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산을 완전히 내려오자 눈은 더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시야가 천천히 좁아지고, 머리와 몸에 달라붙는 눈 입자가 체온을 서서히 떨어뜨린다. 손에 입김을 불어 추위를 녹여 본다. 그래도 점점 차가워지는 손가락 끝을 입으로 잠시 물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하루 머물렀던 공사장을 지나고, 또 진수 이혜인 남매를 만났던 편의점을 확인한다. 안을 들어가 보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모든 물품이 털려 있었고, 사람 발자국이 가득했다. 역시 남은 생존자들이 존재했다. 내가 숨겨 둔 핫팩과 라면은 어떻게 찾았는지 모두 없어져 있었다. 그때 그냥 가져올 걸 몹시 후회된다.
그리고 난 편의점이나 슈퍼를 찾아 분주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편의점을 발견할 때마다 반가운 마음으로 문을 열었는데 역시나 전부 털려 있었다. 나는 비참한 마음으로 잔뜩 어질러진 편의점 내부에서 펜과 종이만을 몇 개 챙겼다.
생존자가 아직 많이 남아 있음을 알려 주는 현상이었지만, 난 딱히 반갑지 않았다. 괴물들 사이에서 우리들도 이제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에게 생존자와의 접촉은 그놈들과의 접촉만큼이나 위험했다.
중간중간 걸음을 옮기는 내내 그놈들을 멀리서 발견한다. 그놈들을 발견하는 것에 요령이 생기기 시작하자 그놈들을 피해서 가는 횟수도 적어지고 이동하는 속도도 빨라진다. 그놈들 대부분은 해가 떠 있는 시간에는 굉장히 수동적으로 변한다. 가만히 서서 소리만 들려오길 기다리는 듯 내가 저 멀리서 걸어가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노련한 생존자 대부분도 이런 사실을 아는 것 같다. 그렇기에 이렇게 빠르게 근처의 편의점들이 털리는 거겠지. 하필 인구가 적은 지역도 아니라 그 속도가 더 빠르다. 난 허탕을 치면 칠수록 마음이 조급해짐을 느꼈다.
해가 진 이후만 조심하면 된다. 불안해하지 말자.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간혹 허공에 손을 휘적거리는 놈들도 보였는데, 처음에는 깜짝 놀라 멈추고 놈들을 관찰했다. 아마 허공에 내리는 눈을 보고 반응을 하는 것 같았다. 그놈들은 생각보다 단순했고, 시야가 상당히 짧은 듯했다.
4번째 편의점을 발견하고 허탕을 쳤을 때, 나는 그 자리에 잠시 앉아 고민했다. 생존자가 생각보다 많은 듯했다. 이럴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편의점이 털리는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 이 많은 물품들을 다 어떤 수단으로 가져가는 건지 의문마저 든다. 꼭 단체로 가져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심지어 초코바 하나 흘리지 않는다. 편의점 창고 내부까지 전부……. 1km 반경을 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난 수상한 기분을 지우기 힘들었다. 괜히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식량을 구하는 기간이 길어질 것을 예감했다.
나는 편의점 천장을 바라보며 피곤이 섞인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조금 더 멀리까지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도림천을 건너기로 결심했다. 난 출발하기 전에 편의점 계산대 밑에 쭈그리고 앉아 잠시 몸을 녹였다. 챙겨온 핫팩을 열심히 흔들어 주머니에 넣고, 얼굴에 비비기도 하다가 마지막에는 속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열심히 손으로 옷에 묻은 눈을 털었다.
차갑게 식었던 몸이 녹자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끌고 편의점 밖을 나섰다. 그리고 편의점 밖을 나서자마자 너무나 갑작스럽게 첫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여보!’
여성의 비명이 바로 편의점 옆 건물 오피스텔에서 들려왔다. 나는 너무나 큰 소음에 본능적으로 바닥에 몸을 숙였다. 소음은 그놈들을 끌어들인다. 머릿속에서 빨간불이 연신 울리며 내 이성을 하얗게 불태운다. 예상도 못 한 상황이라 나는 어쩌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잔뜩 굳어서 멈춰 있었다.
소리가 들린 오피스텔 6층 베란다. 그곳에선 안쪽 문이 열리며 한 여성이 뛰쳐나왔다. 고막을 찢듯 울리는 비명은 내 뇌리를 타고 흘렀다. 거칠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부여잡고, 그 오피스텔을 바라보자 베란다로 뛰쳐나온 여성은 서둘러 베란다 안쪽 문을 닫았다.
그리고 입을 막고, 가늘게 떨며 방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절망적인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깨고 부수고, 그놈들이 내뱉는 괴성이 들려왔다. 나는 본능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편의점으로 다시 들어갈까? 아니면 뛰어서 도망갈까?
