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정신을 가다듬고 잠시 멍하니 앉아 있자 이곳이 어딘지 생각이 났다. 방범창 아래와 창문들 사이로 포근한 햇빛이 쏟아졌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살며시 몸을 숙여 방범창 밖을 살펴봤다.
흐리던 날씨는 밤사이 지나갔는지 기분 좋은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지만, 더 내리지는 않았다. 고개를 내밀어 주위를 확인하고, 나는 문을 닫으려 방범창을 힘껏 눌러보았다. 하지만 무언가 걸린 듯 방범창은 내려가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자 자재들이 방범창 아래를 막고 있었다. 나는 낑낑거리며 그걸 안으로 당겨서 치우고, 방범창을 힘껏 눌렀다. 그제야 방범창은 작은 소음을 내며 천천히 내려갔다. 철컹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발로 쿠션을 대신했고, 나는 방범창을 완전히 닫았다. 조금 안심이 되었다.
얼굴을 비비며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아직 머리는 지끈거리고, 식은땀이 흘렀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급하게 떠났는지 물자들이 모두 널려 있었다. 이곳까지는 접근하기 힘들었는지 생존자의 흔적은 없었다.
하나하나 상자를 뜯으며 내용물을 확인했다. 대형 마트답게 많은 물품들이 있었다. 나는 가장 물을 찾았고, 물을 찾자마자 황급하게 개봉해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물 반 통을 순식간에 비웠다. 중간중간 사레가 들려 물을 반쯤 뱉어냈지만 나는 물을 목구멍에 쑤셔 넣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통을 거의 다 비워갈 때쯤, 한 모금 정도 남은 물을 얼굴에 뿌렸다. 추운 날씨라 순식간에 냉기가 몰려왔지만, 나는 물로 적셔진 얼굴을 연신 비비며 피로를 떨쳐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입술을 앙다물고 상자를 하나하나 열기 시작했다.
양이 상당했다. 창고에 더 있지 않을까? 식량부터 생수, 그리고 꼭 필요한 생필품들. 없는 게 없었다. 하지만 가방은 하나였고, 가져갈 수 있는 수량은 한정적이다. 나 혼자 온 것이 후회되었다. 일단 통조림류를 담을까 하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어제 일로 느꼈는데, 식량을 구하러 도시까지 나오는 일은 생각보다 더 위험한 일이다. 최대한 많이 담아가야 했다. 그래서 부피가 작은 비스킷 종류를 가방 안에 빼곡하게 담기 시작했다. 그 큰 가방을 부피가 작은 비스킷으로 가득 담자 왠지 마음이 든든했다.
그리고 균형 있는 식사도 중요하다. 부족한 지식에 그래도 비타민이 많은 과일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남은 공간에는 과일 통조림을 빼곡하게 담았다. 부피를 많이 차지하지만 어쩔 수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비타민 약을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가방이 겨우 닫힐 정도로 담았다. 그렇지만 난 욕심을 버리지 못했고, 얇은 노끈을 가져와 가방에 육포 봉지를 대롱대롱 매달았다. 최대한 가져가야 한다는 생각에 참 별짓을 다 했다. 가방을 메어 보자 순간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비스킷이 대부분이라 들지 못할 무게는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주머니에 초코바를 가득 채우고,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연이가 빨리 보고 싶었다.
방범창을 열려고 슬그머니 문 쪽으로 다가가는데, 옆 계산대에서 큰 자물쇠 하나가 보였다. 열쇠는 꽂혀 있었고, 무척이나 견고해 보이는 자물쇠였다. 방범창을 닫으려는 용도가 분명했다. 차마 잠그지는 못하고 도망친 것 같은데, 주인이 상당히 급했나 보다.
나는 손을 뻗어 자물쇠를 잡고 점검해 보았다. 별다른 손상은 없었고, 먼지가 쌓인 걸 제외하곤 문제없었다. 나는 순간 눈을 번뜩이며 잠시 자물쇠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방범창을 천천히 반만 열었다. 그리고 소리가 들리지 않게 조심하고 몸을 밖으로 빼냈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치고, 입김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눈이 발목 위까지 쌓여 있었다. 나는 그대로 뒤로 돌아 방범창을 내리고 닫았다. 그리고 자물쇠로 방범창 입구를 잠갔다. 열쇠는 따로 주머니에 챙겼다. 방범창과 두꺼운 자물쇠를 부수지 않는 이상 들어가지 못한다.
부수는 행위를 하면 커다란 소음이 생겨 그놈들이 몰려올 것이다. 이 열쇠만 있으면, 이 마트는 내 소유였다. 이기적인 행위였다. 이 물자를 독점하려는 나쁜 행위였다. 그런데도 난 망설이지 않았다. 사실 마음속 한구석으로 오히려 든든함을 느꼈다.
나는 바로 차 옆에 달라붙어 주위를 둘러봤다. 인도에 드문드문 있는 그놈들을 보니 굳이 차 밑으로 기어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역시 해가 뜨니까 그놈들 신경은 둔해지고, 활동반경이 좁아진다.
