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만남의 광장은 차로 가득했다. 들어오는 차는 꽉 막힌 주차장에, 멈추고 나가려는 차는 움직이지 않는 도로 때문에 갇혔을 것이다. 그리고 고립된 사람들은 아주 쉽게 그놈들의 표적이 되어 버린다. 멀쩡한 차가 보이지 않았다. 그놈들이 덮치자 도망가려 했는지 문이 열린 차들이 많았다.
하지만 대다수 차들이 유리창이 깨져 있었고, 얼어서 말라붙은 피들과 살점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나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당시 상황이 눈앞에 훤하게 보인다.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는 사람들은 차에 막혀 찢기고 먹힌다.
차 안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들 또한 그놈들의 공격에 유리창이 모두 부서지고, 끌려 나와 찢겨서 잡아먹힌다. 이곳은 고립된 지옥이었다. 그리고 이미 지나가 버린 지옥도였다. 반쯤 뜯긴 유아용 시트가 시야에 들어오자 나는 못 볼 걸 봤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차와 차 사이가 너무나 좁았다. 처음에는 사람 하나 지나갈 만큼 간격이 있더니 휴게소에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차와 차 사이 간격이 좁아졌다. 차 위로 올라가 지나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중간중간 보이는 그놈들로 인해 난 고개를 저었다.
결국, 기어야 한다. 나는 배낭을 옆으로 들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차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이제는 차 밑이 더 편해지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총을 끌어안고, 포복 전진으로 열심히 기었다. 그놈들과 최대한 멀어져야 했기에 양옆과 앞뒤를 열심히 살폈다.
간혹 저 멀리 버둥거리는 다리가 보였는데, 아마 좁은 차 간격에 끼어 버린 모양이다. 그래도 괜히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놈들이 있는 곳은 빙 둘러 최대한 멀어졌다. 역시 걷는 것보다 소리도 적게 들리고 안전했다.
하지만 역시 체력 문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열심히 기어도 걷는 것에 비하면 속도도 느리고, 몸도 빠르게 지쳐갔다. 가슴팍과 바지가 눈 때문에 촉촉하게 젖어 들어갔다. 나는 구슬땀을 흘리며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주차장은 정말 넓었다. 아마 걸어갔으면 짧다고 느낄지도 몰랐지만, 땀을 뻘뻘 흘리며 기어가는 그때는 정말 넓게 느껴졌다. 중간지점을 지났다. 휴게소 출구를 통해 목적지로 향하자 하는 생각을 했는데, 지나가는 내내 자꾸 휴게소 쪽으로 시선이 갔다.
아마 떨어지는 식수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비어 버린 물통이 신경이 쓰였다. 소모하는 칼로리와 수분이 많았기 때문에 가득 채워서 가져 왔던 물은 빠르게 줄어든다. 체력이 고갈되면 끝이라는 생각에 물을 아껴먹을 생각은 진즉에 없었다.
아마 이 남은 물도 내일이 지나면 모두 사라질 것이다. 나는 잠시 기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 고민 좀 하고, 휴식도 취할 겸 가방에서 물과 비스킷을 꺼냈다. 소매로 땀방울을 닦으며 가방에서 꺼낸 지겨운 비스킷을 입안에 욱여넣었다. 그리고 물 반 통을 단숨에 마시고, 입안에 남은 마저 비스킷을 넘겼다.
식사를 빠르게 끝냈다. 그리고 한참을 총을 부여잡고 생각했다. 신서울대로 향하는 와중에 식수를 구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가뜩이나 많이 소비하는 물인데, 틈틈이 공급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
물론 휴게소에도 물이 있을 거란 보장은 없었지만, 그래도 휴게소다. 약탈이 없었다면 적정량의 물품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겉으로 본 휴게소는 조용했고, 문 근처에는 그놈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 확인만 하고 오자. 위험하면 다시 차 밑으로 기어서 도망가면 된다.
