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17화 (17/313)

[17]

땅을 박차는 찰나의 순간. 총구는 내 머리를 향하고 있었고, 총구를 마주한 내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시간은 천천히 흐르고, 시야가 좁아진다. 난 지금 죽음과 마주하고 있을 텐데 이상하게 실감이 가지 않는다. 내 눈에는 그놈만이 보였다.

놈은 내가 중간까지 왔음에도 총을 발사하지 못했다. 도박이 성공한 것이다. 내 몸은 짧은 환희를 느끼며, 창을 잡은 손에 힘을 가했다. 그놈은 내가 총 앞에서 달려들지는 몰랐다는 얼굴로 잔뜩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그 짧은 거리. 그리고 짧은 시간이 너무나 길고, 느리게 느껴졌다. 한 걸음 한 걸음을 사력을 다해 박찬다. 마치 물속에서 움직이는 이 기분, 내 몸을 천천히 옥죄는 이 저항감은 내 몸을 타고 흐르는 두려움이었다.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내가 죽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두려움.

난 역겨움과 죄책감이란 저항을 이겨내고, 입으로는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그리고 정확하게 상대의 목을 노리고 창을 내질렀다. 어설픈 양심이 내 손을 잡아끌었지만, 난 망설이지 않았다. 그놈은 당황한 얼굴로 얼떨결에 손과 총을 들어 자기를 방어한다.

내 창날은 목을 뚫지 못했고, 그놈의 총은 내 창을 막지도 못했다. 창은 정확하게 그놈 오른손을 반쯤 관통했다. 창날이 오른손을 관통하자 그놈은 잠시 꿈을 꾸는 듯 멍한 눈으로 나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그 꿈이 악몽이 아닌 현실임을 알았을 때, 놈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앳된 얼굴이다. 끽해야 20대 초중반이겠지. 원래는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동생, 그리고 누군가의 남자였을 것이다.

그런데 난 비명을 지르는 군인에게 꼭 묻고 싶었다. 혹시, 혹시! 총알이 있었다면, 넌 안 쐈을까? 내 창날이 그놈 손을 관통하자 난 창을 놓았다. 그리고 그놈 품으로 달려들어 주먹으로 강하게 얼굴을 갈겼다. 피가 터진다. 그놈은 쓰러지고, 난 그 위로 올라탄다.

주먹을 꽉 쥐고, 그놈 얼굴을 연달아 강타한다. 피가 터지고, 코뼈가 부러진다. 순간 그놈과 눈이 마주쳤다. 살려달라고, 그만 때려달라고, 그는 눈빛으로 나에게 애원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그놈 귀에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놈은 더는 반항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난 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폭력을 멈추는 순간, 상대가 돌변할지도 모른다는 인간 불신과 공포심이 몰려왔다. 사람을 때리면 안 된다.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 그동안 당연한 것처럼 머리를 채우고, 있던 윤리와 도덕이 조금씩 마모되어 부서진다.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팠다. 머리에서 보내는 거부 반응에 눈물이 질질 흘렀고, 숨도 턱 막혀온다.

손이 떨린다. 그놈은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며 흐릿한 정신을 부여잡고 나를 쳐다봤다. 나는 주변을 손으로 더듬거렸다. 그리고 주먹에 잡히는 무언가를 손으로 꽉 쥐었다. 주먹 안에 가득 들어오는 돌멩이.

나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다시 놈을 내려다보며 돌로 그의 머리를 내려쳤다. 손끝으로 무언가 부서지는 느낌이 손끝을 타고 흘러들어 왔다. 역겨움과 거부감이 몸을 찌르르 찌르지만, 난 멈추지 않고 한 번 더 내갈겼다.

그놈의 단말마는 매우 여리고 작았다. 놈은 분명 죽음의 문턱에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엄마.’

* * *

‘아저씨! 그만 해요! 죽었어요! 그 사람!’

내 몸을 잡는 느낌에 정신을 차렸다. 얼마나 내려쳤는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귀가 먹먹하고, 숨이 너무나 거칠었다. 내가 흘린 눈물과 콧물로 입술이 짭짤했다.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진수는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숨을 훅 내뱉고, 주먹에 꽉 쥐고 있던 돌을 떨어트리듯 내려놓았다. 손을 펴 바라보자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눈앞에 그놈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얼굴이 뭉개져 있었다. 그리고 확실하게 숨이 끊긴 듯 놈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에 힘이 없었고, 정신은 아득했다. 불어오는 칼바람에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멍한 눈으로 시체를 잠시 바라봤다.

‘아저씨…….’