나는 무거운 가방을 꼭 부여잡고 걸음을 옮겼다. 발에 치이는 눈 때문에 걸음은 느렸지만, 오늘 쉼터에 도착할 수 있다는 기대 속에 각오를 다졌다. 난 기쁜 마음으로 순백의 눈 위에 발자국을 남겼다.
차 옆에 딱 붙어서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걸음을 옮겼다. 간혹 그놈들이 보이긴 했지만, 몸을 바싹 숙여 숨죽이고 걸으면, 그놈들은 나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리고 가끔 그놈들이 가까운 거리에 있을 때는 차 밑으로 들어가 열심히 기었다. 인간 바퀴벌레가 된 것 같아서 그 상황에서도 실소가 나왔다.
나는 그렇게 신림로를 빠져나왔다. 밤에는 그렇게 길어 보이던 길은 해가 뜨자 너무나 쉽게 걸어 나올 수 있었다. 나는 허무함을 느껴 신림로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고, 다시 왔던 길을 더듬어 화랑교를 건넜다. 그리고 인기척이 없는 도림천을 멍하니 보며 걸었다. 차가운 강바람이 얼굴과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어제 이 다리를 건넜을 때 남겼던 발자국은 눈이 내려 없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화랑교에는 내 것이 아닌 발자국이 보였다. 보폭이 일정하고 신발을 신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 발자국으로 보인다. 아마 눈이 그치자마자 이 다리를 건넌 모양이었다.
가끔 이 도시를 걷다 보면 나 혼자 표류하는 기분이 들었는데,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이 회색 콘크리트 정글에서 그들도 나름 그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괜한 상념에 빠져 걸음을 멈췄지만 이내 다시 걸어갔다.
무리한 여파가 오는지 몸이 아파져 온다. 피곤 때문에 몸이 덜덜 떨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식은땀을 칼바람이 식혀 줄 때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져 왔다. 그런데도 나는 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아프다고 어리광부릴 사람도 없었다. 힘들다고 하소연할 사람도 없었다. 그냥 하염없이 참으며, 걷고 또 걸어야 한다.
다리를 건너고 8길을 지났다. 익숙한 길들이 보였다. 그녀가 뛰어내린 그 오피스텔도 지나갔다. 핏자국은 어느새 눈이 지워 버렸고, 그날의 기억도 전부 눈이 지워 버렸다. 눈이 내 악몽마저 지워 주길 바라면서 눈을 꼭 감고 그 길을 지나갔다.
익숙한 길에 들어서자 마치 2회차 게임을 진행하듯 능숙하게 그놈들을 피해 지나갔다. 그놈들은 낮이 되면 항상 자신들이 있던 자리로 돌아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거나 소리를 기다린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들리지 않는 말을 중얼거리며 서 있는 게 오싹하고 무서웠다. 만약 그놈들에게 가깝게 다가갈 기회가 있으면 꼭 들어보고 싶었다. 도대체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오피스텔 앞을 지나고, 허탕을 쳤던 편의점을 지난다. 그리고 걸음을 계속 옮겨 진수와 이혜인 남매를 만났던 편의점을 지나갔다. 익숙한 공사장을 지나쳤을 때는 이제야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마음에 긴장이 살며시 풀렸다.
조금만 걸어가면 채연이를 만난다. 무거운 짐을 고쳐 매고,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순간 깜짝 놀라며 걸음을 멈춘다.
선명한 발자국들이 정면에 보인다. 저 멀리서 온 듯 천천히 이곳으로 향한 발자국들. 소름이 천천히 끼쳐 나는 총을 꽉 부여잡고, 침을 삼켰다. 그냥 지나가는 생존자겠거니 생각하려 했지만, 몸을 경직시키는 긴장감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쉼터로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발자국들은 나랑 점점 동선이 비슷해지고 있었다. 적어도 10명이다. 이 많은 발자국은 분명히 10명이 넘었다. 그 생각에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정신이 아득하니 멀어지고, 나는 그 무거운 가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자취를 좇았다.
산 초입에 들어서야 나는 확신했다. 이들은 이 산으로 들어왔다. 눈에 찍힌 발자국을 만져 보자 주위가 완전히 얼지 않았다. 이곳을 지나간 지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생각에 나는 늦지 않기 위해 정신없이 뛰었다. 그러다 뛰는 데 방해가 되는 가방을 등산로 옆으로 내던졌다.
나를 지켜보고 있던 걸까? 이 많은 인원이 이곳으로 오는 이유가 뭐지?
무거운 총을 들고 한참을 뛰었다. 숨이 턱 하고 막히며 피곤한 몸이 그만 주저앉으라고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데도 멈추지 않았다. 채연아, 채연아. 채연아! 나는 입속으로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쉼터로 달려갔다.
드디어 저 멀리서 쉼터가 눈에 들어왔다. 내린 눈으로 가득한 근방은 너무나 고요했다. 나는 침을 삼키고 길옆에서 벗어나 구조물에 숨었다. 그리고 발자국을 눈으로 좇으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총에 안전장치를 푼다. 그리고 착검 된 대검을 흔들어 꽉 고정되어 있는지 다시 확인한다.