나는 다급하게 사방을 둘러봤다. 지금 도망치기에는 늦었다. 이미 이 소리를 들고 몰려올 그놈들을 생각하니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난 사방을 둘러보다 내 옆에 있는 차를 발견했다. 그리고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엎드려서 차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쌓인 눈을 헤치고 차 밑으로 들어가자 다시 여성의 긴 비명이 들려왔다.
‘여보!!!’
추측하건대 방안에서 여성의 남편이 그놈들과 싸우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동안 그놈들에게 먹히던 사람들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그걸 목격했던 그 순간이 어쩌면 나에게 트라우마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만 오면 몸이 굳고,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한참 동안 여성이 지르는 비명과 안쪽에서 내지르는 남성의 고함이 들렸다. 그리고 이내 남성이 내뱉는 단말마가 싸늘한 도시를 차갑게 가로지른다. 여성은 남편의 죽음을 확인했는지 짧은 비명을 질렀고, 이내 비명은 멈췄다.
그렇게 깨고 부수는 소리가 천천히 사그라지고, 이내 여성이 우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나는 눈을 감고 총을 꽉 끌어안았다. 턱 막히는 숨을 연신 몰아쉬며 바싹 말라가는 입술을 천천히 핥았다. 그놈들은 남자를 포식하고도 아직 부족한지 베란다 문을 연신 때렸다. 유리가 깨지기 시작하는 소리가 들린다. 여성은 소리를 지를 힘도 없는지 조용히 울음소리만을 내뱉었다. 그리고 비명을 들었는지 저 멀리서 이곳으로 달려오는 그놈들의 발소리와 성대를 찢는 듯한 괴음이 들려왔다.
콘크리트 바닥을 맨발로 밟으며 두두두 뛰어오는 소리에 나는 침을 삼켰다. 이내 차 밑으로 그놈들 발이 빠르게 스치듯 지나갔다. 그리고 그놈들이 내뱉는 이상한 괴음이 내 머리를 짜르르 울렸다. 그놈들은 굉장히 기뻐하고 있었다.
포식에 대한 기쁨일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 혀를 잘라 놓은 듯 괴상하고 숨이 넘어가는 소리에 나는 피부가 오싹해 숨을 참았다. 아니 그냥 숨이 턱하고 막혔다. 바로 근처에서 그놈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차 밑 안쪽으로 더 몸을 옮겨 그림자에 완전히 몸을 숨겼다. 차 밑은 싸늘하고 추웠다. 나는 눈을 감고 이 악몽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갑자기 모든 소음이 멈췄다.
난 모든 소음이 갑작스레 멈추자 의아함을 느끼며 질끈 감은 눈을 살며시 뜬다. 그리고 시선을 차 밑에서 보이는 풍경 쪽으로 옮긴다. 그리고 난 바닥에 머리부터 떨어지는 여성과 눈을 마주쳤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녀의 맑은 눈은 차 밑에 숨어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철퍼덕, 바닥에 고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다시 눈을 감고 뜨자 내 눈앞에 피투성이가 된 덩어리 하나가 보였다. 결국, 그녀는 자살을 선택했다. 한 사람이, 한 인간이 또 그저 정육점에 걸린 고깃덩어리가 되었다.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제대로 정의하기 힘들었다. 모든 복잡한 감정이 한곳으로 뒤엉켜 나오는 감정의 응어리가 토하듯 속에서 솟구쳐 나왔다. 나는 꺽 올라오는 울음을 손으로 막고 눈물을 흘렸다. 차가운 볼 위로 끊임없이 눈물이 쏟아진다.
베란다에서 몸을 던진 그녀는 내가 숨어 있는 차 앞에 떨어져 있었다. 기이하게 꺾인 목과 팔다리. 그런데도 그 맑은 눈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운 좋게 즉사했는지 고통을 호소하거나 의식이 있지는 않았다. 그저 영혼이 빠진 듯 공허한 눈으로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그녀가 죽음 앞에서 마지막으로 본 광경은 차 밑에 겁쟁이처럼 숨은 나의 모습이었다. 놈들은 바닥에 떨어진 그녀를 보고 기쁨의 괴성을 질렀다. 그리고 피라냐처럼 달려들어 서로를 밀치고 밟으며 그녀를 포식한다. 난 차마 눈을 감을 수가 없어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보았다.
그녀가 뼈까지 먹혀 이 세상에서 지워진다. 그리고 그놈들은 포식을 다 끝냈는지 천천히 흩어진다. 핏자국과 고기 조각만을 남긴다. 그리고 그 위에 눈이 쌓이면, 그녀가 있었다는 증거는 이 도시에서 천천히 사라진다.