진수는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진수를 바라보자 진수는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비틀거리더니 이내 힘없이 바닥에 앉았다. 나는 진수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군인이 몸에 지니고 있던 모든 걸 때어놓기 시작했다.

완전한 군장은 없었지만, 군복 주머니나 탄띠를 하나하나 열어 무엇이 있나 확인하고 모두 꺼냈다. 탄이나 다른 무기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소지하고 있던 편지 봉투와 군용 플래시. 그리고 탄띠 왼쪽에 붙어 있는 대검 집을 빼냈다. 그리고 천천히 대검을 꺼내보았다. 날이 서 있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대검을 대검 집에 다시 넣었다. 그리고 빼낸 물건을 모아 둔 곳에 툭 하고 던졌다. 그리고 시체의 양발을 잡고 질질 끌었다. 피 냄새가 난다. 시체를 처리해야 한다. 그 생각밖에 없었다.

‘꼭……. 꼭 죽여야 했어요? 쫓아 보내면 되잖아요…….’

시체를 끌고 밖으로 향하자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곳에선 이혜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잔뜩 떨리는 손과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꼭 죽여야 했을까? 나는 자신에게 그렇게 되물었다. 그리고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난 그녀에게 대답해 주지 못했다. 나는 느린 걸음으로 시체를 끌고 밖으로 향했다. 그놈들이 주위에 있나 없나 하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흐릿한 정신으로 움직이지 않으려는 몸을 억지로 움직이며 시체를 끌었다. 그러자 나는 어느새 우리가 전에 머물렀던 공용 화장실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시체를 다시 끌고 와 붉은 발자국으로 도배된 화장실 안쪽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화장실을 나와 다시 쉼터로 돌아왔다.

이혜인과 강수련은 쉼터 내부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진수만이 펌프 앞에서 멍한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 펌프를 움직여 물을 틀었다. 그리고 차가운 물로 손을 씻었다.

진한 피는 물을 만나 느리게 씻겨 내려갔다. 나는 이내 물을 양손으로 한껏 받아 얼굴을 적셨다. 진수는 나에게 무언가 말하고 싶은 얼굴로 내 옆에 서 있었다. 나는 애써 그를 무시하고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 군인이 가지고 있던 봉투와 대검, 그리고 플래시와 총을 챙겼다. 그리고 느린 걸음으로 쉼터 안으로 들어갔다. 쉼터에 들어오자마자 내 다리에 묵직한 느낌이 느껴졌다. 보나 마나 채연이가 분명했다. 난 손으로 그런 채연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총과 물건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채연이는 울고 있는지 한쪽 다리가 축축했다.

나는 그런 채연이를 품에 안아주었다. 채연이는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숨죽여 울면서 내 품에 안겼다. 그리고 자리 앉자마자 눈앞에 물병이 보였다. 고개를 올려보니 강수련이 나에게 물병을 내밀고 있었다.

한쪽 얼굴이 붉게 변한 게 꽤 강하게 맞은 거 같았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 물병을 받아 입으로 가져갔다. 차가운 물이 목을 지나 속으로 들어가자 작은 한기가 손끝까지 느껴졌다. 차가운 온기와 차가운 물. 그리고 이제는 차갑게 변해 버린 마음이 씁쓸하게 기분을 난도질한다.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진수도 쉼터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적당한 시간이 되자 통조림과 비스킷을 일행들에게 나눠 줬다. 그리고 나는 군인 몸에서 나온 물품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채연이가 따라오려고 했지만, 난 강수련에게 채연이를 부탁하고 혼자 화장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변기 위에 올라가 앉았다. 그리고 봉투를 열어보자 약간의 돈과 종이들 그리고 낡은 편지지가 몇 개 있었다. 편지를 하나하나 곱씹어 읽었다. 그에게 온 편지도 있었고, 가족들에게 보내려고 했는지 그가 쓴 편지도 있었다.

나는 숨죽여 소매를 물고 오열했다. 그에게도 엄마가 있었고, 착한 여동생이 있었다. 그리고 그도 나처럼 이 상황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엄마가 보고 싶어요. 아버지도 보고 싶어요. 나는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 그리고 곧 집에 갈게요. 보내지 못한 편지는 그렇게 흔적만을 남겼다. 그는 괴물이 아니었다.

탄창을 열자 총알 3발이 있었다.

괴물은……. 괴물은 나였다.

* * *

늦은 밤까지 일기를 쓰다 일어나니 어느새 해가 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일행들도 피곤했는지 전부 누워서 잠에 빠져 있었다. 놈에게 맞은 곳은 괜찮을까? 혹시 맞은 몸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남매와 강수련을 유심히 살폈다.