나는 열심히 기어서 주차장을 벗어났다. 휴게소 근처는 주차구역이 아님에도 차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확연하게 넓어진 공간에 나는 조심스레 차 밑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내밀었다. 뒤로는 내가 열심히 기어서 지나왔던 차들이 보였고, 정면에는 큰 휴게소 건물이 보였다.
나는 조심히 일어나 계단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계단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얼굴을 내밀며 휴게소 건물 입구를 쳐다보는데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휴게소 유리문이 전부 신문지로 가려져 있던 것이다. 인위적인 흔적이 분명했다. 안에 사람이라도 있는 것일까?
나는 발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천천히 신발을 벗고 계단 한쪽에 올려뒀다. 그리고 살금살금 휴게소 입구로 접근했다. 휴게소로 들어가는 유리문 입구는 전부 신문지로 막혀 있어 내부를 확인하기 힘들었다.
한참을 들여다보는데 이상한 점을 또 발견했다. 바로 휴게소 문고리가 쇠사슬로 여러 번 감겨 잠겨 있는 것이다. 쇠사슬은 튼튼한 자물쇠로 단단히 막혀 있었는데, 녹슬지도 않았고 튼튼한 새 제품이었다. 자물쇠를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나는 순간 행동을 멈춰야 했다.
‘총 내려놔.’
정말 차갑고 싸늘한 어투가 내 고막에 비수를 꽂았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힘이 있고 강했다. 언제 내 뒤로 왔는지 뒤통수에 총구로 생각되는 차가운 물체가 느껴졌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쇠사슬을 잡고 있는 손을 천천히 떨어뜨린다.
내가 손을 내려놓자 총구는 다시 한 번 내 머리를 꾹 누른다. 나는 그것이 경고라는 사실을 알고, 들고 있는 총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양손을 천천히 올렸다. 내 뒤로 접근하는 기색조차 느끼지 못했다.
마치 그림자처럼 다가와 내 머리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발소리는커녕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나는 경악 하면서도 당장이라도 그가 총을 발사할까 봐 심장을 졸인다.
‘뒤로 돌아.’
그 목소리에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돌렸다. 그러자 당장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내 미간을 겨누고 있는 낡은 엽총이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부분은 살짝 색이 변했지만, 절대 우습게 보이지 않았다. 엽총은 노련한 인상과 함께 총구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내 얼굴을 보고, 쓰고 있던 마스크를 천천히 내렸다. 마스크를 내린 그는 백발이 무성한 노인이었다. 얼굴에는 무엇을 발랐는지 검었고, 눈빛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체구는 나보다 작았지만, 함부로 할 수 없는 포스가 가득했다. 살벌한 눈빛은 나를 얼어붙게 했고, 노련함이 묻어나는 행동은 나를 문 쪽에서 천천히 멀어지게 했다.
그는 나를 조준하면서 내가 바닥에 내려놓은 총을 뺏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그놈들이냐?’
나는 당연히 대화의 요지를 잡지 못하고 얼이 빠져 대답했다.
‘네?’
그러자 그는 인상을 찌푸린다. 내가 그 모습에 천천히 뒷걸음치자 그는 나에게 다가와 내 멱살을 잡았다. 노인이라 보기 어려울 만큼 굉장한 완력에 나는 형편없이 그에게 끌려갔다. 그는 총구를 여전히 나한테 겨누면서 다시 물었다.
‘어디서 왔지?’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 질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금방이라도 나를 쏴 버릴 듯 총구로 내 이마를 쑤셨다. 옅은 고통에 나는 인상을 찡그렸고, 그는 날카롭게 빛나는 눈으로 나에게 대답을 강요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놈들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그저 감이었다. 이 노인이 말하는 그놈들이란 누굴까? 저기 걸어 다니는 괴물을 말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생존자를 말하는 것일 텐데, 노인이 이런 적대적 반응을 보이는 생존자라면 적어도 자신에게 해를 입혔다는 소리다.