주위에서 창문들이 닫히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린다. 난 고개를 숙여 바닥에 얼굴을 묻는다.
* * *
나는 멍하니 눈이 쌓이는 걸 바라봤다. 핏자국은 어느새 눈이 쌓여서 사라지고 있었다. 아마 한 시간 정도 흘렀을까, 몰려오는 추위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빠르게 눈을 두어 번 감고 뜬다. 이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때가 돼서야 미약하게 내뱉던 숨을 다시 거칠게 내쉬었다.
그리고 조용히 쌓인 눈을 치우고, 머리를 차 밖으로 내밀어 밖을 확인했다. 앞과 뒤, 그리고 정면을 흐릿한 시야로 확인한다. 놈들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는지 멀리 보이는 놈들을 제외하곤 보이지 않았다.
나는 눈을 헤치고 차 밑에서 기어 나왔다. 그리고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편의점 앞쪽으로 열심히 기어갔다. 온몸에 눈이 묻고 몸은 차갑게 굳었지만, 난 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핏자국이 되기 싫었다. 그녀를 동정하지만, 그녀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편의점 입구 앞까지 기어가 양손으로 힘껏 편의점 문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기어서 계산대 밑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총과 가방을 끌어안고, 계산대 안에서 멍하니 숨을 고르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핫팩을 꺼내 보았지만 이미 물에 푹 젖어 있었다. 난 신경질적으로 핫팩을 계산대 아래로 내던지고 가방을 열었다. 가방의 겉은 축축했지만, 안쪽은 다행히 젖지 않았다. 혹시 몰라 더 챙겨온 핫팩 하나를 꺼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열심히 흔들었다.
그리고 얼굴과 손, 그리고 온몸에 비볐다. 지나친 긴장감 때문에 목이 마르고 허기가 올라왔다.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란 안일한 생각에 핫팩을 제외한 물품을 챙겨오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핫팩을 품속에 넣으며 몸을 녹이는 데 집중했다.
밖을 살짝 바라보고 편의점 한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하지만 시계는 멈췄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밖도 흐린 날씨 때문인지 시간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때아닌 변수 때문인지 시간을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도림천을 건너는 사이에 해가 지면 어쩌지? 하지만 여기서 밤을 지낼 수 있을까? 나는 차가운 총을 꼭 끌어안고 생각에 빠졌다. 눈에 젖은 옷이 내 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여기서 그냥 잠이 들고 싶다. 이대로 몸을 녹이고 쉬고 싶다.
일어나 움직여야 하는데, 여기서 빠져나가야 하는데……. 하지만 난 몰려오는 수마를 막지 못하고,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감자 추위도, 피곤함도, 공포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대로 영원히 잠이 들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고통도, 고뇌도, 무거운 짐도 모두 아지랑이처럼 사라지지 않을까.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맴돌던 기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불길 속에 사선을 넘으며 뛰고 있는 내 모습이 아른거린다. 그리고 내 작은 단칸방이 보인다. 또 시야가 반전되더니 차 밑에서 떨고 있는 채연이의 모습이 보인다. 채연이를 끌어안는 강수련, 가방으로 괴한을 미는 진수. 여전히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이혜인. 나를 원망하듯 바라보던 괴한의 모습. 그리고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군인.
모든 것이 물에 잠기듯 천천히 수면 속에 파묻혔다. 나는 무의식 안에서 끌어당기는 흐름을 따라 바닥에 천천히 가라앉는다. 철퍼덕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눈앞에는 사지가 이리저리 꺾인 여자가 보인다. 나와 눈을 마주치며 죽어가던 그녀는 나와 그렇게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그녀의 입이 열린다.
‘…….’
뭐라고?
‘…….’
잘 안 들려.
아,
마치 해일처럼 찬 기운이 나에게 몰려왔다. 심해, 저 깊은 곳으로 끌려가는 기분에 아득함을 느끼며,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구역질과 함께 기침이 나와 나는 바닥에 얼굴을 박고 거칠게 기침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기침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본능처럼 입을 막았다.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마른기침이 손바닥에 막혀 천천히 편의점 내부에서 흩어진다. 그리고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잔 거지?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거지? 나는 자책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밖을 바라봤다.
아까보다 더욱 어두워 있었다. 안전하지 못한 장소다. 주위에 널려 있을 그놈들이 밤에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 난 여기서 밤을 보내지 못한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야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계산대를 박차듯 나왔다.
완전히 해가 진 건 아니다. 황혼이 다가온 듯 주황빛이 저 멀리 걸쳐 있기는 했지만 이동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아니, 난 그저 그렇게 이 상황을 합리화했다. 나는 조금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놈들이 없는 방향으로 도림천을 건너야 한다.
