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아침에 눈을 뜨니 난 마대자루 창을 꽉 부여잡고 화장실에 잠들어 있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이상하게 정신은 맑고 또렷했다. 나는 수명이 다한 버너를 화장실 한쪽에 조심히 올려둔다. 밤사이 불을 밝혀 준 버너에 작은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화장실 거울을 바라본다. 상처 입은 귀는 새벽에 수건으로 지혈한 보람이 있는지 더는 피가 흘러내리지 않았다. 수건을 살짝 들어보자 흉측한 상처 부위가 눈에 들어온다.
만약 도시에 나가게 된다면 약국부터 찾아야겠다. 난 한숨을 내쉬며, 수건을 머리와 귀에 둘러 묶었다. 아무렇게나 긴 수염. 그리고 더러운 얼굴과 옷. 독기로 가득한 눈. 이제는 피투성이 수건으로 두른 머리.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완전한 부랑자의 모습이다. 난 한참을 거울 속의 나와 시선을 맞추다가 고개를 돌렸다.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팠다. 마트를 나올 때 챙긴 초코바가 생각나 주머니를 뒤져 보았다. 다행히 흘러내리지 않은 듯 초코바 몇 개가 주머니에 있었다. 잔뜩 구겨진 포장지를 까고, 추운 날씨와 외부충격에 부서진 초코바를 탈탈 털어 입으로 모두 가져간다.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히 퍼지지만, 남아 있는 쓴 내음을 모두 몰아내지는 못했다.
화장실 문을 열었다. 쉼터 내부는 조용했다. 나는 터무니없는 기대를 해 보았다. 채연이가 아무 일도 없이 화장실 문밖으로 나온 나를 반겨 줄지도 모른다는 그런 기대. 짧은 순간이었지만, 꿈만 같던 시간이 아지랑이처럼 사라졌다.
나는 그 시간을 잡으려 살며시 손을 들어 봤지만, 시간은 신기루처럼 흩어진다. 나는 힘없이 걸어가 소파 위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했다. 어제 발견한 편지지를 열고,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읽어본다.
강수련은 그들이 구조대가 아니라 했다. 그 결과를 도출한 근거도 절대 틀린 근거가 아니었다. 난 약간의 자기합리화와 함께 그녀의 판단을 믿었다. 나는 편지를 보며 종이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눈을 꾹 감았다. ‘채연이를 내버려 두고 가자고 했어요.’라는 문구가 계속 눈에 밟힌다. 미간을 꾹 누르며 복잡한 머리를 다시 굴려본다.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해 봐야 했다.
채연이를 내버려 두고 가자. 그렇다면 낙오를 시키자는 소리였다. 왜? 구조대라면 채연이를 가장 우선순위로 구해야 하는 게 아닌가? 만약 아니라면, 그들에게 다른 여성과 채연이 차이점은? 모든 의문을 나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내 머리가 답한 대답은 상당히 부정적인 답이었다. 말로는 꺼내지 못할 정도로 끔찍한 대답.
만일 그들이 구조대라 하여도 저런 태도를 보이는 대피소에선 채연이는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 아이를 대수롭지 않게 버리고 가자며 말하는 군인들이 있는 대피소. 과연 그들이 구조대인지부터가 의심이 가는 대목이었다. 더 생각할 이유가 없다. 난 편지를 접고,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우자 온몸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난 주먹을 꽉 쥐고 나에게 말했다.
채연이를 구하러 간다.
생각을 마치자 어지럽고 혼란스럽던 머리가 환하게 밝아졌다. 안개 낀 길을 걷던 목표는 밝은 등대를 만난 듯 환하게 밝아왔다. 난 손바닥으로 양쪽 볼을 강하게 치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상처 부위가 찢어질 듯 아파져 오지만, 끙끙 앓으며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입술을 꾹 깨물고 난 쉼터 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마트에서 가져온 식량이 들어 있는 가방을 찾을 생각이다. 그놈들을 피해 걸어가다가 누구와 싸우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채연이를 구한다면, 한동안 우리가 먹어야 할 식량도 필요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식량은 내 생명줄과 같았다.