그리고 쉼터 근처 구조물에 숨어서 머리를 내밀었다.
사람들이 보였다. 총을 들고 군복을 입은 군인이 4명. 흰색 가운을 입은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 그리고 저 멀리 사복을 입은 사람들 5명. 누구지? 뭐지? 목적이 뭐지? 그리고 시야를 천천히 옮기자 흰색 가운을 입은 여자는 담요를 덮어쓴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언가 대화를 하는 듯 입이 열리고, 조용하게 말소리가 들려왔다. 더 가깝게 다가가 시야를 좁히자 그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혜인과 진수 남매다. 담요를 덮어쓰고, 그들과 이야기 하고 있다? 저들과 왜? 설마 구조대? 나는 정신이 확 밝아지는 게 느껴졌다.
깨끗한 복장과 준수한 무장. 그리고 우리 일행을 향한 호의적인 태도.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급히 채연이를 찾았다. 채연이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강수련 품에 안겨 있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이 보였다. 채연이를 안은 강수련은 불안한 듯 연신 쉼터와 그들 주위를 어슬렁어슬렁했다. 정면에서 바라본 얼굴은 멀리서도 불안해하는 게 보였다.
나는 천천히 숨어 있던 구조물에서 나왔다. 구조대, 구조대가 왔다. 머리에는 불안해하는 강수련 때문에 의문이 가득했지만, 나는 합리화하듯 그 불안한 생각을 떨쳐 냈다. 그만큼 나는 구조라는 상황을 간절하게 희망했다.
채연이가 안전한 곳으로 갈 수 있다. 다른 아이들처럼 지내게 할 수 있다. 배고픔과 두려움에 울지 않아도 된다. 나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군인들은 빠르게 나에게 총을 겨눴다.
나머지 사람들도 내가 나오자 깜짝 놀란 듯 나를 바라봤다. 군인들은 나에게 외쳤다. ‘총 버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총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조금 크게 그들한테 외쳤다.
‘구조대입니까?’
‘우리를 구하러 온 겁니까?’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손을 들었다. 그들은 내가 저항하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이자 군인들은 총구를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그들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기쁨이 몰려와 입으로 연신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그 순간,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사람이 맞아요.’
저 멀리서 나를 바라보던 이혜인의 입이 열렸다. 군인들은 총을 일제히 나에게 겨눴다.
‘저 사람이 군인을 죽였어요.’
말이 비수가 되어 나에게 꽂힌다. 나는 찌르르 울리는 가슴에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채연이는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며 나에게 다가오려 손을 뻗었고, 강수련은 울부짖으며 총을 든 군인들을 말렸다.
‘아니에요! 저 사람은!! 제발…….’
강수련이 울부짖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마치 죄책감의 폭탄이 터지기라도 한 듯 이명이 들려왔다. 정신이 천천히 절망 속으로 가라앉는 게 느꼈다. 그동안 속에 숨겨두었던 자기비하가 물밀듯 솟구쳐 올라온다.
이혜인을 향한 미움이 몰려온다. 아니 그 미움마저 나에게 향하는 역겨움으로 변한다. 난 우리를 지키기 위해 살인을 했다는 변명조차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 군인은 총알이 있었음에도 나를 쏘지 않았으니까. 내가, 내가 그런 사람을 죽인 거니까!
구조대가 있다면 아직 정상적인 사회도 존재한다는 의미겠지. 그 정상적인 사회에서 나는 범죄자에 불과하겠구나. 회색 정글에서 빠져나온 나는 이들의 눈에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와 다른 사람, 윤리가 없는 자.
저들 눈에는……. 난 살인자다.
나는 죄를 지었다. 나는 사람을 죽였다. 법에서 벗어난 일을 저질렀고, 그런데도 사람들 사이에서 살려고 했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이혜인에게 욕을 뱉을 수도, 입을 열어 변명하지도 못했다. 그동안 당당하다 애써 위안했는데, 다시 마주한 일상 앞에 난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답답했다. 억울했다. 근데 그 억울함 마저 비겁하다고 느껴졌다.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나와 볼을 적셨고, 총구가 날 겨누고 있음에도 난 울음 말고는 아무것도 내뱉지 못했다.
군인이 들고 있는 총구 하나가 번쩍였다. 소음기 발사음이 귀를 찌르고 지나갔다. 그리고 정신이 천천히 멀어졌다. 삐이이 울리는 이명 사이로 울면서 비명을 지르는 강수련이 보였고, 나를 경멸하듯 바라보는 사람들도 보였다.
그리고 채연이는 그날 부모가 죽을 때와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울고 있었다.
아,
시야가 천천히 어두워진다.
* * *
“머리 맞춘 거 맞아?”
“신병이 쐈지 말입니다.”
군인은 침을 뱉으며 총구를 내려놨다. 그리고 조금 짜증 난다는 얼굴로 비명을 지르는 강수련을 바라봤다. 이전까지 보여 줬던 상냥한 모습을 사라져 있었다.
“빨리 끌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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