진수는 조금 부어오른 얼굴로 잠에 빠져 있지만, 고통을 호소하지는 않았다. 강수련과 이혜인도 마찬가지. 채연이는 강수련 품속에서 손가락을 물고 곤히 잠이 들어 있었다. 나는 일행이 일어나면 먹을 음식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빠르게 줄어드는 식량에 나는 씁쓸한 입맛을 다신다.

난 몰려오는 갈증에 물 한 통을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일행이 깨지 않게 살금살금 걸어서 군인 시체에서 챙겨온 대검 집을 들고 쉼터 문을 열었다. 이제는 버릇처럼 주위를 둘러봤다. 여전히 쉼터 근처는 조용했다. 나는 문을 닫고 느린 걸음으로 물 펌프 앞으로 향했다.

핏자국은 진수가 지웠는지 물 펌프 근처는 어제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사실 실감이 가지 않는다. 그냥 끔찍한 악몽을 꾸었던 것 같았다. 나는 물 펌프를 움직여 물을 틀고 세수했다. 차가운 물이 피부에 닿자 흐릿했던 정신이 조금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싸늘한 공기가 젖어 있는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숨을 훅 내뱉자 입에서 나온 입김이 허공에서 흩어진다. 위를 바라보자 하늘이 흐리다. 꼭 눈이 올 것만 같다. 눈이 오고 날씨가 더욱 추워지면 활동하는데 제약이 생긴다.

세상은 우리가 빨리 죽길 원하는 것 같았다. 절망적인 상황만 계속되고, 문제는 꼬리를 물듯이 찾아온다. 절망이란 늪에서 발버둥을 치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시큰하게 아려왔다. 난 앉은 자리에서 대검 집을 꺼냈다. 그리고 대검을 꺼내보았다.

날을 손으로 쓸어보자 역시나 뭉툭했다. 하지만 견고함이 외관상에서 확연하게 느껴졌다. 날을 갈아야겠다는 생각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 십분 가량을 돌아다녔을까. 이 세족 장을 만들 때 딸려온 것으로 보이는 사암 조각을 찾았다.

시중에서 파는 숫돌과 비교하면 형편없었지만, 이것도 감지덕지다. 난 그 자리에 앉아서 한참 동안 날을 갈았다. 물을 조금씩 뿌려가며 전체적인 날을 갈다가 이내 포기하고, 날 끝부분만을 계속해서 갈았다. 무언가를 찌르기 위해 칼끝을 갈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어제 일이 생각나 마음이 복잡했다.

난 쓴 물을 계속 삼키며 날을 가는 데 집중했다. 싸늘한 칼바람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차가운 물 때문에 손끝에 감각이 천천히 무뎌질 때쯤 나는 칼날 끝에 손을 베였다. 작게 피어나는 피 봉우리. 나는 반사적으로 베인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 물고는 천천히 대검을 들어 올렸다. 어설프지만 나름 날카로운 날이 보인다.

쉼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쉼터를 바라보자 강수련이 졸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밑에선 채연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나는 대검을 옷으로 깨끗하게 닦고 대검 집에 넣었다. 그리고 일어나 쉼터로 걸음을 옮겼다. 나를 쪼르르 달려와 내 다리에 매달리는 채연이를 품속에 안고 쉼터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강수련을 바라보니 꼴이 말이 아니다. 살짝 부어오른 오른쪽 광대와 퉁퉁 부어 버린 눈. 그리고 씻지 못해 잔뜩 엉겨 붙은 머리까지. 내가 바라보자 그녀도 자신의 꼴이 말이 아닌 걸 아는지 살짝 볼을 붉히며 내 시선을 피했다.

나도 괜히 시선을 피하며 테이블 위에 올려둔 음식을 먹고 채연이를 챙겨 달라고 당부했다. 강수련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품에서 내려온 채연이를 챙겼다. 채연이가 조금 뚱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애써 시선을 피하고 대검을 챙겼다. 그리고 다시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 문을 닫고 변기 위에 앉았다. 그리고 한편에 세워둔 총을 들고 기억을 더듬어 대검을 착검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탄창을 빼내어 총알을 확인했다. 역시나 3발이 그대로 장전되어 있었다. 나는 침을 삼키고 다시 탄창을 넣었다. 묵직한 무게가 손에서 느껴진다.

나는 총을 들고 천천히 화장실 문을 열었다. 어느새 남매도 잠에서 일어났는지 통조림을 개봉해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내가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자 일행들 시선은 나에게 향했고, 이내 내가 들고 있는 총을 발견하자 흠칫 놀라는 게 보였다.