이 상황에서 생존자들끼리 일으키는 분쟁이 없을 리가 없었다. 물론 노인이 말하는 그놈들이 내가 찾는 그놈들이란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노인이 말하는 그놈들과 내가 찾는 그들이 같을지도 모른다는 감이 들었다. 그래서 뭐라 대답할지 고민하던 와중에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찔러 본 것이다.
노인의 눈빛은 적대에서 의문으로 천천히 바뀌었다. 그리고 주차장에서 어슬렁거리는 그놈들을 바라보더니 이내 조급한 얼굴로 다시 나에게 말했다.
‘따라와.’
그리고 과격하게 내 손을 꺾어 뒤로 넘기더니 앞으로 천천히 밀었다. 나는 그에게 밀려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천천히 앞장서 걸어갔다. 그가 가는 방향은 휴게소 뒤쪽이었다.
처음은 도망갈까 고민했다. 그놈들이 주차장에 있는 이상 설마 노인이 총을 쏘겠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총은 나를 단숨에 죽여 버릴 수단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소음만큼 무서운 적은 없다. 양날의 검. 최후의 수단. 난 노인이 총을 함부로 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난 순순히 끌려갔다. 노인이 내뱉은 말이 계속해서 귀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정보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선 난 무엇이든 들어야 했고, 알아야 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등불은 그게 무엇이든 따라가야 한다.
그놈들, 노인이 말하는 그놈들이 누군지. 왜 나에게 그놈들이냐고 묻는지! 그리고 왜 어디서 왔냐고 묻는지. 모든 게 퍼즐처럼 머리에서 사방으로 흩날린다. 마치 맞춰질 듯 간을 보는 실마리들이 내 신경을 예민하게 자극한다.
휴게소 뒤쪽에는 쓰레기들이 가득했다. 그 쓰레기들을 능숙하게 발로 치우고, 노인은 나를 앞으로 밀었다. 그리고 그는 내 귀를 감싸고 있는 붕대를 보았는지 짧게 물었다. ‘물렸나?’ 나는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그놈들은 단순히 무는 거로 끝내지 않는다. 노인은 그놈들 상황을 잘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러자 노인은 다시 나를 밀면서 목적지를 가리켰다. 한쪽 벽에 낡은 사다리 하나가 걸려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그 사다리는 옥상을 향하고 있었다. 노인은 여전히 총구를 내 머리에 겨누고 말했다.
‘올라가.’
나는 침을 삼키고 사다리를 손으로 잡았다.
* * *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자 보이는 건 꽤 넓은 옥상과 한쪽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곳에서 거주하고 있는지 간혹 보이는 텐트들과 상자와 신문지를 이용해 만든 조잡한 집이 보였다. 좋게 말해서 집이지, 바람을 막기 위해 만든 칸막이란 표현이 어울렸다.
내가 옥상으로 올라오자 나를 바라보며 걸어온 사람은 대략 8명. 예상은 했지만, 호의가 아닌 적의와 경계심을 가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잠시 뒤 노인도 사다리를 타고 올라왔고, 아까와는 다르게 내 머리에 총구를 겨누지는 않았다.
눈앞에 있는 그들은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 그만큼 그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나는 눈동자를 굴려 조금이라도 빨리 그들을 파악하려 애썼다. 남자 5명, 여자 3명 꼬질꼬질한 옷에 잔뜩 엉겨 붙은 머리들. 그리고 피곤함과 혹독한 주위 마지막으로 극심한 굶주림이 느껴지는 얼굴들.
‘그 가방부터 내놔.’
가장 선두에서 나를 노려보던 남성이 말했다. 어디서 들고 왔는지 쇠파이프를 들고 노려보는 꼴이 이상하게 초라했다. 하지만 욕망으로 가득한 눈빛이 내 신경을 강하게 자극했다. 그는 당당하게 내 물품을 내놓으라 말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런 남성을 말리지 않았다.