문을 열자 또 간밤에 눈이 잔뜩 왔는지 세상을 하얗게 변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놈들의 발자국을 찾아봤지만, 그 위에 눈이 쌓였는지 보이지 않았다. 채연이를 찾아 나서는 길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득함이 느껴져 눈을 감았지만, 이내 눈을 번쩍 뜨고 힘차게 걸었다. 포기는 절대 하지 않는다.
걸음을 옮겨서 물 펌프 앞으로 가서 힘차게 펌프를 움직여 물을 틀었다. 용케 이 날씨에도 얼지 않았는지 펌프에서 물이 콸콸 쏟아진다. 나는 그 물로 세수를 하고, 원 없이 물을 마셨다. 차가운 물이 피부를 얼리고, 말라 버린 목을 촉촉하게 적셔 준다. 묻은 피들을 말끔하게 닦고, 상처 부위도 깨끗한 물로 씻는다.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난 걸음을 옮겨 새하얀 바닥에 발자국을 남겼다.
가방은 다행히 없어지지 않았다. 그놈들이 내 총과 쉼터 안에 모든 물건을 가져갔지만, 길옆에 던져둔 가방은 눈 때문에 찾지 못했는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나는 가방을 회수했다. 겉은 조금 젖어 있었지만, 내부는 젖지 않았다. 그리고 순간 허기가 돌았기에 가방 겉에 달아 둔 육포를 발견하자마자 황급하게 입으로 가져갔다.
얼어 버려 너무나 딱딱했지만, 난 턱에 꽉 힘을 줘 육포를 꼭꼭 씹어 먹었다. 몸에 음식이 들어오자 속이 든든했다. 힘도 천천히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난 다시 쉼터로 되돌아가 빈 병들을 모두 모았다. 대략 8병이 넘는 병들을 모두 찾아내고, 그 안에 물을 모두 담았다. 그리고 육포를 엮었던 줄에 물통들을 전부 엮고, 가방에 매달았다.
난 쉼터를 뒤로했다. 채연이와 만나기 전에 이곳을 다시 찾을 생각은 없었다. 쉼터에서 있었던 일들이 천천히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난 일기장을 펴 채연이가 남겼던 낙서를 쓰다듬었다. 금방이라도 채연이가 내 다리에 매달려 가지 말라고 애교를 부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채연이 대신 차가운 칼바람만이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을 느꼈다. 그런데도 난 가방을 고쳐 매고 걸었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때는 채연이 손을 꼭 잡고 돌아오리라 다짐한다. 오른손에는 창을 잡고, 왼손에는 강수련이 남긴 편지를 꼭 쥐었다. 길을 나설 때마다 느꼈던 두려움과 공포가 이제는 느껴지지 않았다. 차가운 겨울 속에서 난 하염없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산에서 내려오자 여전히 도시는 고요했다. 혹시나 근처에 누가 있을까 한참을 두리번거리고, 바닥에 최근에 남겨진 발자국이 있나 조심스레 살피면서 길을 걸었다. 그러다 문득 빼앗긴 총이 생각났다. 그리고 내 귀에 상처를 낸 총알도 생각났다.
그동안 해 왔던 싸움은 원초적이고 처절했다. 그렇기에 한순간에 나를 상처 입힌 총이 내 마음을 강하게 새기고 들어왔다. 구조대라 말하던 그놈들은 전부 총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들고 있는 이 마대자루 창은 총 앞에선 그저 작은 발버둥에 불과했다.
채연이에게 향하는 여정은 길고 험할 것이다. 그리고 그놈들에게 입보단 무기를 들이밀어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난 마음속 한구석으로 총이란 무기를 간절하게 원했다.
그러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기억은 군용트럭 위에서 처절하게 총을 발사하던 군인의 모습이었다. 워낙 충격적인 장면이라 머리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그렇기에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내가 걷고 있는 이곳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다.
