬다. 달려오던 다른 남성들은 공포에 주저앉았다. 나는 다시 조정간을 움직여 안전으로 바꾸고, 개머리판을 접었다.
그리고 가방을 꽉 잡고 사다리로 달렸다. 그놈들이 몰려온다. 노인은 나를 힐끗 쳐다보고, 빠르게 뒤따라왔다. 노인의 얼굴에는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평온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놈들이 내지르는 괴성이 사방에서 울린다. 이곳이 지옥으로 변하기 전에 벗어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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