나머지 남성들은 쇠파이프를 든 남자 곁으로 다가와 내 가방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고, 여자 3명은 그 근처에서 괜히 몸을 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여자들 눈빛에도 똑같은 욕망이 묻어나와 있었다.
인간은 극한의 상황이 다가오자 그놈들과 똑같은 모습을 보여 준다. 나는 노인에게서 총을 뺏어 나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옆을 돌아봤다. 하지만 노인은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와 엽총을 그들에게 겨누고 있었다.
‘꺼져.’
그 노인은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난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그들이 노인에게 보내는 눈빛을 보고 난 약간이지만 작게 수긍했다. 그들은 노인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노인은 아마 이곳에 속해 있지만, 그들에게 환영받는 존재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들은 욕망을 노골적으로 보이면서도 총이 두려워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선두에 있던 남성이 조금 크게 말했다.
‘영감탱이. 다 같이 굶어 죽자는 소리야?’
그러나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날카로운 눈빛을 유지하면서 엽총을 그들에게 겨누고 있었다. 마치 안 꺼지면 쏘겠다는 듯 떨림이 없는 총구에 차마 덤비지는 못하는지 남성은 인상을 찡그리고 자기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나머지 사람들도 저 남성이 들어간 이상 덤벼들 깡은 없는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한참을 그렇게 총을 겨누던 노인은 그들이 전부 사라지자 천천히 총을 내렸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따라와.’
그리고 겁 없이 나를 지나쳐 저 구석에 홀로 세워진 텐트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아마 노인이 지내고 있는 텐트인 모양이다. 마치 난 저들과 다르다고 말하듯 외톨이처럼 혼자 서 있는 텐트는 초라해 보였다.
나는 노인을 따라 걸어갔다. 노인이 들어간 텐트를 열자 훈훈한 기운이 얼굴을 덮었다. 텐트 중앙에는 작은 철통이 있었고. 거기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마른 장작들이 타고 있었다. 텐트 위에 작은 구멍으로 연기를 나가게 하는 모양인데 불을 작게 유지하고 있어서 연기도 많이 나오지 않았다.
노인은 불 앞 의자 위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아.’
난 갑자기 바뀐 노인의 태도 때문에 여전히 혼란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엉거주춤한 걸음으로 불 앞으로 다가가 간이의자에 털썩 앉았다. 눈으로 젖었던 옷을 천천히 말리고, 차갑게 굳었던 몸을 녹인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열기에 난 날카로운 신경이 조금씩 무뎌지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 주차장을 통과했지?’
노인은 나에게 말했다. 난 불 앞에 몸을 녹이면서 갑자기 들려오는 질문에 잠시 놀라 그 노인을 바라봤다. 그 노인은 두 번 말하지 않았다. 그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쪽은 지나가지 못하나요?’
난 그렇게 대답했다. 비꼬려는 의도도, 떠보려는 의도도 아닌 그저 순수한 질문이었다. 나는 통과 했는데 왜 당신은 못하지? 순수한 의미로 한 대답을 노인은 다르게 들었는지 인상을 찡그린다. 그리고 입을 열어 말하는데, 그 말에는 날카로움이 아닌 조급함이 살짝 묻어 있었다.
‘간격이 좁아서 놈들을 지나쳐 못 가더군. 그래서 차 위로 올라가 이동하면 어떨까 해서 해 봤더니 그날 2명이 죽었어.’
나는 속으로 안심했다. 역시나 차 위로 올라가는 선택은 좋지 않았었다. 그리고 나는 고민했다. 이들은 바보인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걸까? 아니 혹시 이 방법도 해 봤던 걸까?
‘기어서 차 밑으로 왔어요.’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처음에는 사실을 숨길까 하다가 상황적 주도권이 노인에게 있다는 것과 생각보다 노인이 나에게 호의적인 걸 자각하고, 결국 노인에게 사실을 말했다. 내 대답을 듣자마자 노인은 작게 신음하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참을 그렇게 눈을 감고 있다가 나에게 물었다.
‘그게 가능하던가? 그놈들이 반응하지 않아?’