그놈들은 살코기만을 원하지 총 같은 물건에는 관심이 없을 것이다. 당연히 총은 그곳에 남아 있을 것이고, 그곳으로 가면 총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그곳에 그놈들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고, 다른 생존자가 내 목숨을 위협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곳으로 향한다는 게 괜한 위험을 부르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다시는 그런 무력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저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 채연이를 바라만 봐야 하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난 위험한 줄 알면서도 그곳을 목적지로 잡았다. 망설이지 말자. 총을 구할 기회는 다시는 오지 않는다.
걸음을 옮겨 골목으로 들어선다. 창을 꽉 잡고, 신경을 날카롭게 세운다.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복잡한 심경이 가슴을 가득 채운다. 떨어지지 않되, 떨어지는 발걸음을 옮겨 다시 한 번 회색빛 도시를 가로지르고 잔혹한 콘크리트 정글로 향한다.
내일 핏자국이 되어 버리는 상상을 한다. 채연이를 만나지 못하는 악몽을 꾼다.
하지만 나는 아직 살아있다.
* * *
다시 날씨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눈이 오기 시작했다. 날씨가 변덕을 부리는지 세상은 빠르게 흐려지고,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세상이 흐려졌고, 해는 희미하게 모습을 감춘다.
가끔 눈에 보이는 건물의 창문들 사이로 옅은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세상이 이렇게 변했어도 사람들은 바퀴벌레처럼 끈질긴 생존력을 자랑했다. 난 그곳을 멍하니 바라보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흰 바닥에 발자국을 남기며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시야가 좁아지고, 불어오는 칼바람에 소리조차 차단된다. 다행히 저 멀리 보이는 그놈들도 신경이 둔해지는지 멍하니 하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익숙하게 그놈들을 피해 걷는다. 금방 찾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길이 어렵고 복잡했다. 또 눈이 와서 그런지 시야가 좁아진다. 난 기억을 더듬으며 한참 동안 그 장소를 찾아다녔다.
체감상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점점 발이 시려 오고, 몸이 달달 떨릴 때쯤 저 멀리 큰 육공 트럭 하나가 보였다. 난 그것을 발견하자마자 천천히 자세를 숙였고, 벽에 바짝 붙어서 육공 트럭에 천천히 접근했다. 육공 트럭 위로는 눈이 잔뜩 쌓여 있었고, 핏자국들은 눈 때문에 다 지워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그놈들이 남아 있을까 주위를 둘러봤지만, 육공 트럭 주위에는 그놈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 포식을 마치고 모두 제자리로 돌아간 모양이다. 다만 육공 트럭에서 한 50m 앞 건물 앞에 두 개체로 보이는 그놈들이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꽤 가까운 거리였기에 난 침을 삼키고 더욱 몸을 숙였다. 그리고 천천히 신발을 벗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눈 위라 발소리가 들리지 않겠지만 육공 트럭 위로 올라갈 때 소음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이런 근접거리까지 접근한 기억이 몇 번 없었기 때문에 불안했다. 그리고 변수를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신발을 벗고 걸음을 옮기자 양말은 금세 젖어 버렸다. 난 차가움을 꾹 참고 천천히 육공 트럭으로 접근했다.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갈비뼈로 보이는 큰 뼈와 잘게 찢어진 내장조각들이 즐비했다. 추운 날씨에 썩지 못하고 눈 속에 파묻혀 소름 끼치는 풍경을 연출했다. 군모가 보이길래 살짝 들어보니 피부와 살이 반쯤 뜯어 먹힌 두개골이 달려 있었다.
난 순간 역겨움을 찾지 못하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러나 주위에 그놈들이 있기에 황급하게 입을 막았다. 나는 침을 연신 삼키며 구토를 참았다. 군모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트럭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찢어진 군복과 널려 있는 살점. 지옥이 폭풍처럼 지나간 듯 잔혹한 광경에 나는 눈앞이 아찔했다.