표지판을 연신 확인하면서 도림천을 시야에서 때지 않고 걸었다. 간혹 보이는 그놈들은 피해서 지나가고, 가끔 한곳을 향해 멍하니 걷는 그놈들은 잠시 차 밑으로 들어가 지나가길 기다린다. 천천히 걸음에도 땀이 폭포처럼 내리고, 허기와 목마름에 점점 지쳐갔다. 그리고 표지판을 확인한다. 신림로 8길.
양쪽에는 고시원 건물과 작은 주택단지들이 가득했다. 어두워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그놈들이 점점 민감해지는 게 느껴졌다. 8길을 지나자 갈림길은 없었다. 나는 그대로 신림로로 진입했다. 밀집 지역은 빠져나왔는지 양쪽에는 차고지와 상가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으로 향할까 하다가 중간에 몰려 있는 그놈들 때문에 접근하지 못했다.
나는 결국 정면에 보이는 화랑교를 건너 도림천 아래로 내려가기로 했다. 아니 나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그리고 도망갈 방향도 힘도 없었다. 나는 발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신발을 벗었다. 이제부터 뛰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했다.
해는 완전히 경계 위에 걸린 듯 어두워지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나는 신발을 한쪽 손에 들고 재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발이 터질 듯이 아팠고, 차가운 눈에 양말을 적셔 감각을 서서히 뺏어갔다. 하지만 눈 위에서 신발을 벗은 보람이 있는지 발소리는 크게 울리지 않았다.
터질 듯한 심장을 부여잡고, 갈증과 허기를 참으며 필사적으로 화랑교를 건넜다. 확실히 다리를 건너자 건물 밀집도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화랑교를 건너자 바로 보이는 것은 꽤 큰 도로였다. 황급히 표지판을 확인하자 신림로 11길이라 쓰여 있었다.
큰길에는 차가 빼곡하고 촘촘하게 서 있어 더는 뛰지 못했다. 잠시 차 옆에 기대 숨을 고르고 주위를 둘러봤다. 역시나 그놈들은 아까와는 다르게 활발해진 움직임으로 이곳저곳을 걸어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놈들의 눈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빠르게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방황하던 나는 결국 해가 지기 전에 은신처를 찾지 못했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머리는 복잡했고 혼란스러웠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차바퀴를 잡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번개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기억에 나는 본능적으로 차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온 세상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일단 차갑게 식은 발을 손으로 비비며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차 밖에 살짝 머리를 내밀어 살폈다. 해가 지자 세상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붉은 눈들이 주위에 빼곡했다. 나는 참담함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다시 차 밑으로 들어가 생각했다. 이렇게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하는 건가? 그러다 그놈들에게 발견이라도 되면? 운에 맡겨야 할까? 나는 혹시나 내 숨소리가 들릴까 숨조차 편하게 내뱉지 못하고, 그렇게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그리고 생각에 빠졌다. 마치 우주 속에 나 혼자 남겨진 듯 어두운 도시는 나를 천천히 압박했다. 무서웠다. 두려웠다. 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총을 꼭 잡고 앞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내 눈앞에 차바퀴가 보였다.
그리고 순간 기발한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까 보았던 이 길은 차로 빼곡하다. 마치 주차장처럼 앞뒤 간격도 좁았다. 나를 방해하듯 앞을 막던 차들은 어느새 내 활로가 되어 있었다.
나는 차 밑에서 옆과 앞을 살피며 조용히 기기 시작했다. 지금 차 밑에서 앞에 있는 차 밑으로 열심히 기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계속해서 기어도 차 밑이었다. 나는 터널을 지나가듯 차로 만들어진 터널은 기고 또 기었다. 그놈들이 내뱉는 괴음과 발이 보일 때마다 멈춰서 그놈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인내심과 한참을 싸우며, 난 서서히 전진하고 있었다.
온몸이 피곤하고 추웠다. 목이 바싹 말라왔다. 하지만 난 참고 또 참았다. 그렇게 두 시간을 멈췄다가 기어가기를 반복하다가 어디쯤 도착했는지 차 아래에서 머리를 내밀어 확인했다. 그러자 매우 운 좋게도 눈에 확 띄는 큰 간판이 보였다.
웰빙마트
오래되어 보이는 촌스러운 간판. 급하게 피난을 간 건지 방범창을 닫다가 말았다. 아래가 살짝 열려 있는 마트는 마치 나에게 오라고 손짓하는 듯했다. 주위에 그놈들이 전부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놈들이 저 멀리 걸어가자 나는 빠르게 기어 마트 방범창 아래로 들어갔다.
어두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손을 뻗어 벽을 더듬으며 열심히 기었다. 그리고 이내 마트 안쪽에 들어온 걸 확신하고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벽에 등을 기댔다. 완전한 어둠 속에 나는 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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