나는 애써 담담한 척 총을 벽에 세워두고, 테이블 근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통조림을 열고 식사를 시작했다. 채연이는 어느새 쪼르르 달려와 내 무릎 위에 앉았고, 난 반대쪽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식사를 계속했다.

어제와는 다르게 확연한 온도 차이가 느껴졌다. 남매는 여전히 내 눈치를 보며 음식을 씹었고, 강수련은 괜히 그런 온도 차에 불안함을 느꼈는지 힐끔힐끔 나를 바라봤다. 채연이만이 오직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채연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마지막 비스킷 조각을 입으로 가져가 씹었다. 그리고 차가운 온도 차 사이에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일행에게 다시 도시로 갔다 오겠다는 말을 전했다. 눈이 오고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최대한 물품을 모아둘 생각이다.

그리고 사실……. 계속 이곳에 있기 고통스러웠다. 저항하지 않는 사람을 죽였다. 총알이 있음에도 쏘지 않은 사람을 죽였다. 내가 그놈들이랑 다른 게 무엇일까? 죄책감과 자기비하가 물밀듯 몰려왔다. 어제 나를 쳐다보던 이혜인의 눈빛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수련이 살짝 손을 들더니 나에게 같이 가자는 말을 해 왔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흔들어 부정의 의사를 표했다. 가방이 두 개라 가방을 하나씩 메고 둘이서 가는 게 효율적이긴 했다. 처음에는 강수련에게 같이 가자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나는 일행들 사이에 조그마한 균열이 생긴 걸 눈치챘다. 그 작은 균열이 언제 메꿔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기에 이곳에 강수련을 남겨 두어야 한다. 강수련이 괴한으로부터 채연이를 지키려 하던 그 날을 기억한다. 사람이 가장 솔직해질 때는 위기가 바로 앞까지 찾아 왔을 때다. 그런 상황에서 채연이를 지키려고 발버둥 친 그녀는 내가 이름을 물어봤던 그 순간 완전한 신뢰를 얻었다. 채연이를 믿고 맡길 사람은 강수련이 유일했다.

무언가 말이 꺼내고 싶은지 입을 우물거리는 진수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비스킷을 씹고 있는 이혜인을 바라봤다. 그리고 난 혼자 가겠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혼자가 편하다는 웅얼거림이 입속에서 맴돌았다. 말이 없어진 일행들과 차가운 공기만큼 싸늘한 침묵이 쉼터 내부를 차지했다.

식사가 끝나자 나는 빈 가방을 메고 천천히 일어났다. 채연이는 언제나 그렇듯 가지 말라는 무언의 항의를 하며 내 다리에 매달렸다. 하지만 채연이는 내가 어쩔 수 없이 가는 것임을 아는지 이내 눈물만 머금고 살며시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채연이 머리를 쓰다듬고, 한쪽 구석에 세워둔 총을 들었다. 그리고 강수련을 바라보며 채연이를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 다리에 매달린 채연이를 달래고 달래서 떼어내고는 문 앞에서 나를 배웅했다.

남매도 천천히 일어나 문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본다. 진수는 여전히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고, 이혜인은 아직도 내가 두려운지 시선을 피했다. 나는 애써 담담한 척 시선을 돌리고 문을 열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채연이가 훌쩍이는 소리가 천천히 멀어진다. 몇 번 오간 등산로는 이제는 친숙했다. 나는 익숙하게 방향을 잡고 천천히 등산로를 따라 산 아래로 내려갔다.

바람 때문에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가 을씨년스럽게 들려온다. 난 괜한 불안감에 사방을 둘러봤다. 흐린 날씨 때문인가 생기가 가득해야 할 산은 왠지 모르게 무섭게 느껴졌다. 난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가장 먼저 남매를 발견했던 편의점을 가 볼 생각이다. 한 번 털렸던지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혹시 내가 숨겨둔 물자가 남아 있을지 모른다. 핫팩과 라면을 가득 챙기면, 해가 지기 전에 쉼터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에서 천천히 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얀 눈송이가 하나둘 떨어지다 내가 산 아래 도착했을 때는 눈이 바닥에 소복하게 쌓였다. 난 천천히 고개를 들어 도시를 바라봤다. 사람이 없는 도시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동안 고통과 비명은 모두 거짓말이라는 듯 새하얀 눈이 내려와 모든 흔적을 덮었다.

크게 숨을 삼켰다. 그리고 난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회색 콘크리트 정글로 들어선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


0