그리고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찢어진 군복 옆에서 볼록 솟아오른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곳으로 향해 걸어가서 눈을 치워보자 내가 그토록 찾던 총이 보였다. 총을 들어 올리자 무언가 뭉툭한 게 딸려 올라왔다. 총 띠인가 하고 유심히 바라보며 묻어 있는 눈을 치우자 그것은 총을 잡고 있던 사람의 손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아까까지 참고 있던 구토를 앉은 상태에서 뱉어냈다. 그 와중에 소리가 날까 봐 구역질을 삼키듯 숨을 꾹 참았다. 코끝이 찡하고 기침이 계속 나왔지만, 난 필사적으로 입을 막고 버텼다.
난 입과 눈을 닦으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총을 잡고 있는 손을 빼내려 해 봤지만, 어찌나 총을 꽉 잡고 있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난 결국 마대자루 창날을 짧게 잡고, 총을 잡은 손가락 사이로 찔러 넣었다.
칼로 찔러서 손을 풀어 보려 했지만, 총을 잡고 그대로 얼어 버린 근육과 뼈는 펴지지 않았다. 결국, 썰듯이 손가락을 잘라 낸다. 나는 기계적으로 하나하나 그 손가락을 썰어 냈다. 창날이 뼈에 걸려 날이 나갔지만 난 거침이 없었다.
냉동육을 가르는듯한 감촉에 소름이 끼쳤고, 구토가 계속해서 올라왔다. 하지만 난 멈추지 않았다. 강해져야 한다. 변해야 한다. 난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눈물로 얼굴을 흠뻑 적셨다.
그렇게 한참을 울면서 총과 손을 분리했다. 분리가 끝나자 난 그동안 뱉지 못했던 숨을 내뱉으며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바닥에 침을 뱉었다. 입안에 쓴 내가 가득했고, 속은 거북했다. 질질 흐르는 콧물과 눈물을 소매로 연신 닦으며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총을 꽉 손에 쥐고, 탄창을 빼본다. 탄창은 비어 있었고,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다시 트럭 주위를 수색했다.
그날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오버랩 된다. 비명을 지르며 연신 총구를 당기던 군인들. 지옥도. 그리고 끝없는 피. 나는 얼어 버린 살점들과 뼈를 밟으며 트럭을 훑었다. 간혹 솟아오른 눈 주위를 치웠지만 빈 탄창과 탄피 그리고 찢긴 군복뿐이었다.
난 육공 트럭 위 승차 칸에서 총을 발사하던 군인들이 생각나 조심스럽게 위로 올라갔다. 발과 손으로 눈을 조심스레 치우며 필요한 물품을 찾았다.
그리고 한 군복에서 탄창 띠를 발견했다. 묻어 있는 피는 이것을 가지고 있던 주인이 어떻게 되었는지 말해 줬다. 탄창 띠를 하나씩 만져보며 탄창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탄창 두 개를 발견했다. 5.56mm 탄으로 가득한 탄창을 꺼내고 손에 들어보았다. 그리고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하나는 총에 끼워 넣고, 다른 하나는 가방 작은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 자동으로 되어 있는 조정 간을 안전으로 바꿨다.
물건이 더 없나 열심히 눈을 치우며 찾았다. 그러나 더는 보이지 않았다. 역시 내가 목격한 대로 군인들이 하나둘씩 죽기 시작하자 나중 가서는 모두 사방으로 도망친 모양이었다. 잔해들이 널리 분포되어 있었고, 그쪽으로 가 볼까 하다가 근처에 있는 그놈들을 생각해 계획을 접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트럭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힐끔 그놈들이 있던 방향을 쳐다봤다. 내가 봤던 장소에 아직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리고 난 마지막으로 운전석을 확인하려 했다. 운전석을 기준으로 그놈들과 거리가 제일 가까웠다.
난 혹시나 그놈들이 이곳을 볼까 봐 눈치를 보며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그리고 열심히 기어가 운전칸 차 문을 열었다. 차 문을 열 때 작은 소음이 들렸고, 깜짝 놀라 그놈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강하게 부는 바람 소리에 소음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빠르게 운전석으로 들어갔다가 깜짝 놀라 총을 발사할 뻔했다. 아니 사실 방아쇠를 얼떨결에 당겼다. 하지만 조정 간을 안전으로 해 둔 게 신의 한 수였다. 난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시 앞을 바라봤다.