역시 설마가 맞았다. 이 노인은 차 밑으로 기어서 가는 방법은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들이 멍청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채연이가 아니었으면 차 밑이 안전한지는 몰랐을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그놈들 발밑이 어두울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놈들을 피해 이동하는 방법을 아는 모양이지?’
노인은 나에게 컵 하나를 내밀었다. 처음 나에게 총을 겨누던 노인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호의적으로 바뀐 태도였다. 나는 의문을 느꼈지만 이내 이러는 의도를 대략 짐작했고, 나는 컵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으로 가져가 조심스럽게 마셨다. 따뜻한 커피가 목을 타고 몸으로 천천히 퍼진다. 나는 하아- 하며 피곤과 추위를 숨으로 내뱉었다. 오랜만에 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커피를 반쯤 마실 때까지 노인은 눈을 감고 있었다.
무언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에 나는 숨을 죽이고, 한쪽에 놓인 내 총을 바라봤다. 뛰어서 잡을까? 도망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난 이 작은 실마리를 포기하기 싫었다. 나는 입을 열어 노인에게 물었다.
‘아까 말한 그놈들이 누굽니까?’
나는 작은 기대를 품었다. 혹시 작은 단서를 얻을지도 모른다는 그럼 기대. 노인은 대답하지 않고 잠시 불을 바라봤다. 그리고 입맛을 다시고 나에게 대답했다.
‘내가 쫓는 놈들이야.’
나는 대답을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물었다.
‘사람입니까?’
그리고 노인도 빠른 내 대답에 살짝 놀라 하며 말했다.
‘당연하지.’
대답을 들은 나는 이제 거침이 없었다.
‘자신들을 구조대라고 말하던가요?’
그 말에 노인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순식간에 일어나 엽총을 나에게 겨눴다. 나는 심장이 뜀을 느꼈다. 엽총이 나를 겨눠서도 아니고 위험을 느껴서도 아니다.
‘누구냐, 넌.’
노인은 엽총을 총구를 나에게 들이밀며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노인은 긍정도 부정도 말하지 않았지만, 행동으로 내 질문이 긍정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엽총 총구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들이 어디 있는지 알아요?’
그러자 총구를 내 이마 앞에 들이밀며 말했다.
‘내 질문에나 대답해!’
노인의 손은 이상하게 떨리고 있었다. 격한 심정변화를 겪는 듯 굳은 표정에서 복잡한 심리를 느꼈다. 하지만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채연이를 생각하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그리움이 날 필사적으로 만든다.
안개 속에서 드디어 작은 실마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난 떨리는 목소리로 노인에게 대답했다.
‘나도 그들을 쫓고 있어요.’
노인이 흠칫하는 게 느껴졌다. 살며시 내려가는 총구에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간절한 눈빛으로 노인을 바라봤다. 노인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텐트 안의 불이 심정을 대변하듯 화르르 타올랐다. 노인은 무언가를 참듯 감정을 욱여넣으며 한참을 그렇게 있다 입을 열었다.
‘내 손녀를 잡아갔어.’
머리에 벼락이 친듯했다. 그 노인은 분명히 ‘잡아갔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해 왔던 추측이 이제는 확신이 서가고 있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는 속에서 무언가 꽉 막힌 듯 답답함을 느꼈다.
분노와 조급함. 그리고 뜀박질을 하기 전 느끼는 긴장감이었다. 나는 노인을 굳은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 물었죠? 그놈들을 피해서 가는 게 가능하냐고. 난 가능해요.’
그동안 지옥 같은 순간이 이제는 난관을 극복할 유일한 열쇠로 돌아왔다. 난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놈들이 어디 있는지 말해요. 내가 당신을 데려갈게요.’
노인은 천천히 엽총 총구를 내려놓았다. 지금 다시 본 노인은 깡마르고 약해 보였다. 그리고 굉장히 슬퍼 보였다. 그는 그저 손녀를 사랑하는 평범한 할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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