운전석 내부에서도 포식이 이뤄진 듯 창문과 시트에는 피와 살점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보조석에는 시트에 대가리를 박은 놈들의 시체가 하나 있었다. 처음에는 살아 있는 놈인 줄 알고 놀란 거지 이내 그놈이 움직임이 없는 걸 보고 죽었다고 안심했다.
마대자루로 그놈을 쿡 쿡 찔러 봐도 역시 움직임이 없었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그것을 자세히 보자 그놈 눈에는 대검으로 보이는 물건이 박혀 있었다. 그 외 운전석에는 특별한 물건은 없었다. 나는 으으 신음을 내뱉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결심한 듯 입술을 꽉 깨물고, 그놈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
한 번 죽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정신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놈 시체를 이렇게 가까이서 관찰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머리카락은 없었고, 피부는 창백한 회색이었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고, 얼굴은 인간이 아닌 괴물처럼 생겼다. 옷을 입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반팔과 반바지였다. 그것도 잔뜩 낡고 찢어져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놈 눈에 박혀 있는 대검 손잡이를 잡았다. 빼려고 잔뜩 힘을 주었지만 쉽게 빠지지 않았다. 나는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결국 마대자루 창날로 후벼 파듯 찢어 대검을 빼내었다.
대검이 빠지자 나는 익숙해지지 않는 역겨움에 거친 숨을 연신 내뱉었다. 그리고 대검을 시트에 닦고, 천천히 총 끝에 착검했다. 이제는 날이 빠지고, 접합 부위가 느슨해진 마대자루 창을 조용히 시트 옆에 내려놓았다.
원하던 바를 다 얻었기에 난 잠시 숨을 고르고, 운전석을 나가려 몸을 틀었다. 그러자 그놈 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상표가 없었고 잔뜩 낡은 반바지다. 그런데 한쪽 주머니가 볼록 솟아올라 있었다. 나는 의문을 느껴 그곳에 손을 뻗어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손끝에 걸린 걸 꺼내자 오랜 세월도 변색한 가죽 지갑이 보였다. 그리고 피와 정체를 모를 액체가 묻어 있어 끈적끈적하고 기분이 나빴다. 지갑에서 풍기는 역한 냄새 때문에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머리는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사달이 나고 나서 오랜 시간이 흐른 게 아니다. 그런데 이 낡은 여름옷은 무엇이고, 꼭 수십 년이 지난 듯 변색한 지갑은 무엇인가? 결국,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지갑을 열었다. 끈적끈적한 액체 때문에 잘 벌려지지 않는 지갑은 힘을 주자 간신히 열렸다.
가장 먼저 주민등록증을 찾았다. 변색한 가죽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주민등록증을 힘주어 꺼내자 무척이나 생소한 주민등록증이 보였다. 지금 것과는 상당히 다른 주민등록증. 가로가 아닌 세로로 쓰여 있었고, 그곳에 박힌 사진도 굉장히 오래되어 보였다.
많은 부분이 삭아 있어 글자가 흐릿했다. 앞자리가 11068? 이런 주민번호도 있던가?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이번에는 지폐 칸을 열어 봤다. 그곳에는 서로 엉겨 붙어 떡이 된 지폐들이 보였다. 구 지폐였다. 아니, 내가 생각하는 구 지폐보다 더 오래된 지폐였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지폐를 다시 지갑 안에 넣었다. 그리고 지폐 한쪽 변색한 가죽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종이들을 확인하려 했다. 난 그 종이를 찢듯이 꺼내고, 침침한 눈을 비비며 바라봤다. 그 종이에는 한자들과 한글이 뒤섞인 글자들이 적혀 있었고, 가격으로 보이는 숫자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분명히 그 숫자 맨 아래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71년 8월 2일 신한 상회]
나는 지갑과 종이를 운전석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총을 꾹 부여잡고, 운전석을 도망치듯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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